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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240327928
    본문말씀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성경본문
    누가복음 23:32~43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17-10-29


2017년 새생명축제 01

(23:32-43) 회심

2017-10-22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저희 교회에 처음 오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먼저 여러분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해야겠습니다. 이유는 귀한 시간을 내어 오셨는데 심각한 장면을 보여드려서 그렇습니다. 지금 보여 드린 영상은 “Son of God”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이 장면과 연관된 성경구절을 이미 읽어 드렸습니다. 이 성경구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예수님과 두 강도인데 모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실화입니다.

 

혹 여러분들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형수들의 얘기가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지? 잔치자리에 불러놓고 끔찍한 죽음의 얘기가 경우에 합당한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끔찍한 죽음의 얘기가 기독교의 복음(좋은 소식)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동의하실 것입니다. 모든 인생에게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진리 가운데 하나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피해갈 인생은 없습니다. 천하장사나 호걸도 다 죽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도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관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은 죽음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 가운데 전도서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친지들의 죽음을 보면서 인생의 의미와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죽음을 아주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은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상에서의 삶은 일시적이고 짧지만, 죽음 이후의 삶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영혼이 결코 사라지거나 죽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죽음 이후에 우리 인생들이 영원토록 살게 될 세계가 두 곳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입니다.

 

요즘 초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천국과 지옥 얘기는 공상만화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천국과 지옥의 실재에 대해 설득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아주 당연한 듯이 그 실재를 기정사실로 말씀합니다.

 

더구나 천국과 지옥에 관해 가장 말씀을 많이 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별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불교 신자들도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성탄절을 축하합니다. 4대 성인 중의 한 분으로 꼽히고 있는 예수님께서 천국과 지옥에 관해 많이 말씀하셨다면 그 말씀을 농담처럼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은 천국과 지옥의 실상을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합니다. 천국은 눈물과 아픔이 없는 곳,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곳, 진리와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늘 새로움이 넘치는 곳 그래서 영원히 살고 싶은 곳이 천국입니다.

 

반대로 지옥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으로 묘사합니다. 고통이 가중되는 곳으로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래서 가고 싶지 않은 곳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천국과 지옥을 어느 정도 경험하고 있습니다. 기분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감동이 진하게 왔을 때 탄성을 지르며 말합니다. “, 이게 천국이야! 천국에 온 것 같아!” 대신에 끔찍한 일을 목격했을 때 지옥이야, 지옥이 있다면 저럴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간다고 성경은 말씀할까요?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 이후에 모든 인생이 제일 먼저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는 천사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어느 곳으로 들어가고 싶으냐?” 모든 사람들은 천국이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너무나도 대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이어서 질문할 것입니다. “네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천국이 있다면, 오늘 여기에 앉아있는 우리 모두는 천국에 들어가고 싶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성경은 아무나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조건 하나가 있는데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23:32-42) 기사의 중심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 근교에는 해골이라고 불리는 언덕(골고다)이 있었습니다. 그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십자가는 그 당시 가장 잔인한 사형 제도였습니다. 중죄인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극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게 한 사형 틀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운데 십자가에는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이 박혀 달리셨고 그 좌우에는 강도들이 달려있었습니다. 문맥(40-41)으로 봐서 두 강도는 공범자였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함께 흉악한 짓을 하다가 같이 체포되어 동일한 사형선고를 받고 지금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골고다 언덕까지 두 강도는 아주 가까이서 나란히 걸어왔습니다. 마지막까지 그들은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아주 가까이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 이 두 강도의 간격이 아득하게 멀어졌습니다. 두 강도 중에 한 강도가 마음을 달리했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는 마침내 한 강도를 낙원(천국)에까지 데리고 갔습니다(43). 이로써 두 강도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갈라졌습니다. 한 강도는 천국으로 다른 한 강도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무엇이 두 강도를 그렇게 갈라놓았을까요?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한 강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특별한 노력이나 전도를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이 강도는 몇 시간 동안 아주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보았는데 그것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기보다 먼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지금은 자기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계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자기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았습니다. 온갖 비방과 조롱을 가하는 군중들과도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십자가의 큰 고통을 감내하시면서 잠잠히 하늘의 뜻에 순응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강도는 지금까지 이런 분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 강도도 처음에는 자기 동료와 함께 예수님을 비방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를 구하시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저 예수가 누구시기에 저렇게 의연하실까?”라는 의문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죄 패가 붙어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 물론 이 죄 패는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써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 강도에게는 그것이 점점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정황을 보면 이 강도는 유대인이었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 강도는 예수님에 관해 소문을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셨는지, 그 전까지는 무슨 일을 하셨는지?’ 등등의 얘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이 강도는 소문으로 들었던 예수님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소문이 점점 믿음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한 마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34).”

 

이 한 마디 기도를 들었을 때 몇 시간 동안 자신의 내면에 솟구쳤던 의문이 순식간에 풀렸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나사렛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지 정치 해방자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기도하시는 중보자요 구원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지 휴머니스트나 성인이 아니라,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야(구세주, 평화의 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강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중대한 내면의 변화를 몇 마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 내면의 변화를 기독교에서는 회심이라고 합니다. 회심이란 마음과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뜻합니다. 강도의 마음과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40절 상반절은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는 다른 편의 강도를 보며 꾸짖는 말입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악을 자행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되었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습니다.

 

41절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는 것은 자신의 죄 때문에 받는 마땅한 형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유명한 수학자요 철학자였던 파스칼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죄인이면서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과 자기의 죄인 됨을 절실하게 깨닫는 사람입니다. 전자는 희망 없는 죄인이고 후자는 희망 있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도 변했습니다.

 

41절 하반절 이 사람(예수님)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라고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변호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자기가 예수님과 결코 상관없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십자가 처형장까지 따라갔던 자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입으로 변호할 수는 없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오직 한 사람만이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변호했습니다. 그 자가 바로 회심한 강도였습니다. 이 강도가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변호한 것은 자기의 죄를 담당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이 강도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예수님께 구원을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42,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 간청은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 구원을 부탁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원에 관해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럭저럭 살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 최고의 목적입니다. 좀 더 잘 먹고 잘 입고 좀 더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이 그들의 목표요 자랑입니다. 그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에서 구원받는 것,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출 받는 것이 그들에게 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구원의 근거로 자기 자신을 의지합니다. 자신의 선한 행위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깨끗이 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이요 사기입니다. 사람을 몰라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기 죄에서 자기를 구원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 구원자란 죄 없는 분이어야 합니다. 바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께 우리의 구원을 부탁할 때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유일한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르게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생명 되시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믿었을 뿐 아니라 고백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계시는 예수님께 자신의 구원을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강도는 미래관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이 세상과 자기만을 바라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예수님 안에서 천국을 보았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무력하게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늘나라의 왕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곧 하늘나라에 입성하시는 분으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에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왕으로 다시 오실 분으로 믿었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42)”라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 강도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화를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변호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을 소망했습니다.

 

이것이 회심(온전한 변화)입니다. 회심한 이 강도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즉시 응답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천국)에 있으리라!”

 

야유와 조롱과 멸시 속에서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예수님께서 회개하는 강도를 향하여 기쁨이 가득하여 입을 여셨습니다. 강도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지금 당장 낙원으로 가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도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강도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회개하는 순간, 예수님께서 나를 보십니다. 회개하자마자 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즉시 예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시각, 축복의 시각은 언제나 지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천국과 영생과 구원과 축복을 지금 베푸십니다. 누구에게 이 선물을 주십니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성경의 약속입니다.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왜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구주시요 주님이십니다.

 

오늘 새생명축제에 오신 분들 모두는 지금 이 시간,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구원 받은 자인가?” “내가 예수님 앞에서 죄인임을 진지하게 고백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구주요 주님으로 고백하는가?”

 

말씀을 맺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말씀에 대한 두 가지 반론입니다. 하나는 내가 오늘 본문에 등장한 강도처럼 흉악한 죄인인가?”라는 반론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다 오십보백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강도들만 죄인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 앞에서 거의 비슷한 죄인입니다. 공개적으로 사악한 죄가 드러난 죄인과 숨겨진 죄인이 있을 따름입니다. 사람들 앞에는 우리의 죄를 숨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 반론입니다. “여기의 한 강도처럼 죽을 때 회개하면 되겠네!”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를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살다가 죽을 때까지 회개하지 않고 죽기가 더 쉬운 자들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뒤로 미루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회개해야 앞으로의 인생을 행복하고 의미 있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의 대부분의 고백입니다. “왜 이렇게 좋은 예수님을 이제 믿게 되었는지.”라고 후회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살았던 때와 예수님을 믿고 사는 지금과 비교하면 천양지차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회개하고 지금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의 삶을 누립니다. 그날에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행복하기 위해 오늘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한 편 강도가 한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들에게 바라시는 회심입니다.

 

이러한 회심의 과정을 기도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주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제 죗값을 담당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지금 이 시간 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믿고 영접합니다. 나를 다스려주시고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 기도가 여러분의 마음에 드십니까? 지금 이 기도를 진지하게 드린다면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여러분의 죄를 다 용서하십니다. 그 즉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셔서 천국의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 찬송가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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