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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494875671
    본문말씀
    창세기 23장 1~20절
    성경본문
    창세기 23장 1~20절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20-12-27

 

<아브라함 18>

(22:20-25:11, 봉독 23) 인생

2020-12-27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전문

오늘은 송년주일입니다. 오늘과 금주 한 주간, 주님 안에서 한 해를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를 기쁘기 맞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 분문은 창세기 23장이지만 오늘 설교에서 다루게 될 부분은 22:20부터 25:11까지입니다. 이렇게 길게 잡은 것은 오늘로써 아브라함에 관한 창세기 설교를 마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제가 집중해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인생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의 주제가 단순히 인생의 죽음에만 그 초점이 맞추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이 세상에서 호흡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에 관하여 성경적 교훈 몇 가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래서 설교제목을 인생이라고 정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사람이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믿음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입니다. 사라가 먼저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보다 38년을 더 살았지만 그도 역시 죽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상식적인 진리를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홀로 죽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 사이라도 죽음을 대신할 수 없고 죽음의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없습니다. 동반 자살을 한다고 해도 죽음을 공유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언제나 개인적입니다. 각자가 홀로 져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를 자기가 대신 죽어서 살릴 수 있다면 그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차례차례로 한 사람씩 죽는 것이 인생의 죽음입니다.

 

태어난 순서대로 죽지는 않습니다.

 

태어난 순서대로 죽는다면 아브라함이 먼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라가 먼저 죽었습니다. 대체로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환자의 상태를 보면서 임종시간을 의사가 대략 예측할 수 있지만 그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기에 사랑하는 가족들조차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은 반드시 죽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에녹과 엘리야가 죽지 않고 산 채로 승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그때 살아있는 성도들도 산 채로 공중에 들려져서 예수님을 맞게 되고 그 즉시 천국에서 영원토록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보편적인 진리는 하나님이 부르시면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그 즉시 떠나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저 세상으로 갑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죽음이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건강할 때에는, 열심히 일하는 동안에는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죽음이 나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끼며 삽니다. 이것은 건강한 생각이며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냥 죽음을 멀리서만 느끼고 살 수는 없습니다. 시련의 때를 만날 때 죽음이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얘기인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가족들이 먼저 세상을 떠날 때 죽음이 성큼 내 곁에 가까이와 있음을 경험합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이 같은 경우를 당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창세기를 계속 읽어왔는데 기록된 말씀에 따르면 아브라함 가정에 첫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23:1-2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울었다는 기록은 여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사라의 처지가 불쌍해서 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홀로 남아 외롭게 살아가야 할 자신의 불쌍한 처지 때문에 운 것도 아닐 것입니다. 대신에 아브라함이 사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드러내줍니다. 이 땅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브라함이 왜 슬퍼하며 애통해 했는지 그 이유를 두 가지 정도 더 보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00년이 넘도록 함께 살면서 묵묵히 따라준 아내가 너무 고마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상 때부터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고향을 정처 없이 떠날 때 사라는 남편의 뒤를 묵묵히 따랐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이동하며 살면서도 62년 동안 불평 없이 살았습니다. 남편이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두 번씩이나 자기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일 때도 사라는 숙맥처럼 남편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요사이 똑똑하다고 나서는 현대여성들의 관점에서 보면 사라는 정말 바보 같은 아내입니다. 여성잡지에서 대체로 주장하는 것은 아내들이여, 남편을 잡아라!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같은 여성의 현대화와 세속화는 가벼운 아내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정말 묵직한 아내, 남편을 듬직하게 받쳐주는 아내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라가 모든 크리스천 아내들의 전형이라고 말씀합니다.

 

(벧전 3:1-6) [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아내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지난날들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금방이라도 살아나서 미소 지으며 이렇게 속삭일 것만 같았습니다. “여보, 당신이 좋다면 그렇게 하시구려! 하나님께서 그리하라고 하셨다고요. , 저도 따를 게요. 용기를 내세요. 누구나 실수하는 것 아니에요. 너무 미안하게 생각지 마세요. 제 사랑은 변함없으니까요!”

 

아내의 깊은 사랑과 정을 회상하면서 아브라함은 저절로 아내에게 감사의 말을 했을 것 같습니다. “여보, 그 동안 참 고마웠소! 당신은 정말 좋은 아내였소!” 그래서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 좀 더 따뜻하게 대하지 못했던 것 생각하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가 함께 살 날, 그리 길지 않습니다. 한 편이 먼저 갑니다. 그런데도 영원히 살 것처럼 조그만 일에도 서로에게 눈을 부릅뜨고 언성을 높이고 마음 아프게 하는 것,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부부가 함께 사는 동안 서로를 즐거워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따뜻하게 품어주기만 해도 짧은 세월입니다. 지금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신 분, 계십니까? 회개하십시오. 문제는 먼저 자신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부부관계를 조사하는 앙케트 가운데 당신이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배우자와 결혼하겠습니까?”라는 설문이 있습니다. 상당수가 죽으면 죽었지 그리 못하겠다.”고 답한다고 합니다. 부부생활이 지긋지긋했다는 고백입니다. 이런 부부는 정말 불행한 부부입니다. 크리스천 부부는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여보, 미안했소! 생전에 더 잘했어야 했는데 용서하시구려! 나도 곧 따라 가겠소! 그때 웃으며 만납시다!”

 

아브라함은 좋은 아내를 잃고 한참 동안 슬퍼하며 애통했습니다. 그러나 슬픔을 딛고 일어났습니다.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3:3-4) [3]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4]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아브라함은 그때까지 자기 명의의 땅이 한 치도 없었습니다. 풀과 물을 따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유목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내의 죽음으로 매장지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매장지를 구입하기 위해 헷 족속에게로 나아갔습니다.

 

헷 족속 앞에서 아브라함이 말문을 연 것은 아브라함의 인생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죽음 앞에서 인생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인생을 겸손하게 합니다. 인생들로 하여금 인생의 주인이 자기가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인생은 잠깐 동안 이 땅에서 우거하다가 떠나야 하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신앙이 없으면 인생은 정말 허무합니다. 마치 밤이 되어도 돌아갈 집이 없는 노숙자와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 떠날 때 돌아갈 집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아내의 죽음을 보면서 자기도 곧 죽게 될 것을 실감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돌아갈 본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1:13-16) [13] 이 사람들(구약시대 믿음의 족장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본향은 천국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약속하셨습니다.

 

(14:1-3)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어떤 자가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천국에 들어갑니까? 그 해답이 요 14:6입니다.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 믿으면 천국에 들어갑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은 우리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을 가진 자의 나그네라는 인생고백은 자조적이거나 비관적인 고백이 아닙니다. 참으로 멋있는 고백입니다. 돌아갈 아름다운 본향을 사모하는 자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완전한 행복의 시작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도 소망 가운데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매장지를 돈을 지불하고 구입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자기도 곧 죽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죽더라도 아들 이삭과 그 후손들이 굳게 붙잡아야 할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반드시 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명의로 삼은 첫 소유지에 아내의 시신을 묻으면서 아들 이삭에게 장차 가나안 모든 땅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심어주고자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언을 들었습니다. 자기의 후손들이 이방에 객이 되어서 400년간 괴로움을 당하다가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자기의 후손들도 그 말씀을 잊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그리고 아내와 자기가 묻힌 땅으로 반드시 돌아오도록 하고자 헷 족속에게 큰 돈을 지불하고 막벨라 굴과 그 일대를 구입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100%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믿었습니다. 그 믿음의 증거로 매장지를 구입했습니다. 믿음의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수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대부분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약속도 곧 성취될 것입니다. 이제 곧 성취될 하나님의 최종적인 약속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몇 개의 성경구절만 봉독하겠습니다.

 

(12: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

 

(벧후 3:13-14)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고전 15:57-58)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이 한 일이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들 이삭을 결혼시키기 위해 배필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24장의 얘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납니다. 하지만 자녀는 남습니다. 결혼한 자녀도 후손을 남기고 떠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사실 우리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우리가 죽고 난 뒤에 후손들에 의해서 평가될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때보다도 우리 후손들의 때에 점점 더 넓게 확장되고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의 결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앙이 전승되는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전승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전승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삭을 결혼시켜서 며느리는 물론 태어날 손자들에게 그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겪었던 얘기들을 들려주며 하나님의 약속을 그들 마음에 깊이 심어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아내가 될 자는 특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말만 듣고도 믿을 수 있는 자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모험을 과감하게 선택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여인이어야 했습니다.

 

이 여인을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셨습니다. 그것이 창 22:20-24의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친척들의 소식을 들었는데 그 중에 리브가가 출생하여 잘 자라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23). 이 리브가가 결국 아브라함의 자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정말 놀랍습니다.

 

자부를 맞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마음 든든했겠습니까? 그리고 아내를 맞은 이삭은 더할 나위가 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성경은 짧게 한 마디만 하고 있습니다.

 

(24:67)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그리고 또 시간은 흘러 아브라함은 죽었습니다. 죽기 전에 아브라함이 자녀들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갈등을 말끔히 해결했습니다.

 

(25:5-10) [5]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6]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 [7]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8]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9]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10]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아브라함의 175년의 인생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그리하셨듯이 이삭에게도 복을 내리셨다고 말씀합니다.

 

(25:11)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우리가 확인한 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일생 동안 행하신 일은 참으로 섬세하고 놀라웠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바로 그 은혜와 축복을 동일하게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성도의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언젠가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생을 마감하시겠습니까?

 

가득한 기쁨과 평안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면서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죽는다면 그 죽음은 보는 이들에게 최고의 감동을 줄 것입니다. 이것은 죽을 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것보다 더 큰 감동을 줍니다. 왜냐하면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경험은 불과 몇 사람만의 특별한 경험이지만 죽음은 모두가 맞게 될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된 성도의 죽음을 보면서 나도 저 성도처럼 아름답게 죽어야지!”라는 거룩한 도전과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사는 것입니다. 잘 사는 자만이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인생입니까? 죽음과 연관하여 말한다면 죽음을 연습하는 삶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좀 더 성경적으로 말하면 믿음을 따라 살다가 믿음으로 죽는 것이 성도의 인생이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는 인생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그 약속을 후손들에게 이웃들에게 전승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 사람 아브라함의 신앙의 족적을 계속 추적해왔습니다. 다윗이 고백한 대로 아브라함도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여호와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지난 4-5개월간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므로 저와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먼저 아브라함의 여정에 항상 동행하셨던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천국에서 친히 뵈옵는 것, 우리의 마지막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 모두는 서로 얼싸안고 함께 춤추며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날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수고 그치고 안식의 나라로 들어오라고 하실 때 그 음성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께로 찬송하며 달려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찬송가 546

 

 

요약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 사이라도 죽음을 대신할 수 없고 죽음의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랑하는 아내를 대신해서 죽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죽는 데는 순서가 없습니다. 만약 태어난 순서대로 죽는다면 아브라함이 사라보다 먼저 죽어야 합니다. 죽음의 그림자는 언제나 예기치 않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한 번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가족들이 먼저 세상을 떠날 때 죽음이 성큼 내 곁에 가까이와 있음을 경험합니다. 아브라함이 이 같은 경우를 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은 후에 슬퍼하며 애통합니다(23:2). 사라를 사랑했기 때문이겠지만 한편으로는 100년이 넘도록 함께 살면서 묵묵히 따라준 아내가 너무 고마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다닐 때에도, 가나안 땅에 들어와 62년 동안 여기저기 이동하며 살 때에도, 남편이 자기를 두 번씩이나 누이동생이라고 속일 때에도 사라는 남편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성경은 사라가 모든 크리스천 아내들의 전형이라고 말씀합니다(벧전 3:1~6). 그리고 아브라함은 사라가 살아있을 때 좀 더 따뜻하게 대하지 못했던 것 생각하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슬픔을 딛고 일어납니다. 사라를 장사할 매장지를 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23:3~4). 그래서 아브라함은 헷 족속을 찾아갑니다. 헷 족속 앞에서 아브라함은 인생고백을 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입니다.” 인생은 잠깐 동안 이 땅에서 우거하다가 떠나야 하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신앙이 없으면 인생은 정말 허무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죽음을 보면서 자기도 곧 죽게 될 것을 실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허무해하지 않았습니다. 돌아갈 본향, 천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4:1~3, 6; 11:13~16). 천국은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완전한 행복의 시작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도 소망 가운데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할 매장지를 구입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반드시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명의로 삼은 첫 소유지에 아내의 시신을 묻으면서 이삭에게 장차 가나안 모든 땅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자기의 후손들도 그 말씀을 잊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고자 헷 족속에게 큰 돈을 지불하고 막벨라 굴과 그 일대를 구입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 믿음의 증거로 매장지를 구입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수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대부분이 성취되었고 아직 남은 최종적인 약속도 곧 성취될 것입니다. 최종적인 약속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그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금 여기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주의 일에 힘쓰며 살아야 합니다(고전 15:57~58; 12:28; 벧후 3:13~14).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혼시키기 위해 배필을 구합니다(24).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삭을 결혼시켜서 며느리는 물론 태어날 손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깊이 심어주고자 한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로 리브가를 친히 예비하십니다(22:20~24). 리브가를 아내로 맞은 이삭은 기뻐합니다(24:67). 그리고 또 시간은 흘러 아브라함은 자녀들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갈등을 말끔히 해결한 후에 죽음을 맞이합니다(25:5~10). 이렇게 아브라함의 175년 인생이 끝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그리하셨듯이 이삭에게도 복을 내리십니다(25:11).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내리신 복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성도의 행복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가득한 기쁨과 평안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떠나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복된 성도의 죽음을 보면서 거룩한 도전과 감동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는 인생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그 약속을 후손들에게 이웃들에게 전승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아브라함의 여정에 항상 동행하셨던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천국에서 친히 뵈옵는 것이 우리의 마지막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수고를 그치고 안식의 나라로 들어오라고 하실 때, 그 음성을 기다렸다는 듯이 주님께로 찬송하며 달려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목장에서의 나눔

1.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아브라함이 매장지를 구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3.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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