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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435400518
    본문말씀
    로마서 8장 28~32절
    성경본문
    로마서 8장 28~32절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20-07-05

(8:28-32)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

2020-07-05 맥추감사절 설교 / 곽창대 목사

 

 

전문

여러분에게 기막히게 좋은 소식이 있으면 그 소식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마음이 아주 설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깨달은 너무나도 좋은 소식을 혼자만 간직할 수 없어서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면서 그의 마음은 벌써 로마교회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기쁜 소식을 더 생생하게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전할 수 있을까 안달이 났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전하고 있는 소식이 바로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최고의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31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 하리요?”라고 반문합니다. 두 말할 필요가 없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이 일이란 사도가 지금까지 논증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 구원의 요약이 28-30절입니다. 28-30절을 내용 상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8절과 29-30절입니다. 28절은 구원받은 성도의 흔들릴 수 없는 지식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29-30절은 그러한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든든한 근거를 설명합니다.

 

 

먼저 28절을 보세요. “우리가 알거니와는 성도에게는 흔들릴 수 없는 확실한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공유된 지식: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지식 (“우리”)

경험으로 확인된 지식 (“안다는 뜻)

하나님의 계시로 인한 지식 (지식을 얻게 된 방편): 기록된 성경의 증거와 성령을 통하여 깨닫게 된 지식

그러므로 이 지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신 신령한 지식입니다.

 

 

그 지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지식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결국 선으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 우선 종말론적인 영광을 지칭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영광스러운 기업 즉 궁극적인 복지를 일컫습니다.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 천국의 실현, 온 우주의 통일 등입니다. 공동체적으로는 하나님과 함께 교회가 왕 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몸의 영광스러운 부활과 천국에서의 영생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의 개념이 종말론적인 영광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영광을 향해 나아가는 신자의 모든 노정 가운데 베푸시는 하나님의 각양 좋은 은혜와 복을 다 포함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안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결국 선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닥쳤을 때라도,

* 불행처럼 보이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라도,

* 일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것 같은 시련과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 생각하기도 싫은 실패와 실수, 부끄럽기 짝이 없는 죄악을 범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결국 우리에게 선이 되는 방향으로 역사하십니다.

 

 

물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악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실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범하는 죄가 결코 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은 책망하십니다. 징계하십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를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회복의 전 과정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구약성경의 좋은 예로서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았습니다. 그 이후로 요셉은 상당한 기간 동안 고난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마다 일마다 그를 형통하게 했습니다.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요셉을 높이신 것은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중동 전역에 극심한 기근이 들었지만 애굽은 걱정이 없었습니다. 요셉이 7년 풍년의 때에 곡식을 무진장으로 비축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왔습니다. 그때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자기의 가족들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미리 애굽으로 보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45:5-8)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노래했습니다. 그 섭리의 핵심은 하나님의 큰 구원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큰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의 선한 뜻으로 말미암아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 신약성경에서도 얼마든지 그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매도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감옥에서 밤중에 노래했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한참 찬송하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감옥이 흔들리고 감옥 문들이 다 열렸습니다. 우리 같으면 하나님의 기적에 감사하고 탈옥했을 것 같은데 사도들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달아나지 않은 이유는 자신들이 죄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감옥을 탈출했다면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도망한 죄수들로서 다시는 빌립보를 방문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옥문이 열렸어도 도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이면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왜 빌립보 성에 들어오게 하셨는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매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된 것에 무슨 뜻이 있는지, 더구나 옥문이 열린 기적의 의미가 무엇인지 사도들은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났습니다. 그 일로 인해 간수의 온 식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무죄가 인정되어 방면되었을 뿐 아니라 빌립보교회가 그 도시에서 든든히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구약 성경의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선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의 경험으로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우리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옵니다. “아하! 하나님,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세계는 지금 코로나19 비상사태로 인하여 큰 곤경에 빠져있습니다. 이 비상사태에서도 성도와 교회는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해야 합니다. 아니 성도와 교회는 이미 큰 교훈들을 깨닫고 있습니다.

 

 

*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한계적인 존재인지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 우리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얼마나 무절제하게 살았는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참회하고 있습니다.

* 직장에서 퇴근한 후에 곧장 귀가하여 이전보다 훨씬 가정생활에 충실해졌습니다.

* 주말에는 가족들과 함께 산책하며 자연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 비행기는 물론 자동차 운행도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대기의 질이 꽤 좋아졌습니다. 동식물을 비롯하여 대자연이 활기를 되찾고 있습니다.

* 말을 적게 함으로써 허튼 소리나 말실수가 줄어들었습니다.

* 하나님을 향한 예배생활도 개선되고 있습니다. 교회당에서만 아니라 집에서도 예배합니다. 주일만 아니라 평일에도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 전염병의 빈번한 발생이 종말의 징조 가운데 하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며, 예수님 재림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성도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비상사태로 인해 염려와 두려움이 생기고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깨닫고 얻은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질병과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도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헤아려 감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가운데 악하고 난폭하고 부조리한 것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데 결코 방해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셔서 결국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가로막을 세력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뢰해야 할 신령한 지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할 수밖에 없는 든든한 근거가 있다고 29-30절에서 말씀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논증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구원의 정교함과 끈질김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그 구원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결국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정교하고 끈질긴지, 29-30절에서 사도 바울이 밝힌 구원의 서정(순서)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다섯 단계로 하나님의 구원이 진행됩니다. 미리 아심(예지), 미리 정하심(예정), 부르심(소명), 의롭다 하심(칭의), 영화롭게 하심(영화).

 

 

1) 하나님의 예지

 

 

구원은 전지하신 하나님이 주도하십니다. 그래서 29절에 하나님의 미리 아신 자들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미리 아셨다고 합니다. 심판하시려고 아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고 아셨습니다. 사람이 날 알아줘도 기분 좋은 일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아셨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것도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나에게 복 주시려고 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부터 나를 아셨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태에서 나를 지으시기 전에 아셨다고 합니다. 창세전에 나를 아셨다고 합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나를 아셨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예지는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자기를 믿을 사람이 누군지 미리 내다보시고 그렇게 믿을 사람만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구원이 사람의 공로로 인한 것이 되고 맙니다. 성경은 구원의 공로가 사람에게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다는 말은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을 아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안다라는 단어는 사랑한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선수적인 사랑이 구원의 동인이며 시작입니다.

 

 

2)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로 작정한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습니다. 역시 구원의 예정도 영원 전에 있었습니다. 영원 전에 구원의 예정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독자적인 결정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 외에 그 어느 뜻도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예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구원의 목적이 분명하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29절 중간을 보세요.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하여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습니다. 그 아들이란 예수님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닮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품으신 고상한 뜻입니다. 우리를 최고의 명품으로 만드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 많아지는 것을 보시고 싶으셨습니다(29절 하반절, “많은 형제”). 여러분, 어떤 세상이 아름다운 세상입니까? 예수님 닮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우리교회에 예수님 닮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 소원을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품으셨습니다. 그 소원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께서 열심히 부르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소명)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자들을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은 구원에로의 초청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때 우리는 거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부르심을 신학적인 용어로 유효한 부르심”, “효과적인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부르실 때 우리는 반드시 긍정적으로 응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하게 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때의 믿음은 회심이 동반됩니다. 회심이란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일컫는 것으로서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내면의 변화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이미 중생한 것을 아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칭의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한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십니다. “이신칭의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와 죽음에 종노릇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자들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영화

 

 

마침내 다다르게 되는 구원의 완성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거의 예수님처럼 됩니다. 천국에서 영생을 누립니다. 공동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됩니다. 만유가 새롭게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여 즐겁게 일하고 노래하는 새 시대가 마침내 열릴 것입니다. 그 마지막 구원의 완성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구원의 다섯 단계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셨고 마침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성도들로 하여금 바울 사도는 그 하나님의 넓은 품, 사랑의 품에 안기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확실하고 견고하게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구원의 서정(순서) 가운데 중요한 한 단계가 빠져 있습니다. 칭의와 영화 사이에 성화가 빠졌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바울이 의도적으로 성화의 단계를 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 로마서 8장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성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복을 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 믿자마자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지 않으시고 문제 많은 이 세상에 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장소가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단련하여 거룩하게 하시려고 험난한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훈련의 과정이 바로 성화의 과정입니다. 훈련의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섭리하십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미 우리가 28절 말씀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결국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반문합니다. 31절 하반절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장이시므로 우리는 이기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거세게 도전해도, 사탄이 아무리 간계를 꾸며도 우리는 질 수 없습니다. 이유는 우리의 대장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외쳤습니다.

 

 

(3:5-6)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시므로 전쟁 중에서도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23편에서도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식탁, 잔치자리)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 속에 있는 성도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성도가 부르는 노래는 승리한 다음에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싸움이 치열할 때 승리를 미리 내다보고 부르는 노래가 성도가 불러야 할 노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전쟁 중에서, 극심한 시련 가운데서 노래할 수 있습니까?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너무나도 정교하고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의 착한 일을 하나님께서 끝내 완성하시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의 견고함을 믿지 못한다면 한 가지 남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하나님의 대책입니다. 32절 말씀입니다. 바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하나님 아버지)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반문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견고한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셨습니다. 32절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도록 내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집행하신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십자가 외에 우리를 구원할 다른 길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가장 큰 섭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합작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합세하여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랬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큰 구원을 여셨습니다. 베드로의 첫 설교의 주제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십자가 사건이 왜 일어났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동인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자기 아들 예수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지고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하나님 자신의 맹세요 보증입니다(32절 하반절).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사도 바울은 이 엄청난 사실에 감격하지 못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안타까움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주었는데 나머지 것 안 주겠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구하라! 구하기만 하면 좋은 것 주겠다! 성령까지 아낌없이 부어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매 순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붙잡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책임지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끈질김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깨닫는 자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감이 생깁니다. “! 하나님께서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이 언제나 내 편에 서서 나를 돕고 계시는구나! 누가 뭐래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구나!” 그래서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신령한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오늘 맥추감사절에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할 모든 감사의 근거는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복을 풍성히 베푸시려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확증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성도와 교회는 크게 감격하고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 그래서 하늘의 은혜와 평강을 풍성히 누리고 나누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 찬송 304, 295

 

 

 

 

요약

성도에게는 흔들릴 수 없는 확실한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결국 선으로 귀결되도록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은 성도가 마지막 날에 얻을 영광과 그 영광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노정 가운데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포함합니다.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닥쳤을 때라도 하나님께서는 결국 우리에게 선이 되도록 역사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범하는 죄로는 결코 선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를 회개하게 하심으로 결국 선을 이루십니다.

요셉은 애굽에 팔려가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자기의 가족들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미리 애굽으로 보내신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섭리를 노래했습니다(45:5~8). 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는 옥문이 열렸음에도 도망하지 않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그 이면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인해 간수와 그의 온 식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빌립보교회가 그 도시에서 든든히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1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섭리하십니다. 그렇기에 코로나19로 인한 비상사태에서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헤아려 감사할 수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구원의 정교함과 끈질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구원을 결국 완성하십니다(1:6).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다음과 같이 다섯 단계로 진행됩니다(29~30).

1) 미리 아심: 성경에서 안다라는 단어는 사랑한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아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 예정: 사랑하시기로 작정한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하나님께서 예정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라십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교회를 통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을 열심히 부르십니다.

3) 부르심: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예정된 자는 이 부르심에 반드시 긍정적으로 응답하게 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때 회심이 동반됩니다.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내면의 변화입니다.

4) 칭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한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더 이상 죄와 죽음에 종노릇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 됩니다.

5) 영화: 마침내 다다르게 되는 구원의 완성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공동체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됩니다. 그 마지막 구원의 완성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이 험난한 세상에 살게 하실까요? 이 세상에서 우리를 단련하여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훈련의 과정은 칭의와 영화 사이에 위치하는데, 바로 성화입니다. 성화의 과정이 쉽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섭리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결국 승리합니다(31).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시므로 전쟁 중에서도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고 노래했습니다(3:5~6; 23:5).

그럼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의 견고함을 믿지 못한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3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도록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 외에 우리를 구원할 다른 길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큰 구원을 여셨습니다(2:36).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32). 그러므로 성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섭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래야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신령한 용기를 얻습니다.

 

 

맥추감사절에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할 모든 감사의 근거는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하늘의 복을 풍성히 베푸시려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확증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성도는 크게 감격하고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십시오! 그래서 하늘의 은혜와 평강을 풍성히 누리고 나누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목장에서의 나눔

1. 하나님의 섭리란 무엇인가요?

2. 하나님의 구원은 어떤 단계로 진행되나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나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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