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482167459
    본문말씀
    창세기 20장 1~18절
    성경본문
    창세기 20장 1~18절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20-11-22

 

<아브라함 강해 14>

(20:1-18) 또 실패했지만

2020-11-22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전문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그랄 땅(1절 네게브 땅, 21:34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이주했는데 거기서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임으로써 발생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당시 그랄 땅 주변을 다스리고 있던 맹주는 아비멜렉이었습니다. 이 아베멜렉 왕이 아브라함의 동태를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수많은 가솔들과 가축들을 거느린 대부호였기 때문입니다. 대부호를 향해 왕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쫓아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동맹을 맺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후자 쪽을 택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잘 지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동생이고 남편 없는 홀몸이라고 하니 사라를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데리고 온 것입니다. 결혼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아비멜렉이 자고 있는데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 백성이 모조리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3).

 

아비멜렉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꿈속에서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4-5절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왜 잘못이 없는 나를 혼내십니까? 혼내셔야 할 자는 아브라함 아닙니까? 그런데 왜 내게 이러시는 겁니까?”

 

이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으로부터 큰 선물까지 받게 되었습니다(14-16). 잘못한 것은 아브라함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혼내기는커녕 후한 선물까지 받게 하셨습니다. 대신에 별 잘못한 것이 없는 아비멜렉에게는 정신이 버쩍 들도록 혼을 내셨습니다.

 

이 얘기를 읽는 우리는 먼저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하신 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상한 하나님, 상식에 벗어난 하나님, 이해가 안 되는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는데 저는 바둑 TV를 가끔 봅니다. 지금은 국내 프로기사 가운데 신진서군이 가장 성적이 좋지만 70-80년대에는 이창호군이 최고였습니다. 이창호 기사의 별명이 돌부처입니다. 아무리 형세가 나빠도 얼굴의 변화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바둑판만을 응시하면서 아주 침착하게 한 수 한 수 최선을 다해서 둡니다. 그래서 부쳐진 별명입니다.

 

대국에는 두 명의 해설자가 있습니다. 아나운서와 프로기사가 짝을 이루어 해설합니다. 프로기사는 대체로 연세가 드신 선배입니다. 이창호 기사가 장고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프로기사인 해설자가 여러 경우의 수를 두면서 이창호 기사가 선택할 최선의 수를 예측합니다. 그런데 이창호 기사가 딴 수를 두었을 때, 해설하는 프로기사는 , 실수(착각)한 것 같습니다. 이창호 선수도 실수할 때가 있군요!” 그러다가 , 아니군요. 이런 수가 있군요. 이창호 기사 대단합니다! 정말 이창호답습니다.” 이런 말을 종종 듣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와 비슷합니다. 아브라함 편에서 보면 실패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면 달라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인 우리와 창조주 하나님이 다른 것 당연하지 않습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또 실패했지만이지만 다르게 제목을 붙인다면 하나님, 대단하십니다!”라고 붙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본문이 아브라함의 실패를 두둔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무엇에 실패했습니까? 물론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이 새빨간 거짓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결혼하기 전에는 사촌지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결혼했으면 이제 오빠 동생 사이가 아닙니다. 요즘 청년들이 결혼한 후에도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정상적인 호칭은 아닙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한 것은 거짓말임에 틀림없습니다.

 

왜 거짓말했습니까? 두려워서 그랬습니다(11). 그랄의 사람들이 거칠기로 소문이 났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브라함이 그런 곳으로 내려간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곳도 넓게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입니다.

 

그럼에도 질문이 생깁니다. “왜 그곳이 위험한 곳임을 알면서도 내려갔을까?” 아마도 목초지 때문일 것 같습니다. 한두 달 전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렸습니다.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인근의 토질이 아주 나빠진 것 같습니다. 화산이 터지면 주변의 땅이 황폐하게 되어 다시 회복되려면 상당한 기간이 걸린다고 생태학자들이 말하는데 그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물과 풀이 넉넉한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대부호였습니다. 가솔들이 상당했습니다. 가축들도 많았습니다. 가장으로서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험한 곳인 줄 알면서도 그랄 땅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랄 땅으로 들어가면서 가장 염려 되었던 것은 가솔들의 안전이었습니다. 안전을 위협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을 생각하다가 그 중에서 자기 아내 사라 때문에 큰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당시 사라의 나이는 89세였습니다. 사라가 127세에 임종했는데 89세면 노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175세까지 산 것을 보면 그 당시 평균 수명이 180세 정도였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사라의 나이 89세는 지금의 50세정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그것도 출산 경험이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젊어서는 아주 예뻤는데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면서 연륜까지 베여 품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거칠기로 소문난 그랄 사람들이 자기 아내를 탐내서 무슨 트집을 잡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혹 자기를 살해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은 염려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라를 아내라고 하는 것보다 누이라고 하는 것이 안전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가솔들과 가축과 재산을 지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실수가 아닙니다. 분명히 죄입니다. 이 죄가 무시할 수 없는 죄인 것은 이전에도 그 같은 죄를 범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4년 전의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에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할 수 없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때도 아내를 누이동생으로 속였습니다. 그 일로 인해 애굽 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말끔하게 처리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똑 같은 부분에서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비슷한 죄가 자주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질병입니다. 성적인 유혹에 유독 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돈의 유혹에 잘 넘어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명예나 권력의 유혹에 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말실수나 거짓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그만 화를 벌컥 내고는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각자는 무엇에 취약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점에 넘어지지 않도록 잘 대처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이나 그랄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었을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불신앙이 실패의 근본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불과 한두 달 전이었습니다. 내년 이맘때에 사라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인데 그 이름을 이삭으로 지으라고 친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18장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19장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악한 도시와 나라를 하나님께서 징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랄 사람들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믿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떠나라고 하시면서 약속하셨습니다. 12장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할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랄 땅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했습니다. 내년 이맘때에 사라의 몸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상황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보다는 자신의 한계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의 자리로 떨어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대부분 불신앙 때문입니다. 믿음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우리에게 있어서 근원적인 문제는 모두 믿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실패의 원인은 언제나 믿음의 부족과 불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다른 무엇을 의지했기 때문에 결국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의 믿음을 면밀히 조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과연 살아 생동하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자주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허약한 믿음입니까?

 

믿음에 관하여 말씀드리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고 지극히 세상의 방식으로 반응한 아브라함을 혼내시지 않으시고 대신에 아무 잘못이 없는 아비멜렉을 혼내셨는데 왜 그러셨을까요?

 

여러분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이 싸웠습니다.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형이었습니다. 형이 잘못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대들었습니다. 그때 부모로서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잘잘못을 따져서 형을 혼내고 동생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동생을 혼낼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형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또다시 형에게 대들기만 해라. 가만 안 둘 거야!”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러면 형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 고소하다! 그러면 그렇지!”라고 생각할까요? 아닙니다. 제대로 된 형 같으면 무척 창피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잘못했는데 동생이 야단맞는 것 보면서 반성하게 됩니다. “앞으로 형답게 체통을 지켜야지!”

 

아브라함이 바로 그 같은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이방인에게서 크게 창피를 당했습니다. 9-10절을 보세요. “네가 어찌 그 같이 행했느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게 뭐냐! 그 정도밖에 안되니!” 이거야말로 더 큰 우사입니다. 아브라함이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방인들에게서 톡톡히 창피를 당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적어도 두 가자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는 네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명의 재확인입니다.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도전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입니다. 언약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뜻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를 걸고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복의 근원입니다. 복의 전달자입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는 자입니다.

 

(12: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꿈에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소개했습니다(7,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의 선지자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심판주요 구원자요 만복의 근원이심을 소개하는 자로 아브라함을 세우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입니까? 그랄 땅과 같은 곳입니다.

포학한 사람들이 사는 곳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

권력을 잡은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못살게 구는 세상

위험천만한 세상입니다.

 

우리의 직장현실, 사업 환경, 학교상황 어느 한 곳도 만만한 곳이 없습니다. 가정조차도 문제투성이입니다. 그러니 어딘들 안전하겠습니까? 죄 많은 세상, 불의가 가득한 세상입니다.

 

그러하기에 세상을 등지고 살아야 합니까? 아니지요! 이 세상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으로 이주합니다. 직장 때문에,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내 집 마련하려고 여기저기를 옮겨 다닙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해서 직장생활이나 사업, 별 재미가 없습니다.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직장 동료들, 상사들, 마음에 안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 모든 것 뿌리치고 떠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다른 직장을 구하기도 어렵지만 구한다고 해도 그곳이 정말 만족할만한 곳일까요? 여러분, 이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가 단단히 붙잡아야 할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도의 정체성과 사명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붙잡아야 할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을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십니까? 우리와 맺으신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언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복 주신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십니까? 당신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셔서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심판자시요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성도들의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고 하나님을 대적하면 심판 받는다는 것을 알리는 선지자의 사명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성도의 정체성을 세상에 확실히 드러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세상에 하늘의 복을 나누는 성도의 사명을 힘차게 구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심겨있는 믿음을 발휘하면 됩니다. 즉 무슨 일을 당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대신에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교만이요 불신앙입니다. 거기서 염려가 생기고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면 믿음이 흔들리고 시험에 빠져 범죄 하게 됩니다. 결국 아브라함처럼 이방인들에게 창피를 당하고 맙니다. “네가 그러고도 하나님의 자녀냐!” 이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염려와 두려움이 생길 때, 강화시켜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이 강화됩니까?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배와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하여 이곳저곳을 이동하면서 습관적으로 했던 한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단을 쌓고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머무는 곳마다 예배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랄 땅으로 이주해서는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위험천만한 곳으로 들어갔으면 더더욱 하나님을 찾아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실패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아비멜렉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머무는 곳마다 그 땅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기도해야 할 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7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20:7)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의 손에 너희(아비멜렉과 그랄 사람들)의 생명이 달렸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죽고 사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살려면 아브라함에게 기도를 부탁하라는 것입니다. 17-18절 보세요. 아브라함이 아베멜렉 집안을 위해 기도했더니 아비멜렉 식구들의 태가 열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배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경건에 이르는 연습 없이는 경건의 능력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모든 실패가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착실하게 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착실한 예배생활, 착실한 기도생활, 이 두 가지는 믿음의 강화를 위해 주력해야 할 최우선순위입니다.

 

착실한 예배생활이란 주일의 공동예배를 잘 드리는 것은 물론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위험천만한 곳이면 곳일수록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해야 합니다. 왜 그리해야 합니까? 그곳에 하나님께서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계신 하나님께 예배할 때 지혜가 생기고 담력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기에 정직하고 진실할 수가 있습니다. 특히 예배할 때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거기서 일반 사람들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착실한 기도생활이란 하나님의 도움을 구체적으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크고 궁극적인 기도제목은 이웃들이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 가족들이, 내 친구들이, 내 직장 동료들이, 내 사업에 관계된 분들이, 내가 살고 있는 동네와 이 나라가 내 기도 때문에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훌륭한 도구입니다. 기도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성취하십니다.

 

여러분의 예배생활과 기도생활을 점검해보세요! 예배생활과 기도생활의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각자 구체적인 실천을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1분 정도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눈을 감고 실천사항 두세 가지를 정리해보세요.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아비멜렉과 그랄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까지도 두려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나님이 지키시는 사람, 하나님의 선지자구나! 그를 선대하면 복을 받고 그를 해하면 벌을 받게 되는구나!”

 

그래서 아브라함 가족들이 그랄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오랫동안 안전하게 살았다고 기록합니다(21:34). 이삭이 태어난 후 소년이 될 때까지 십수년간 거기서 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까? 우리는 자주 실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조차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가 신뢰해야 합니다.

 

(55:8-11)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10]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하지만 오늘 본문을 곡해해서는 안 됩니다. “실패해도 괜찮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정말 모르는 사람입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에게 창피를 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받아 세상에 나누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편 가운데 대표적인 두 가지는 예배와 기도입니다. 예배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셔서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금주 한 주간도 우리를 승리하게 하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찬송가 456

 

 

요약

아브라함이 그랄 땅으로 이주합니다. 그리고는 그 지역 맹주인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아비멜렉은 사라를 아내로 삼으려고 데려갑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라고 알려주십니다. 그러면서 그녀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 백성이 모조리 죽게 될 것이라고 엄포하십니다. 이 사건은 결국 별 잘못한 것이 없는 아비멜렉만 하나님께 혼이 난 반면,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는 것으로 종결됩니다(14~16).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아브라함은 분명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가 실패한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11). 그는 아비멜렉이 자기 아내를 탐내서 자신을 살해할 거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합니다. 이건 실수가 아니라 죄입니다. 심지어 그는 24년 전에도 같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미리 대처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그랄 사람들을 두려워한 근본적인 이유는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불과 한두 달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8:10). 그리고 아브라함을 대적하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능히 심판하실 수 있다는 것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통해서 이미 보여주셨습니다(19).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보다 자신의 한계에 초점을 맞춰서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이유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을 조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실패한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비멜렉을 혼내셨을까요? 아비멜렉을 혼내심으로 아브라함에게 더 큰 깨달음을 주시려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지 못해서 벌어진 죄 때문에 엄한 사람이 혼납니다. 더구나 이방인 앞에서도 창피를 당합니다(10~11).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복을 전달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사명까지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12:1~3).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불의가 판치는 악한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발을 딛는 어느 곳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가정조차도 문제투성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옮겨 다니지만 만족할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럴 때 실패하지 않으려면, 성도의 정체성사명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들에게 복을 주셔서,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세상의 심판자시요 구원자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고 하나님을 대적하면 심판 받는다는 것을 알리는 선지자의 사명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염려가 생기고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면 믿음이 연약해지고, 시험에 들고, 죄를 짓게 됩니다. 결국 아브라함처럼 이방인들에게 창피를 당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강화시켜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믿음이 강화될까요? 대표적으로 예배와 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하여 이곳저곳을 이동하면서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랄 땅에서는 그러지 않습니다. 거기서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자기가 머무는 곳마다 그 땅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기도해야 할 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20:7). 아브라함은 아베멜렉을 위하여 기도했고, 그랬더니 아비멜렉 식구들의 태가 열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배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느꼈을 것입니다. 예배생활과 기도생활은 성도가 승리하기 위해서 반드시 고수해야 할 최우선순위입니다. 예배생활이란 주일의 공동예배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할 때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거기서 일반 사람들과 차이가 납니다. 기도생활이란 하나님의 도움을 구체적으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웃들이 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성취하십니다.

 

우리는 자주 실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실패조차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에게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고야마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55:8~11).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당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 예배와 기도로 난국을 돌파해내는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런 성도를 세상 앞에 자랑스럽게 세우십니다. 이 약속을 믿음으로 우리를 승리하게 하실 주님 바라보며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4:14~16).

 

 

목장에서의 나눔

1. 아브라함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붙잡아야 할 두 가지는 무엇인가요?

3. 실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예배하고 기도해야 하나요?

 

  

(35200) 대전시 서구 만년남로 3번길 107(만년동) 한밭교회 | 대표전화 042-488-8701~6 | FAX 070-7836-6520

© k2s0o1d4e0s2i1g5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