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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youtu.be/SFHxPsh2TSs
    성경본문
    골로새서 3장 18~21절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21-09-26

<골로새서 강해 10>

(3:18-21) 육신의 가족들을 잘 섬깁시다!

2021-09-26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전문

바울은 3:1부터 4:6까지 골로새 교회에 잠입해 들어온 거짓 교사들에 맞서서 성도와 교회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대안으로 크게 대여섯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추구하라고 합니다(3:1-4). 둘째는 옛 사람의 행위들을 벗어버리라고 합니다(3:5-11). 셋째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라고 합니다(3:12-17).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네 번째 대안을 제시합니다. 육신의 가족들인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를 잘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가정생활에 충실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거짓 교사들 가운데 가정생활을 하찮게 여기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요즘도 대부분의 이단들이 그렇습니다. 이단에 빠진 자들을 보면 가정생활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2:23에서 골로새 교회에 잠입해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자기들의 몸을 괴롭게 했다고 하는데 이는 일부러 자기들의 몸을 고통스럽게 하면서까지 금욕적인 행위를 한 것을 의미합니다. 엄격하게 음식규례와 절기규례를 지킴으로써 몸을 괴롭게 하면 신비로운 환상체험을 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고 있던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밝히면서 그들의 가르침이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딤전 4:3-5) [3]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이처럼 초대교회 시절에 거짓 교사들이 떠벌린 것들 가운데 하나가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차원 높은 세계에 들어가려면 가정생활에 매여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가정생활이 경건생활과 신비체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가족들을 잘 섬기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강조합니다. 18절에서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20절에서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여기 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정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기로 태어나 부모의 돌봄 속에서 잘 자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성장하면서 육신의 부모를 잘 섬겼습니다. 동생들도 잘 돌보았습니다. 독립할 때까지 아버지 요셉의 가업을 이어받아 가족들을 열심히 부양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육신의 가족들을 잘 섬기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의 가족들을 잘 섬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행복한 가정의 기초는 원만한 부부관계에 있습니다. 부부관계가 원만할 때 가정은 행복합니다. 반대로 부부관계가 깨어질 때 가정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부부가 화목하지 않으면 양가의 부모님께 효도할 수도 없고 자녀를 바르게 양육할 수도 없습니다. 부부가 화목하면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크지만 부부관계가 파괴되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국 가정이 파산하고 맙니다. 부부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가정의 기초가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깨어지는 가정이 늘수록 사회의 기강도 무너집니다. 사회의 기초공동체가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가정이 많아져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가정이 행복해야 교회도 건강하게 성장하며 사회도 건전하게 발전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정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정의 핵심인 부부관계를 강조합니다. 오늘의 본문도 마찬가집니다. 18절에서 아내에게 권면하고 19절에서 남편에게 권면합니다. 그런 다음에 자녀와 부모에게 권면합니다(20-21).

 

 

오늘 본문을 보면 남편보다 아내를 먼저 언급합니다. 에베소서(5:22-33)와 베드로전서(3:1-7)에서도 그렇습니다. 바울과 베드로 사도가 아내를 남편보다 먼저 언급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초대 교회 당시에도 부부가 함께 기독교 신앙을 가진 가정은 별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을 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남편에게서 적지 않은 핍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아내가 남편의 종교를 따르도록 규정한 로마법에도 저촉이 되었습니다. 여자라는 신분만으로도 무시를 당하던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고난까지 당했던 아내들의 삶이 얼마나 처절했겠습니까? 홀로 믿는 남자 성도들의 처지는 그래도 나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가정에서는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들이 남편들보다도 아내들을 향하여 우선적으로 목회적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들이 부부에 관해 권면할 때 남편보다 아내를 먼저 언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아내들을 위한 권면(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에베소서에서는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를 보다 더 명확하게 밝힙니다.

 

 

(5:22-23)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가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몸은 머리에게 항상 복종합니다. 몸이 머리에 붙어 있는 한 머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해서 아내가 남편보다 열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남녀의 우열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주전 384-322)남자가 여자보다 명령을 내리는 데 천성적으로 더 적합하다. 따라서 남자가 여자를, 남편이 아내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했는데 이 같은 사상이 1세기 당시에도 널리 통용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바울이 주장한 남녀 간의 평등사상은 정말 혁명적인 발상이었습니다.

 

 

남녀 간의 평등사상은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부터 불변의 원칙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창세기는 말씀합니다.

 

 

(1:26-27)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수 인칭대명사인 우리라고 표현했는데 여기서 삼위일체 교리가 나왔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한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교리인데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는 공동체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닮은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사람도 역시 공동체로 존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남자 홀로, 여자 홀로는 사람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남녀로 존재합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또 한 가지 의미는 세 분 하나님 사이에 우열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온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었으므로 온전함의 충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따라 창조된 남녀도 서로의 관계 안에서 우열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여자에게 있어서도 남자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서로를 향해 존귀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남녀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이며 그 관계를 통해서 온전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아담이 홀로 지내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돕는 배필로 하와를 주셨습니다. 아담에게 하와가 없으면 아담은 온전할 수 없었습니다. 아담은 하와로 인하여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 보충되어야 했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대면했을 때 그녀의 존귀함을 노래했습니다.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이 남녀의 연합입니다. 서로에게서 존귀함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이 정상적인 부부관계입니다.

 

 

부부관계가 서로 대등한 관계라고 해서 질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삼위 하나님 사이에 질서가 있는 것처럼 부부관계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사이에는 그 역할에 있어서 아름다운 조화와 질서가 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그 역할에 있어서 차이가 있고 그 차이를 연결함에 있어서 조화와 질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뜻입니다. 좀 전에 말씀 드렸듯이 성경적 머리 개념은 불평등을 조장하는 지배개념이 아니라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남편이 한 가정의 가장인데 이는 남편이 가정을 자기 마음대로 주장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가정의 모든 일에 우선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가정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책임이 우선적으로 남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잘 수행하려면 한 몸인 아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야 남편이 자기의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돕는 배필로서의 아내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 아내의 역할 가운데 우선되는 것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결혼제도와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남편을 가장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한 복종하라는 단어는 굴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즐겁게 자원하여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마치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즐겁게 자원하여 순종했듯이 그렇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남편을 존경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편의 말과 행실이 아주 거칠고 난폭하여 정말 견디기 힘들 때에 아내가 어떻게 그런 남편에게 즐겁게 자원하여 순종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 사도는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남편을 섬겨보라고 권합니다. 그러면 혹 남편이 감동을 받아 사람이 달라질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합니다.

 

 

(벧전 3:1-4) [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2. 남편들을 위한 권면(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사랑하라는 동사는 원어로 자신을 내주는 아가페 사랑(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1세기 당시 그 어느 사회에서도 남편들에게 아내를 이타적으로 희생적으로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아내는 남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통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향한 남편의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은 기독교 특유의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아내를 향한 남편의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의 표본을 제시합니다.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남편의 머리 역할은 아내를 보호하고 부양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사랑이 필수적입니다. 그 사랑의 표본이 바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금지명령을 내립니다.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내를 무시하지 말라, 아내에게 함부로 말하거나 거칠게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아내를 즐거워하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

 

 

(벧전 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또는 그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 같이 여겨 지식을 따라 동거하고

 

 

3. 자녀들을 위한 권면(20)

 

 

(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6:1-3)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 자녀들에게 준 바울의 권면을 하나로 묶어 표현하면, “자녀들아, 모든 일을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권면인데 이것은 부모와 관계된 모든 일을 주 안에서 재해석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재해석할 때 결국 부모를 공경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부모와 관계된 모든 일을 주 안에서 재해석한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부모의 약점이나 단점을 크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단점과 약점이 있으므로 그것을 제일 작은 것으로 축소시키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부모의 장점과 강점을 확대하라는 것입니다. 즉 부모가 물려준 귀한 자산을 극대화하라는 것입니다. 그 자산에 감사하고 그것이 나에게 가장 귀한 자산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잔소리를 할 때, 그 잔소리를 귀찮게 여기기 말고 그 잔소리 속에 깊이 박혀있는 자식을 향한 강렬한 사랑을 느끼라는 것입니다. 잔소리하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가 행복할 때입니다.

 

 

부모로부터 상처 받았습니까? 그것조차도 나를 성숙하게 한 도구로 재해석할 때 부모에게 감사할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감사할 때 부모를 즐거워하게 됩니다. 이처럼 부모공경의 핵심은 부모를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은 주님을 즐거워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만약에 부모를 즐거워할 수 없다면 어떻게 부모를 주신 주님을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를 즐거워하지 않으면서 주님을 즐거워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와의 관계 회복과 주님과의 관계 회복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자녀들이 부모를 즐거워할 수밖에 없는데 왜 그럴까요? 자녀들이 주님을 즐거워하면, 부모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달라집니까?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부모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이 확립됩니다.

 

 

1) 부모는 하나님의 복을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통로입니다.

 

 

부모의 역할 가운데 하나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복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생명과 복을 부으신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6:2-3)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2) 부모는 하나님 말씀의 전달자입니다.

 

 

부모의 훈계와 가르침은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4:1-4) [1]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2]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 [3]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4]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부모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도 부모의 말씀을 새겨들으면 버릴 것이 없습니다.

 

 

3) 부모는 하나님의 성품을 일정부분 반영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 같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처럼 엄하신 분이십니다. 훈계하시고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처럼 든든한 보호자이십니다.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어머니처럼 오래 참습니다. 끝까지 자기 자녀를 사랑하십니다. 무슨 일이라도 이해하십니다. 자기의 자녀를 편듭니다. 기꺼이 용서하십니다. 희생하십니다. 어머니처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녀를 따뜻하게 품어주시고 위로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때 하나님의 마음도 이해하게 됩니다. 누가 철든 자식입니까?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식입니다. 부모의 마음 한가운데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읽어내어야 철이 든 자식입니다.

 

 

그러므로 자녀 여러분, 부모와의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더 나아가서 부모님을 즐거워하십시오! 부모님과 관계된 모든 일을 주님 안에서 재해석하십시오! 부모님에 대하여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좋은 점을 생각하세요. 부모의 마음을 읽으세요! 거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찾으세요. 부모님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찾으세요.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마음을 부모님께 주세요. 감사의 표현을 자주 하세요. 부모 곁에 있기를 즐거워하세요.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풍성히 누릴 것입니다.

 

 

4. 부모를 위한 권면(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여기 아비들아라고 했다고 해서 어머니가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의 대표자격으로 아버지를 거론한 것입니다. 고대의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아버지는 집에서 왕처럼 절대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아버지에게서 큰 상처를 받기도 하고 분개심이 끓어오르기도 했습니다. 여기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은 분개하게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요즘에는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경우보다 자녀가 부모를 노엽게 하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것입니다. 여하튼 바울은 본문에서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경우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설령 자녀가 부모를 노엽게 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성숙한 어른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할 때 자녀의 바른 성장에 큰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경우를 대략 5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1) 과잉보호

 

 

정당한 보호와 금지가 아니라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과잉보호 하는 부모들 밑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은 대체로 자신감이나 자존감이 낮습니다. 의존적입니다. 유약합니다. 자녀들의 잠재력과 창의성이 억압됩니다. 이런 자녀들은 화를 내면으로 삭입니다. 겉으로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 같지만 부모를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부모와 함께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자녀를 잃어버리기 원하면 자녀를 과잉으로 보호하면 됩니다.

 

 

2) 편애

 

 

부모가 아주 조심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자녀들을 공평하게 대우하지 못하고 편애하는 것입니다. 이삭의 집에 편애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장자인 에서를 좋아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차자인 야곱을 좋아했습니다. 그 결과는 이삭 집안에 숱한 세월을 하나 되지 못한 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조심해야 합니다. 부모가 한 아이를 다른 아이보다 더 좋아할 때 자녀의 본성에 숨겨져 있는 시기심과 미움의 감정을 더욱 부채질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 부모의 가치관이 너무 세속적일 때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으레 부모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회의를 느낍니다. “우리 아빠는 왜 저러실까? 일밖에 몰라! 엄마는 왜 돈에만 신경 쓸까? 더 가치 있는 일이 많은데 그런 일에는 왜 관심이 없을까?” 어릴 때는 엄마 아빠가 최고로 보였는데 부모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의 실상을 보게 되면서 실망하게 됩니다. 존경심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부모와 심중에 있는 깊은 얘기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배울 게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녀교육은 실패입니다.

 

 

4) 무관심할 때

 

 

과잉보호도 문제이지만 무관심도 문제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그 어떤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기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를 한 번씩 점검합니다. 그 때마다 부모의 무관심이 계속 확증된다면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자녀들은 자기에게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에게 빠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관심을 다른 누구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 결핍증입니다. 이러한 자녀들은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안정을 누리지 못합니다. 정서도 불안합니다. 탈선하기가 쉽습니다.

 

 

5) 가혹한 꾸중, 무절제한 욕설, 지나친 체벌

 

 

아이들이 가장 불안해하고 싫어하는 것은 부모가 쉽게 화내는 것입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하든지 마구잡이로 욕설을 퍼부을 때 자녀들의 마음에는 분노가 일어납니다. 부모들의 폭력과 욕설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의 마음에는 깊은 상처가 새겨집니다. 이 상처는 어른이 된 후에도 쉽게 치유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쓴 뿌리가 되어 정상적인 성장을 방해합니다.

 

 

이상과 같은 부정적인 태도와 언행으로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면 자녀의 마음이 낙심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21절 하반절). 여기 낙심하다는 뜻은 의욕을 잃을 정도로 낙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자녀가 갖고 있는 잠재력과 창의력이 말살됩니다. 대신에 열등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부모를 향한 원망이 교회와 사회를 향한 불만으로 표출되기가 쉽습니다. 조사된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자녀들이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가 아주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자녀를 노엽게 하는 대신에 적극적으로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바울은 권합니다.

 

 

(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녀들을 양육할 때 항상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을지 생각하고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크리스천 부모들이 감당해야 할 자녀교육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은 자녀로 키우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이루려면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먼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그럴 때 부모는 자녀들에게서 존경받습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이 어떤 곳일까요? 즐거움이 가득한 곳입니다. 아픔이나 눈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천국이 죽은 다음에 가는 곳만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여기서도 천국을 경험하고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천국을 맛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천국을 맛보려면 가족들이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사랑으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요약하면, 가정에서 천국을 맛보려면 가족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서로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한밭교회 교우들의 가정마다 가족들 간에 서로를 즐거워하셔서 가정에서 천국을 생생하게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 찬송 559

 

 

 

 

요약

골로새 교회에 잠입해 들어온 거짓 교사들 중 일부는 가정생활이 영적으로 더 높은 차원에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가족들을 잘 섬기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강조합니다(18, 20).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육신의 가족들을 잘 섬기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의 가족들을 잘 섬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딤전 5:8). 그래서 성경은 가정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정의 핵심인 부부관계를 강조합니다.

 

 

1. 아내들을 위한 권면(18)

아내는 아내의 머리인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5:22~23). 아내가 남편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3:28). 남편이 아내를 책임진다는 뜻입니다. 세 분 하나님 사이에 우열이 없듯이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따라 창조된 남녀 안에도 우열이 존재하지 않습니다(1:26~27). 서로에게서 존귀함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이 정상적인 부부관계입니다. 그리고 삼위 하나님 사이에 아름다운 조화와 질서가 있듯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역할의 차이가 있고 그 차이를 연결하기 위한 조화와 질서가 필요합니다. 남편은 가장으로서 가정의 모든 일에 우선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내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아내의 돕는 배필로서의 역할 가운데 우선되는 것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한 복종하라는 단어는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하신 것처럼 즐겁게 자원하여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남편을 존경할 수 없는 경우에도 최선을 다해 남편을 섬겨보아야 합니다(벧전 3:1~4).

 

 

2. 남편들을 위한 권면(19)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라는 자신을 내주는 아가페 사랑(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남편의 머리 역할은 아내를 보호하고 부양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사랑이 필수적입니다. 그 사랑의 표본이 바로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5:25). 그리고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고 아내를 즐거워하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벧전 3:7).

 

 

3. 자녀들을 위한 권면(20)

자녀들은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20; 6:1~3). 그러려면 부모에게 감사하며 부모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특별히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자녀들은 부모를 즐거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이 주님을 즐거워하면 부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성경적인 관점이 확립됩니다. 첫째, 부모는 하나님의 복을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생명과 복을 부으십니다(6:2~3). 둘째, 부모는 하나님 말씀의 전달자입니다. 부모의 훈계와 가르침은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합니다(4:1~4). 셋째, 부모는 하나님의 성품을 일정부분 반영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처럼 훈계하시고 징계하시며 어머니처럼 오래 참으십니다. 끝까지 자기 자녀를 사랑하시고 기꺼이 용서하시고 희생하십니다. 부모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찾고 감사의 표현을 자주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풍성히 누릴 것입니다.

 

 

4. 부모를 위한 권면(21)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경우는 대략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과잉보호입니다. 과잉보호를 당한 자녀들은 대체로 자신감이나 자존감이 낮습니다. 잠재력과 창의성이 억압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 같지만 부모를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둘째, 편애입니다. 편애는 자녀의 본성에 숨겨져 있는 시기심과 미움의 감정을 더욱 부채질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세속적인 부모의 가치관입니다. 부모의 세속적인 인생관이나 가치관의 실상을 보면서 자녀들이 실망합니다. 그래서 부모와 깊은 얘기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넷째, 무관심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낀다면 자기에게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주는 사람에게 빠져 버립니다. 이러한 자녀들은 정신적, 인격적으로 안정을 누리지 못하고 탈선하기가 쉽습니다. 마지막으로 가혹한 꾸중, 무절제한 욕설, 지나친 체벌입니다. 부모들의 폭력과 욕설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의 마음에는 분노와 깊은 상처가 새겨집니다. 이 상처는 어른이 된 후에도 쉽게 치유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태도와 언행으로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면 자녀가 낙심합니다. 부모를 향한 원망이 교회와 사회를 향한 불만으로 표출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6:4). 그러려면 부모들이 먼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성도는 지금 여기서도 천국을 경험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가정에서 천국을 맛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천국을 맛보려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사랑으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요약하면, 가정에서 천국을 맛보려면 가족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서로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한밭교회 교우들의 가정마다 가족들 간에 서로를 즐거워하셔서 가정에서 천국을 생생하게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목장에서의 나눔

1. 아내와 남편은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

2. 자녀와 부모는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

3. 어떻게 하면 가정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나요?

 

  • 성도의 교제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빌레몬서 1장 1~7, 21~25절
    • 설교일 : 2021-10-24
  • 복음의 동지들을 축복합시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골로새서 4장 7~18절
    • 설교일 : 2021-10-17
  • 복음의 진전을 위해 힘씁시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골로새서 4장 2~6절
    • 설교일 : 2021-10-10
  • 사랑으로 종노릇합시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골로새서 3장 22절 ~ 4장 1절
    • 설교일 : 2021-10-03
  • 육신의 가족들을 잘 섬깁시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골로새서 3장 18~21절
    • 설교일 : 2021-09-26
  • 건강한 사회, 행복한 가정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시편 127편 1~5절
    • 설교일 : 2021-09-19
  • 예수님의 제자로 삽시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골로새서 3장 12~17절
    • 설교일 : 2021-09-12
  • 옛 사람의 악덕을 벗어 버립시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골로새서 3장 5~11절
    • 설교일 : 2021-09-05
  • 위에 있는 것들을 추구합시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골로새서 3장 1~4절
    • 설교일 : 2021-08-29
  • 영적 전투에서 승리합시다(2)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골로새서 2장 16~23절
    • 설교일 : 2021-08-22
  • 참 자유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5장 1절, 13절
    • 설교일 : 2021-08-15
  • 영적 전투에서 승리합시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골로새서 2장 4~15절
    • 설교일 : 2021-08-08
  • 바울처럼 교회의 좋은 일꾼이 됩시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골로새서 1장 24절~2장 3절
    • 설교일 : 2021-08-01
  • 바울처럼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골로새서 1장 15~23절
    • 설교일 : 2021-07-25
  • 바울처럼 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골로새서 1장 9~14절
    • 설교일 : 202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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