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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youtu.be/ak015heTUUg
    성경본문
    사무엘상 18장 1~16절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22-03-06

<다윗 05>

(삼상 18-20, 봉독 18:1-16) 다윗과 요나단: “우정

2022-03-06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전문

지난주일에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믿음의 관점에서 조명해보았습니다. 오늘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결투할 때 했던 말과 행동이 요나단에게 큰 도전과 감명을 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승리한 후에 골리앗의 머리를 손에 든 채 아버지 사울과 대화하는 다윗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요나단은 다윗에게 매료되었습니다. 그때의 요나단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1절에서 밝힙니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띠로 단단히 묶여져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는 것은 다윗을 위해서라면 자기 생명까지도 내놓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그런데 1절을 보면 언제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는지를 밝힙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쳤을 때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을까요? 바로 앞 절인 17:58에서 다윗과 사울 간에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질문에 다윗은 자신의 가문과 자라온 과정을 얘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얘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크고 놀라운 은혜를 간증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울도 다윗의 말에 감명을 받아 다윗에게 임무를 부여합니다(2). 그 임무는 블레셋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로써 다윗은 이스라엘의 정식 군사가 되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음으로써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를 향한 사랑과 우정이 변치 않기를 하나님 앞에서 약속했습니다(3). 언약의 증표로 요나단은 다윗에게 자기의 겉옷과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주었습니다(4). 다윗도 자신에게 부여된 전쟁의 뒤처리를 말끔하게 완수함으로써 요나단의 사랑과 우정에 화답했습니다. 다윗의 능력과 성실함을 확인한 사울이 다윗을 군대의 장(지휘관)으로 승진시켰는데 사울의 처사를 모든 백성들과 군사들이 합당히 여겼습니다(5).

 

 

6-7절을 보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사들을 백성들이 환영할 때 여인들이 나서서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했는데 그 노랫말이 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천천이나 만만은 평행법으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수가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노랫말에 심기가 크게 불편했습니다. “불쾌하여 심히 노했습니다.” 사울이 그렇게 반응한 이유를 8절에서 말합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나를 대신하여 다윗이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뜻입니다. 그날 이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습니다(9). 사울이 다윗을 주목했다는 뜻은 자기보다 다윗이 더 크게 칭송받는 것을 보면서 사울은 다윗의 일거수일투족을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감시했다는 뜻입니다.

 

 

10-12절을 보면, 개선식이 끝난 다음 날, 시기심으로 헝클어진 사울의 마음에 악령이 강력하게 임했습니다. 실성하여 정신없이 떠들어대는 사울을 위하여 다윗이 수금을 연주했는데 그때 사울이 다윗에게 두 번이나 창을 던졌습니다. 전사였던 사울의 창을 다윗이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셨기 때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로써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서의 저자는 다윗을 향한 사울의 두려움의 원인을 간명하게 밝힙니다(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의 마음에는 시기심만 아니라 두려움까지 엄습했습니다.

 

 

사울은 두려움의 대상이 된 다윗을 자기 곁에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으로 임명했습니다(13). 군사들을 훈련할 뿐 아니라 전쟁에 출전하여 진두지휘하는 야전사령관이 되게 했다는 뜻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야전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전쟁에서 전사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야전사령관의 임무도 잘 감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14). 그로써 사울은 다윗을 더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15). 하지만 백성들과 군사들은 다윗을 사랑했습니다(16). 그 이유를 다윗이 자기들 앞에 출입하기 때문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백성들을 섬기는 다윗의 사심 없는 헌신과 솔선수범하는 나라사랑의 행동이 백성들과 군사들의 신뢰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지난주일에 말씀드렸듯이 다윗의 그러한 모습과 행동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윗은 백성들이 사랑하고 신뢰하는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듯이 사울은 골리앗과의 결투에서 승리하는 자에게 큰 포상금을 내걸었습니다. 그 포상금 가운데 하나가 자기 딸을 주어 왕의 사위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 조건을 두 번이나 변경합니다. 블레셋과의 싸움에 계속 출전한다면 자기의 딸 메랍을 아내로 주겠다고 합니다. 다윗이 그 조건을 이행했는데도 사울은 메랍을 다른 사람의 아내로 주었습니다. 다른 딸 미갈이 다윗을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포피 100개를 갖고 오면 미갈을 아내로 주겠다고 다윗에게 전합니다. 그렇게 변경한 것도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25절 하반절). 그랬어도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포피 200개를 사울에게 바쳐서 사울의 사위가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사울은 다윗을 더더욱 두려워하게 되어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삼상 18:28-30) [28]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29]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30]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싸우러 나오면 그들이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되니라

 

 

19:1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라고 요나단과 신하들에게 명령합니다. 그 명령에 요나단은 두 가지의 행동을 합니다. 하나는 다윗을 잠시 도피시킵니다(2).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다윗을 정말 살해하려고 마음에 확정했는지 의중을 떠보기 위하여 다윗을 적극적으로 변호합니다(4-5).

 

 

사울은 아들 요나단을 말을 듣고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6). 요나단은 다윗을 불러 다시 왕 앞에 출입하게 하였습니다(7).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에는 다윗이 출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8).

 

 

19:9을 보면,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왕궁에 거할 때 사울 왕에게 다시 악령이 임했습니다. 이전처럼 다윗은 사울을 진정시키려고 수금을 탔는데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이 단창을 뽑아 다윗을 향해 찔렀습니다. 창을 피한 다윗은 그 밤에 집으로 도피했습니다(10). 사울은 다윗의 집에 군사들을 보내 다윗을 잡아오라고 했는데 미갈이 다윗을 빼돌려 도망치게 하였습니다(11-17).

 

 

그 길로 다윗은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로 피신합니다. 다윗은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사무엘에게 소상하게 전했습니다. 얼마간 다윗은 사무엘과 함께 나욧에서 기거했습니다. 나욧의 일차적인 뜻은 거처 혹은 숙소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찾아온 자들의 기숙사 겸 학교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18).

 

 

다윗이 라마 나욧에 기거하고 있다는 것을 사울이 알게 되었습니다(19). 사울이 군사들을 보내 다윗을 잡아오라고 하였는데 군사들이 다윗을 잡아오기는커녕 사무엘의 제자들과 함께 어울려 예언하는 무리가 되었습니다(20). 세 번이나 군사들을 파견했는데 모두 예언자들이 되었습니다(21). 그래서 사울이 직접 라마 나욧으로 갔는데 가는 도중에 성령이 임하여 걸어가며 예언했습니다(22-23). 나욧에 도착하여서는 실성하여 사무엘 앞에서 하루 종일 밤낮으로 옷을 벗어던진 채 알몸으로 누워 예언했습니다(24). 횡설수설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사울을 무장해제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딸 미갈이 아버지의 명령에 불복하고 다윗 편에 섰습니다. 영적 지도자인 사무엘도 자기에게로 도피해온 다윗을 보호했습니다. 사울 편에 선 자들은 봉록을 받는 신하들 외에는 없었는데 그들도 사울을 존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이 아직 왕의 자리에 앉아있지만 실제로는 지도력을 상실했습니다.

 

 

20:1절을 보면,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합니다. 자기 때문에 사무엘과 사무엘의 제자들이 크게 곤란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도망하는 길에 친구 요나단을 만나 자기의 궁박한 처지를 알리며 도움을 청합니다.

 

 

20장의 기사는 제법 길지만 내용은 간단합니다.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제거하려고 마음에 확정한 것을 요나단이 파악하고는 그 사실을 다윗에게 알려줌으로써 다윗이 안전하게 도피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은 이전에 맺었던 요나단과 다윗의 언약이 더욱 견고해졌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다시 약속합니다.

 

 

(삼상 20:4)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다윗이 요나단에게 부탁합니다.

 

 

(삼상 20:8) 그런즉 바라건대 네 종에게 인자하게 행하라 네가 네 종에게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하게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으면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아버지에게로 데려갈 이유가 무엇이냐 하니라

 

 

요나단은 다윗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이라고 맹세하면서 다윗을 안심시킵니다.

 

 

(삼상 20:12-16) [1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증언하시거니와 내가 내일이나 모레 이맘때에 내 아버지를 살펴서 너 다윗에게 대한 의향이 선하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 네게 알리지 않겠느냐 [13] 그러나 만일 내 아버지께서 너를 해치려 하는데도 내가 이 일을 네게 알려 주어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와 함께 하신 것 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14]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15]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16]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사무엘서의 저자는 다윗에게 한 요나단의 맹세를 간단히 정리하여 해설합니다.

 

 

(삼상 20:17)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에게 했던 말 가운데 중심 되는 단어는 인자함(헤세드)입니다(8, 15). 은혜, 자비, 친절, 사랑이라는 뜻을 모두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인자함(헤세드)의 출처는 하나님입니다(14, “여호와의 인자하심”). 그러므로 다윗과 요나단은 서로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처럼 인자함을 베풀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래야 다윗과 요나단이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언약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요나단은 식사하는 자리에서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살해하려고 굳게 작정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삼상 20:30-31) [30]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31]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독설을 퍼붓는 아버지에게 요나단이 다윗을 두둔하며 항변합니다(32). 항변하는 요나단에게 사울이 단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로써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결심한 것을 요나단이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33).

 

 

다음날 요나단과 다윗이 들에서 만나 석별의 정을 나눕니다.

 

 

(삼상 20:41-42) [41]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서로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4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다윗과 요나단은 어쩔 수 없이 이별하지만 변함없는 우정과 사랑을 확인했습니다. 다윗이 이 이후에 사울 왕의 추격으로 10년가량 험난한 세월을 지내는 동안에 그 시련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요나단의 우정과 사랑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대적이었던 사울 왕을 자기 손으로 해치지 않은 것도 요나단과 맺었던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41)”고 서로에게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으므로 사울 왕의 통치기간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으로 다윗은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때를 묵묵히 기다렸습니다.

 

 

삼상 23:15-18을 보면,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십 광야 수풀에 숨어있을 때 요나단이 다윗을 찾아가서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삼상 23:16-17) [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요나단은 다윗을 차기 왕으로 내정하신 하나님의 결정에 순복한다고 말하면서 다윗을 격려합니다. 요나단과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영원한 우정을 확인하고 헤어집니다. 이것이 요나단과 다윗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다윗이 폭력의 길을 거부하고 기꺼이 사랑과 섬김의 길을 걸어간 것은 친구 요나단의 사랑과 우정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친구 요나단의 사랑과 우정을 가슴에 간직하고 점점 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사람으로 성장해갔습니다.

 

 

사울과 요난단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다윗이 듣고는 조가를 지어 부릅니다. 그 조가가 삼하 1:19-2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하 1:23-26) [23]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25]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을 이어 왕이 될 자였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다윗이 왕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랬어도 다윗을 시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작정했음을 알았을 때 다윗을 안전하게 피신시켰습니다. 다윗도 요나단을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이 둘은 서로의 얼굴을 빛내는 참 좋은 친구였습니다.

 

 

(27:17)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요즘 우리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건강입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우정이 장수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비만이나 우울증은 물론 심장병까지도 예방해준다고 합니다. 육체적인 건강,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 우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좋은 친구가 있습니까? 그저 그렇고 그런 친구가 아니라 형제보다 더 가까운 친구가 있습니까? 정말 마음이 통하는 친구, 속사정을 다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 언제라도 달려가면 반갑게 맞아줄 친구,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절친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펴본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우정을 엿보게 합니다. 신약성경의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유일한 구주와 주님으로 소개합니다. 동시에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을 친구로 소개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정말 소개하고 싶은 친구, 자랑하고 싶은 친구였습니다. 예수님은 친구 같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독특한 신관입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보내면서 말했습니다. “혼인집에서 신랑의 친구가 기뻐하는 것처럼 나는 예수님 때문에 정말 기쁘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자신의 좋은 친구로 소개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제자들을 자기의 자랑스러운 친구인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요한복음 15:13을 인용했는데 요한복음 15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락방 강화(13-16)”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15:9-17)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친구로 삼으셨을까요? 금방 봉독한 11절에서 말씀합니다. “나의 사랑 안에 거하면(나와 친구로 지내면) 너희 속에서 나의 기쁨이 넘쳐날 것이다.”

 

 

우리가 경험한대로 세상 친구들로부터는 간혹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말다툼을 하고 갈라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실패했을 때 세상의 친구들은 하나둘씩 떠나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친구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쓰면서 예수님을 최고의 친구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친구가 되어 60년이 넘도록 살아보니 예수님이야말로 정말 멋진 친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예수님을 친구로 삼으세요!”라고 예수님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는데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매순간 예수님과 함께 걷고 예수님과 대화하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다면 친구 되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셔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용기와 평안과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친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또 다른 친구를 사귀라고 하십니다.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새 계명이란 늘 새롭게 마음에 새기고 삶으로 실천해야 할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인데 새 계명의 핵심은 사랑해야 할 친구는 둘보다 셋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친구 간의 우정은 둘보다는 셋이 더 바람직하고 견고합니다.

 

 

전도서에서도 두 겹줄보다는 세 겹줄이 더 견고하다고 교훈했습니다.

 

 

(4:9-12)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일대일로 사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우정의 완성을 위해 또 다른 사람을 친구로 끌어들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독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사랑을 넓히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친구로 모신 부부들은 예수님 때문에 부부 사랑이 더욱 깊어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부부의 사랑이야말로 자녀들에게 좋은 본이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가정이 될 때 비로소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 열려있는 가정, 이웃을 환대하는 가정이 됩니다. 세상 친구와의 사귐에도 그 가운데 예수님을 친구로 모시고 있으면 그 우정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깊어집니다. 예수님 없는 우정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변할 수 있지만 예수님을 사이에 둔 우정은 예수님 때문에 영원하고 안전합니다.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부탁합니다.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연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만남이 순수하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왜 사랑이나 우정의 관계가 둘보다는 셋이어야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로 존재하십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비로운 교리인데 하나님의 서로 다른 세 인격이 한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교리입니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그렇게 믿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수긍이 됩니다.

 

 

제가 이해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랑은 적어도 세 인격이 마주칠 때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숫자는 2가 아니라 3입니다. 두 사람만 서로 사랑하자고 하는 것이 세상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세상 드라마의 주제입니다. 그러나 둘만의 사랑을 고집할 때 이기적이 되어버립니다. 폐쇄적인 사랑입니다. 결국 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다른 존재가 들어올 때 더 순수하고 견고해집니다.

 

 

우리의 사랑이나 우정을 완성하게 하시려고 우리 사이에 들어오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인간관계 가운데 예수님을 모실 때 우리의 우정과 사랑은 안전합니다. 오늘 사무엘상 18-20장에서 확인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우정이 하나님 안에서 시작되었고 발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우정이 견고했으며 세월이 흐를수록 성숙해졌습니다.

 

 

예수원을 세우셨던 대천덕 신부께서 교회를 敎會라고 하지 말고 交會라고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배우는 곳이 아니라 교제하는 곳이 교회라는 뜻입니다. 참된 코이노니아(교제)가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예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과 교제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예수님과 성도들을 친구로 사귀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참된 교제가 이루어지는 친구들의 모임입니다.

 

 

다락방 강화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너희들은 종이 아니라 나의 친구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너희에게 다했다. 나는 너희들을 축복하고 기도한다. 내가 갖고 있는 좋은 것들을 너희들에게 아낌없이 주었다. 이제 하나 남은 최고의 선물을 보내줄 것인데 그 선물이 성령님이다. 그 성령님 안에서 너희들이 서로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어라! 그러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더 넓게 펼쳐질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회의 대변혁을 예고한 것입니다. 종이 변하여 친구가 되는 세상, 경쟁 상대가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동지가 되는 세상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친구들이 세상을 바꾸었는데 그 열매가 교회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린 대로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이요 친구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할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교회가 먼저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목장 안에서 교회 안에서 서로 친하게 지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좋은 친구들을 사귀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좋은 친구로 사귀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3년간 공사역을 하실 때 제자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니셨습니다.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는 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그들을 친구로 삼고자 세상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어울렸습니다. 여러 남편과 살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가까이 가셔서 살갑게 대화하셨습니다. 병자들의 친구가 되셔서 그들을 만져주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한 강도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으시면서 자신이 만인의 가장 좋은 친구임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너희들도 나처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라! 땅 끝까지 가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라!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라! 그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이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옛 친구로만 만족하지 말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라고 도전하십니다.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올해도 우리가 힘을 기울여 해야 일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일입니다. 그렇게 사귄 친구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그들을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의 한 식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큰 기쁨을 안겨드리는 열매입니다.

 

 

오늘 목회서신에 썼듯이 3월이 가기 전에 VIP(태신자)를 정하시기 바랍니다.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최대 사명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지상대명령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항구적인 비전대로 한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성도와 목장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 첫걸음이 바로 VIP를 정하고 그 VIP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그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의 결론입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의 식구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불신 가족이나 이웃들과도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해답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됩니다. 예수님과 친밀하게 친구로 지내면 교회 안에서도 세상에서도 친구들을 잘 사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참 좋은 친구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예수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견고하고 영원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친하게 지내면 최고의 친구이신 예수님께서 가족들과 이웃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우정을 더 깊게 하시고 넓게 하실 것입니다. 최고의 좋은 친구이신 예수님과 함께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좋은 친구로 다가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 찬송 620

 

 

 

 

요약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다윗을 본 요나단은 다윗에게 매료됩니다(1). 그리고 다윗과 서로를 향한 사랑과 우정이 변치 않기를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습니다(3~4). 이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다윗을 향한 여인들의 노래에 심기가 불편했던 사울은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다윗을 감시합니다(5~9). 다음 날, 자신을 위하여 수금을 연주하는 다윗에게 사울이 창을 던졌는데, 다윗은 날아오는 창을 두 번이나 피했고, 이에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합니다(10~12). 그래서 야전사령관으로 다윗을 임명하여 전사할 가능성이 높은 전장으로 그를 내보냅니다(13). 하지만 다윗이 그 일마저 잘 감당해내자 사울이 다윗을 더욱 두려워합니다(14~15). 심지어 다윗은 사울이 내걸었던 무리한 약속들을 완벽히 이행하여 사울의 딸 미갈을 아내로 맞이하는데, 이에 사울은 다윗을 더더욱 두려워합니다(18:28~30). 이후 사울은 다윗을 죽이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하지만 요나단의 도움으로 다윗은 목숨을 지키고, 이어지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시 큰 승리를 거둡니다(19:1~8). 또다시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이 다윗에게 창을 던졌는데, 창을 피한 다윗은 집으로 도피합니다(19:10). 그리고 미갈의 도움을 얻어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로 피신합니다(19:11~18).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이 군사들을 보내 다윗을 잡아오게 했는데 다윗을 잡아오기는커녕 사무엘의 제자들과 함께 어울려 예언하는 무리가 됩니다(19:19~21). 그래서 사울이 직접 라마 나욧으로 갔는데 가는 도중에 성령이 임하여 걸어가며 예언하고, 도착해서는 알몸으로 누워 예언합니다(19:22~24). 다윗은 자신 때문에 사무엘과 그의 제자들이 곤란해질 것을 알고는 라마 나욧에서 도망합니다(20:1). 도망하는 길에 요나단의 도움을 얻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로부터 안전하게 도피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영원한 친구가 될 것을 맹세하면서 다윗을 안심시킵니다(20:12~17). 여기서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에게 했던 말 가운데 중심 되는 단어는 인자함(헤세드)’입니다(8, 15). 인자함(헤세드)의 출처는 하나님입니다(14). 그러므로 다윗과 요나단은 서로에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대할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살해하려고 작정한 것을 확인합니다(20:30~33). 다음날 요나단과 다윗이 들에서 만나 석별의 정을 나눕니다(20:41~42). 이후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십 광야 수풀에 숨어있을 때 요나단이 다윗을 찾아가서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라고 말하며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고 헤어집니다(23:15~18). 다윗은 요나단의 사랑과 우정을 가슴에 간직하고 점점 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어느 날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조가를 지어 부릅니다(1:23~26). 다윗과 요나단은 서로를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이 둘은 서로의 얼굴을 빛내는 참 좋은 친구였습니다(27:17).

 

 

여러분은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좋은 친구가 있습니까?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유일한 구주와 주님, 그리고 친구로 소개합니다(15:9~17).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삼으신 이유는 주님 안에서 넘치는 기쁨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친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또 다른 친구를 사귀라고 하십니다(13:34~35). 친구 간의 우정은 둘보다는 셋이 더 바람직하고 견고합니다(4:9~12). 이유는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서로 다른 세 인격이 한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을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랑은 적어도 세 인격이 마주칠 때 완성됩니다. 우리의 사랑이나 우정을 완성하게 하시려고 우리 사이에 들어오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도 하나님 안에서 시작되었고 발전하였습니다.

다락방 강화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이 변하여 친구가 되는 세상, 경쟁 상대가 동지가 되는 세상을 예고하셨습니다. 그 일을 교회가 이루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할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 인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라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을 변혁하려면 새로운 친구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최대 사명은 우리교회의 항구적인 비전대로 한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성도와 목장과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그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의 식구들, 불신 가족이나 이웃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친밀하게 친구로 지내면 교회와 세상에서 친구들을 잘 사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견고하고 영원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신뢰하며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친하게 지내면 예수님께서 가족들과 이웃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우정을 더 깊고 넓게 하실 것입니다. 최고의 친구이신 예수님과 함께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좋은 친구로 다가가시길 축복합니다.

 

 

 

 

목장에서의 나눔

1.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삼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2.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먼저 무엇을 해야 하나요?

3. 어떻게 하면 가족, 성도, 이웃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나요?

  • 경건한 예배, 진정한 효행
    • 설교자 : 안정순 목사
    • 성경본문 : 창세기 4장 3~12절
    • 설교일 : 2022-05-08
  • 어린아이들을 용납하라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마태복음 19장 13~15절
    • 설교일 : 2022-05-01
  • 다윗과 아비가일: 반려자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25장
    • 설교일 : 2022-04-24
  • 예수님의 부활, 우리의 부활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5장 16~22절
    • 설교일 : 2022-04-17
  • 하나님의 열심, 우리의 열심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이사야 62장 1~12절
    • 설교일 : 2022-04-10
  • 다윗과 사울: 기름부음을 받은 왕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24, 26장
    • 설교일 : 2022-04-03
  • 다윗과 광야: 피난처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23장 1~29절
    • 설교일 : 2022-03-27
  • 다윗과 그의 사람들: 공동체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21장 10절~22장 5절
    • 설교일 : 2022-03-20
  • 다윗과 도엑: 성소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21장 1~9절
    • 설교일 : 2022-03-13
  • 다윗과 요나단: 우정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18장 1~16절
    • 설교일 : 2022-03-06
  • 다윗과 골리앗: 믿음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17장 32~40절
    • 설교일 : 2022-02-27
  • 다윗과 사울: 섬김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16장 14~23절
    • 설교일 : 2022-02-20
  • 다윗과 사무엘: 하나님의 선택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16장 1~13절
    • 설교일 : 2022-02-13
  • 다윗과 예수님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마태복음 22장 41~46절
    • 설교일 : 2022-02-06
  • 은혜로 사는 삶(2)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열왕기하 5장 1~27절
    • 설교일 : 2022-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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