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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404168699
    성경본문
    갈라디아서 6장 14절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20-04-05

(6:14) 성도의 자랑, 십자가

2020-04-05 종려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전문

여러분에게 자랑할 것 한 가지만 얘기하라고 하면 무엇을 자랑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이 각박하고 힘든 세상에서 버티며 살아가는 것은 자기에게 뭔가 내놓을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심리학적인 용어로 자존감이라고 합니다.

 

요즘 유명한 이들이 자살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보는데 자살의 근본 이유가 우울증인 것 같다고 보도되면서 세간에 우울증에 관해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코로나19 비상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코로나 블루라는 집단 우울증 중세가 나타날 우려가 있다고도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우울증이 자존감의 상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자존감 없이 버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불행한 일이 몰아쳐도 그래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자존감의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버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존감의 뿌리가 크게 손상되면 우울증에 걸리고 그 결과로 자살까지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존감이란 말 그대로 자기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존귀한 존재라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가 다름 아닌 자랑거리입니다. 자랑거리가 있기 때문에 자기는 그래도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요즘 여러분의 주요관심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과 통화하거나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무슨 얘기를 나누었습니까? 그 관심과 대화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실체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자랑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자랑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허탄한 자랑과 참된 자랑입니다.

 

(4:14-16)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여기 허탄한 자랑이란 기초가 허약한 자랑을 뜻합니다.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린 것은 허약한 기초와 부실공사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허탄한 자랑도 무너집니다. 무너지기 전이라도 이런 자랑을 하고나면 허탈해집니다.

 

허탄한 자랑을 성경은 육체를 자랑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 몸짱, 얼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자신도 육체를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3:4-6)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신학박사였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남부러울 것 없었습니다. 학문과 지식, 가문과 경력 등 자랑거리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이 허탄한 자랑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에게 자랑거리가 있다면 한 가지만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6:14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십자가가 자랑의 토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하면 모든 자랑이 한갓 안개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무관한 자랑은 허탄한 자랑입니다. 십자가 없는 자랑은 공허한 자랑이며 무너질 자랑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자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자기를 은근히 자랑합니다. 드러내지는 않을지라도 속으로는 자기 자랑의 뿌리가 있습니다. 남편을 자랑하고 아내를 자랑하고 자식을 자랑합니다. 집안이나 가문을 자랑합니다. 외모나 건강도 자랑합니다. 학벌이나 지식도 자랑합니다. 직업이나 직위나 권세도 자랑합니다. 과거의 경험도 자랑합니다. 영적인 경험이나 은사도 자랑합니다. 신앙의 연륜이나 교회직분도 자랑합니다.

 

그런데 그 자랑이 허탄한 자랑일 수 있고 참된 자랑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자랑의 기초가 무엇인가 하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 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허탄한 자랑과 참 자랑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말씀합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바울은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멸망하는 자와 구원을 받는 자로 나눕니다. 그런데 멸망과 구원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십자가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십자가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자들은 현재적인 상태로 봐서 멸망할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반대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근본적이고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실제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답하는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밝힙니다. 십자가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결정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한 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의 도입니다.

 

(고전 1:17-18)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23-24)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요즘 십자가를 혐오하는 자들은 별로 없습니다. 십자가는 평화와 사랑의 상징이 되었고 심지어 대중적인 인기 상표로 변모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자들도 십자가 문양의 액세서리를 하고 다닙니다. 깡패들도 십자가 문신을 몸에 새깁니다. 십자가가 멋있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사역했던 초대교회 시절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이후 한 동안 십자가는 가장 소름 끼치고 혐오스런 물건이었습니다. 십자가가 가장 잔혹하고 야만스런 사형도구였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세계를 제패했던 시절에 십자가 사형제도는 최고의 수치와 고문과 굴욕이 결합된 가장 극악한 사형제도였을 뿐 아니라 로마의 권력에 반대하는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가장 효과적인 범죄억제수단이었습니다. 범죄자들을 벌거벗기고 때려서 반쯤 죽인 후에 십자가 가로대를 지고 거리를 행진하게 합니다. 처형장에 이르면 손과 발에 못을 박고는 이미 세워있는 세로대에 매답니다. 거기에 매달려서 오랜 시간 고통하며 서서히 죽어갑니다. 군중들은 이 광경을 차마 보지 못하여 눈을 돌렸다고 합니다. 바로 그것이 십자가였습니다. 완악한 중죄인만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1세기 당시 로마인들에게 십자가는 자랑거리일 수 없었습니다. 최고의 수치거리였습니다. 18절에서 말한 대로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바로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요 구세주라고 선포했습니다. 십자가의 사형 제도를 익히 알고 있던 로마인들이 어떻게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의 도를 전파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인들에게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고 무시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더더욱 십자가를 혐오했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성경의 한 구절 때문입니다.

 

(21:23) ...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나무(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겠는가? 메시아라면 적어도 다윗처럼 열방을 제압하는 강력한 왕이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이스라엘의 옛 영광을 회복할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했습니다. 그런 메시아가 오시면 놀라운 이적(표적)을 베풀 것이며 그 이적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 온 열방 중에 최고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라고 했으니 유대인들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예수는 고작 3년간 몇 가지 이적을 통해 군중들의 인기를 끌다가 사라진 이단 종파의 지도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게 죽지 않았느냐?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달라진 게 있느냐? 우리나라는 로마의 압제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지 않느냐? 기독교는 고작 예수를 추종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모여서 자기들끼리 위로를 나누는 무력한 종교집단이 아니냐? 나무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를 메시아로 착각하는 자들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이처럼 유대인들은 자기 동족들 중에 저렇게도 어리석은 자들이 있는 것을 보고는 창피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앞장서서 그리스도인들을 멸시하고 핍박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메시아를 상상하는 것만 해도 하나님께 불경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헬라인들은 자기들의 지혜를 자화자찬했습니다. 그들은 신들에 관해 논하면서 자기들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만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신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견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가 신이라면 십자가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무식한 자들이나 믿는 종교로 생각했습니다.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인들,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라고 자랑했던 헬라인들,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고집했던 유대인들, 다시 말해서 그 당시 대다수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은 정말 우스꽝스럽고 미련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메시아라는 어구만큼 불합리한 조합은 없습니다. 마치 빈약한 몸짱” “천치바보 박사” “권투시합에서 1회전에 KO패 한 승자" "마라톤에서 중도 기권한 완주자"라는 말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말이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메시아(구세주)”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같은 불합리하고 미련한 어구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생을 송두리째 던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만이 참된 메시아(그리스도)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고 따랐을 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바울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왜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일까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는지,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에는 신 개념이 있습니다. 어느 종교든지 신을 설정할 때 두 가지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거룩과 사랑입니다. 모든 종교는 자기들이 믿는 신이 이런 성품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 외에 어떤 종교도 이 두 가지 성품을 조화 있게 설명하거나 증거 하지 못합니다.

 

우리 기독교가 믿고 경외하는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성품, 거룩과 사랑을 행동으로 확증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지 못한 죄인들을 심판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용서하셔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죄인들을 향해 반드시 내려져야 할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가 동시에 내린 곳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로마서의 두 부분이 그것을 잘 설명합니다.

 

(3:23-26)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5:8-10)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십자가에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와 능력이 계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 십자가에서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속죄의 근거가 되는 희생제물과 피에 관해 자기 백성들인 유대인들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셨지만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할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고난의 종으로,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흠 없는 어린양으로 오실 메시아를 예고하셨지만 유대인들은 그런 메시아를 고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메시아는 사람이 고안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독창적인 계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사람이 만들어낸 조작된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집행하신 유일무이한 구원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0-31을 보세요.

 

(고전 1:30-31)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 외에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신약성경은 곳곳에서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대표적인 구절을 든다면 로마서 8장입니다. 바울 사도가 소리 높여 찬송합니다.

 

(8:31-39)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최고 계시요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요한 사도의 말대로 우리 죄를 지고 죽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다시 설교 주제로 돌아옵니다.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자랑한다는 원어의 뜻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가 힘들다고 말하면서 그 단어 안에는 적어도 영광으로 여긴다, 신뢰한다, 기뻐한다, 한껏 즐긴다, 집중한다, 높인다, 그것을 위해 산다.” 등의 뜻이 농축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올바른 해석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는 것을 뜻합니다. 자나 깨나 우리의 생각을 온통 십자가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신과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의 시간과 정력을 바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좀 더 부연해서 설명한다면,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이 빼앗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십자가를 통해 확증하셨기에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수님의 사랑에 푹 잠기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그렇게 크고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이기에 예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고 예수님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입니다.

 

반대로 저와 여러분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한다 해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최절정인 십자가와 무관하다면 그것은 헛것입니다. 허탄한 자랑을 위해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공부와 지식에 십자가가 드러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활동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충만한 사람,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충만한 성도가 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우리가 믿어야 할 기독교 복음의 핵심일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내어야 할 삶의 기초요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증거 하는 삶을 살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오늘부터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주간을 어떻게 지내시려고 계획하십니까?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해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한 주간 되어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4주간의 릴레이금식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특별 금식기도의 기간을 갖는 이유는 십자가에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게 위해서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한 주간과 남은 생애를 십자가를 자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 찬송가 150

 

 

요약

사람은 자존감 없이 버틸 수 없습니다. 자존감이란 자기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마음입니다. 자존감을 상실하지 않으려면 자랑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자랑하십니까? 어쩌면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들, 우리 대화의 중심에 깊이 뿌리고 내리고 있는 것들이 우리의 자랑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자랑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허탄한 자랑과 참된 자랑입니다(4:14~16). 성경은 허탄한 자랑육체를 자랑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바울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3:4~6).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허탄한 자랑임을 알았기 때문에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14).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도 바울과 같이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결정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고전 1:18). 그래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한 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의 도였습니다(고전 1:17~18, 23~24).

그런데 1세기 당시 십자가는 가장 소름 끼치고 혐오스런 물건이었습니다. 가장 잔혹하고 야만스런 사형도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인들에게 십자가는 최고의 수치거리였고 매우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요 구세주라고 선포했습니다. 때문에 로마인들은 그들을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고 무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더더욱 십자가를 혐오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21:23). 그들은 로마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이스라엘의 옛 영광을 회복할 메시아의 오심을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했으니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창피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앞장서서 그리스도인들을 멸시하고 핍박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헬라인들도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신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만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 당시 대다수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은 정말 우스꽝스럽고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만이 참된 메시아라는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생을 송두리째 던졌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을 믿고 따랐을 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지혜와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왜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일까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으로서 꼭 가져야만 하는 거룩과 사랑의 성품을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지 못한 죄인들을 심판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용서하셔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진 곳이 십자가입니다(3:23~26; 5:8~10).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 십자가에서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진다는 것입니다(8:31~39; 고전 1:30~31).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우리의 생각과 시선이 고정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자랑한다면 십자가를 통해 자신과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의 시간과 정력을 바쳐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신 예수님께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에 푹 잠겨야 합니다. 큰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나아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고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충만한 사람,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충만한 성도가 됩니다.

 

고난주간을 지낼 때마다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하기 위해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십자가 아래 모여서 십자가를 경축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교회는 4주 동안 릴레이금식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특별 금식기도의 기간을 갖는 이유는 십자가에 우리의 마음을 집중하게 위해서입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한 주간과 남은 생애를 십자가를 자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목장에서의 나눔

1. 바울은 왜 육체를 자랑하지 않았나요?

2. 1세기 당시 사람들은 왜 그리스도인들을 무시했나요?

3. 우리는 복음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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