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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397706497
    본문말씀
    마태복음 14장 22~33절
    설교자
    곽창대 목사

(14:22-33) 예수님을 찾으시는 믿음(2)

2020-03-15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요약

요즈음 여러분에게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평안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과는 달리 때로는 고통스러운 시간, 지겨운 시간을 만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희망에 부풀어있던 제자들을 풍랑이 거세게 일어날 바다로 보내셨습니다(22). 왜 예수님께서는 휴식이 필요했던 제자들을 풍랑을 맞아야 할 고통의 바다로 내모셨을까요?

첫째, 제자들이 사역해야 할 세상이 어떤 곳인지 미리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곳이 바다입니다. 이와 같이 바람에 요동치는 바다와 같은 곳이 제자들이 경험해야 할 세상입니다. 이곳이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일하게 하시는 사명의 땅입니다. 이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우리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둘째,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실상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자들은 낮에 오병이어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보며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에 큰 긍지를 느꼈을 것입니다(14:13~21). 그러나 여기 바다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실감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어 닥치는 큰 풍랑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무력한 존재인지 절감하게 하여 결국 주님께 두 손 들고 항복하게 합니다. 때문에 폭풍이 아니고는 나 자신의 실상을 깨달을 수 없다면 그 폭풍이 바로 축복입니다.

셋째,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새로운 각도로 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괴로움을 알고 계십니다(6:47~48). 그리고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십니다(23, 8:34).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아무리 우리를 흔들어대는 거센 풍랑이 일어도 결국 우리는 그 풍랑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도움의 때는 예수님께서 정하십니다(25). 찾아오시는 바로 그 시각이 가장 적합한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전에 알던 예수님이 아니라 새롭고 놀라운 예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의 구원자로 우리의 마음과 몸에 각인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33). 욥도 기나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게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하시려고 그러셨습니다(42: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위기의 때, 절망의 때라고 생각할 때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믿음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십니다.

 

여러분, 풍랑을 만났을 때 성급하게 판단하여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잣대로 판단한다면 제자들의 잇따른 순교는 교회의 침체와 몰락을 가져왔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순교할 때마다 교회는 더 크게 부흥했습니다. 그때마다 성도들은 주님을 더더욱 의뢰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끝장났다고 생각할 그때 하나님의 일은 새롭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는 자가 고통 받는 이유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그 뜻의 실현을 위해 밟으시는 수순은 정말 오묘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아름답게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8:28~30).

지금 우리는 풍랑이 거세게 몰아치는 바다를 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아름다운 포구에 도달할 것입니다. 모든 상황을 주님께서 통제하시기 때문입니다. 풍랑 때문에 우리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예수님을 새로운 각도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물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의 손을 예수님께서 붙잡으신 것처럼 우리의 손을 강하게 붙잡으시는 예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폭풍 후에 누리는 잔잔함으로 인해 우리는 주님께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풍랑을 만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베드로처럼 단순하게 부르짖어야 합니다(30).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나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소서! 나의 믿음을 발휘하게 하소서! 나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소서!” 고난의 때에 우리가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주님은 폭풍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굳게 세우십니다. 고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주님의 향한 우리의 믿음도 강화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마지막 날 맞게 될 죽음의 폭풍조차도 우리를 영원한 안식의 나라, 천국으로 더 빨리 가게 하는 축복의 풍랑이라고 믿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 비상사태를 맞아 주일의 공예배와 교회의 각종 모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우리는 속히 바이러스의 확산이 멈추어지고 그 세력이 소멸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주일의 공예배와 교회의 각종 모임이 재개되고 더 활발하게 모이기를 갈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전염병이 돌 때를 대비하여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습니다(대하 6:28~30).

성도 여러분,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됩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지는 못하지만 각자의 처소에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4주간 릴레이금식기도를 합니다. 적극적으로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전문

설교 제목은 지난 주일과 같습니다. 본문의 상황도 지난주일 본문과 비슷합니다. 마가복음(6:45-52)과 요한복음(6:15-21)에도 같은 사건을 간략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질 무렵에 제자들이 배를 탔습니다. 목적지는 벳새다(마가복음 6, 가버나움: 요한복음 6)였습니다. 거기까지는 보통 한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도 밤 4경이 되도록 그들은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가운데서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4경은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적어도 6시간 이상 풍랑에 시달렸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큰 풍랑을 만난 배 안에서 6시간을 즐기며 앉아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놀이동산에서 바이킹 호를 타보셨습니까? 멋도 모르고 탔다가 너무 무서워서 엄마 아빠부르며 고함치다가 거의 실신할 지경에 이르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대부분은 바이킹 호를 즐깁니다. 움직임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단 몇 분만 참으면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탔던 배는 달랐습니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광풍과 거친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려 떠다녔습니다. 그것도 깜깜한 한밤중이었습니다. 구조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6시간 동안 배 난간을 부여잡고 고함치고 있는 제자들을 상상해보세요. 배 멀미를 해보신 분들은 제자들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같은 시간이라도 그 느낌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어떤 분에게는 이 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처럼 느끼는 반면에 어떤 분에게는 이 한 시간이 아주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자들도 그날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날 오전의 6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부대로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나갔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손을 얹은즉 병자들이 나았습니다. 귀신도 쫓겨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환영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정말 신나는 시간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오후의 6시간도 꽤 신이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실 때 옆에서 수종하는 일도 보람 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하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에 큰 긍지를 느꼈을 것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소리치며 임금 삼으려 했을 때는 이제 본격적으로 한 자리 차지할 때가 왔구나 하고 기대감이 가득 차올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후의 6시간은 끔찍한 시간이었습니다. 한밤중 갈릴리 바다에서의 사투는 그들의 장미 빛 꿈을 여지없이 박살내버렸습니다. 오전의 6시간과 낮 6시간은 그토록 신나고 빨리 지나갔는데 밤중에 당한 이 6시간은 정말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두려움과 절망으로 허덕인 지긋지긋한 시간이었습니다.

 

요즈음 여러분에게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고 있습니까? 신나게 흐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지긋지긋합니까? 물론 우리 모두는 신나게 흐르는 시간을 원합니다. 평안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과는 달리 때로는 고통스러운 시간, 지겨운 시간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세요. 희망에 부풀어있던 제자들을 바다로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22). 그것도 재촉해서 보내셨습니다. 잔잔한 바다, 휴식의 바다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고통의 바다, 곧 풍랑이 거세게 일어날 바다로 보내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휴식이 필요했던 제자들에게 안식처를 주시지 않으시고 온 몸으로 풍랑을 맞아야 할 고통의 바다로 내모셨을까요? 세 가지 이유를 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1. 예수님께서 풍랑이 이는 바다로 제자들을 보내신 이유는 제자들이 사역해야 할 세상이 어떤 곳인지 미리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은 세상을 자주 바다로 묘사합니다. 바다에는 바람막이가 없습니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곳이 바다입니다. 잔잔하던 곳이 순식간에 큰 풍랑으로 돌변합니다. 이와 같이 불안정한 바다, 바람에 이리저리 요동치는 바다와 같은 곳이 세상입니다. 제자들이 이제 경험해야 할 세상은 신나는 세상이 아니라 풍랑이 이는 바다처럼 요동치는 세상이요 그래서 고통이 수반되는 곳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일하게 하시는 사명의 땅은 시련과 고난의 풍랑이 자주 일어나는 곳입니다. 이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실망하지 않습니다.

 

2. 예수님께서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로 제자들을 보내신 이유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실상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자들은 낮 동안 경험한 일들을 통해 자신들이 대단한 존재가 된 것처럼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바다에서 자기들의 실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풍랑 앞에서 그들의 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실감했을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컸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에 대해 크게 실망도 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실까?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 풍랑이 거칠게 몰아치는 바다로 가게 하셨을까? 더구나 예수님은 우리들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모르시는 것이 분명해! 예수님도 우리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시는 연약한 한 인간에 불과해!”

 

제자들은 더 이상 개선장군들이 아니었습니다. 초라한 실패자요 패잔병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 어부생활을 했던 경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날 오전에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던 그 신기한 능력도 이 풍랑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당장 죽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에서의 높은 자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불어 닥치는 큰 풍랑은 우리의 껍데기를 벗겨냅니다. 우리 속에 웅크리고 있던 자만심과 헛된 야망을 들춰내어 바다로 던져버리게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절감하고는 결국 주님께 두 손 들고 항복하게 합니다. 폭풍이 아니고는 나 자신의 실상을 깨달을 수 없다면 그 폭풍이 바로 축복입니다.

 

3. 예수님께서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로 제자들을 보내신 이유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새로운 각도로 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풍랑 이는 바다로 가게 하신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제자들이 이 사건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의 고통을 보고 계셨습니다.

 

(6:47-48)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예수님은 우리의 괴로움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불안한 형편과 고통스러운 삶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겪고 있는 내면의 아픔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산에서 풍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제자들을 내려다보셨을 뿐 아니라 거기서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셨음이 분명합니다(23).

배가 파선되지 않도록

제자들의 믿음이 파선되지 않도록

제자들의 믿음이 더욱 성숙하고 견고해지도록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그냥 내려다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잘 극복하도록 기도로 도우십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우리 구원의 확실한 보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고 계시므로 우리가 구원에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를 흔들어대는 풍랑이 거세게 몰아쳐도 결국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 때문에 그 풍랑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폭풍을 뚫고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25). 그리고 풍랑을 잠잠하게 하셔서 제자들을 구원하셨습니다(32).

 

4(새벽 3-6)에 예수님은 풍랑이 거세게 몰아치는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25). 좀 더 일찍 오셨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 찾아오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고난 중에 있는 자기 사람들에게 반드시 찾아오시는데 그 찾아오시는 시간은 예수님이 정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 바로 그 시각이 가장 적합한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전에 알던 예수님이 아니라 새롭고 놀라운 예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자가 아니라 바로 나의 구원자로 우리의 마음과 몸에 각인됩니다. 지울 수 없는 강렬한 흔적이 우리의 전존재에 새겨집니다.

 

성경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큰 고통을 경험한 사람은 욥일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번민하고 있던 욥에게 하나님께서 드디어 찾아오셨습니다. 이전에도 욥은 하나님을 상당히 잘 알았고 잘 섬겼습니다. 엄청난 재앙을 만났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통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이전에 알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은 비로소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생한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하시려고 그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33절을 보세요. 제자들이 단체로 예수님께 절하면서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합창했습니다. 복음서 어디를 보더라고 그 이전에 제자들이 단체로 예수님께 절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나가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친 후 돌아와서 전도보고를 할 때도 예수님께 감사의 특별한 표현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임을 알게 되었어도 예수님께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풍랑을 가르고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고 바람이 그쳤을 때 그들 모두는 배 안에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했습니다. 새로운 예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생생한 구원주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 대부분 이성적으로 깨달아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놀라운 은총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게 된 것 아닙니까? 언제 우리의 믿음의 성장합니까? 언제 교회의 부흥을 경험합니까? 우리가 위기의 때, 절망의 때라고 생각할 때 그때 우리는 생생한 구원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믿음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십니다. 가정과 교회를 새롭게 회복하시고 부흥의 때를 활짝 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우리 모두가 긴장하고 있지만 앞으로 이보다 더 큰 일들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의 한 단면만을 보고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일이 술술 잘 풀릴 때 너무 들뜨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때에는 그냥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고 즐기고 그 은혜를 이웃과 나누십시오! 반대로 고통스러운 일을 만났을 때에는 끝장이니 실패니 저주 받았느니 등등으로 성급하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세상 잣대로 판단한다면 성경이나 교회역사 가운데 점철되었던 순교자의 끝없는 행렬은 실패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기독교의 첫 순교자 스데반 청년의 죽음은 아깝고 허무한 죽음 같습니다. 제자들의 잇따른 순교는 교회의 침체와 몰락을 가져왔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어도, 이방 선교의 선두 주자 바울이 목 베여 죽임을 당했어도,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늦게까지 살았던 사도 요한까지 기름 가마 속에서 정말 무력하게 죽어갔어도 교회는 힘을 잃거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크게 부흥했습니다. 사도들이 순교할 때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주님을 더더욱 의뢰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사도들을 살려내지 않으시고 그냥 순교하도록 내버려두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끝장났다고 생각할 그때 하나님의 일은 새롭게 시작됩니다. 이것이 성경과 교회역사에서 얻는 큰 교훈입니다.

 

왜 예수님을 잘 믿는 자가 고통스러운 병에 걸립니까? 왜 사고가 나서 단명하기도 합니까? 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신자의 마지막이 실패처럼 보입니까?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만유를 다스리고 계시는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신데 왜 교회에 자주 시련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칩니까?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숨겨져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저는 바둑을 좋아합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프로기사 이세돌 군이 바둑판 위에 돌 하나를 둘 때 그저 두는 것이 아닙니다. 몇 십 수를 미리 내다보고 둡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 왜 그리 두느냐고 의심하거나 성급하게 묻지 않습니다. 나중에 그가 왜 거기에 두었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밟으시는 수순은 정말 오묘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아름답게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견지해야 할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관해 사도 바울이 이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8:28-30)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밟아 가시는 완벽한 수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과 같은 비상시국에 오늘 본문을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풍랑이 거세게 몰아치는 바다를 지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아름다운 포구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유는 모든 상황을 주님께서 통제하시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거세게 몰아치는 큰 폭풍이라도 우리에게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풍랑 때문에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예수님을 새로운 각도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물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의 손을 예수님께서 붙잡으신 것처럼 우리의 손을 강하게 붙잡으시는 예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더욱 성숙해지고 견고해질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믿어야 할 것은 폭풍은 반드시 지나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폭풍 후에 누리는 잔잔함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무릎을 꿇게 합니다. 참된 경배를 배우게 하는 것도 폭풍입니다. 마지막 날 맞게 될 죽음의 폭풍조차도 우리를 영원한 안식의 나라, 천국으로 더 빨리 가게 하는 축복의 풍랑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찬송가 3732).”

 

그런데 풍랑을 만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어떤 기도를 해야 합니까? 거창한 기도가 아니라 아주 단순한 기도가 좋습니다. 베드로처럼 단순하게 부르짖어야 합니다(30).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또는 나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소서! 나의 믿음을 발휘하게 하소서! 나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소서!”

 

오늘의 설교 주제는 시련과 믿음입니다. 하나로 엮어 표현하면 고난의 때에 우리가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주님은 폭풍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가정을 새롭게 하십니다. 교회를 굳게 세우십니다. 고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주님의 향한 우리의 믿음도 강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

*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상 주신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 비상사태를 맞아 자유롭게 주일의 공예배와 교회의 각종 모임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우리는 속히 바이러스의 확산이 멈추어지고 그 세력이 소멸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주일의 공예배와 교회의 각종 모임이 재개되고 더 활발하게 모이기를 갈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에 성전에서 길게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문이 열왕기상 8장과 역대하 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자연재해나 전염병이나 전쟁이 일어날 때를 대비하여 솔로몬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대하 6:28-30) [28]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전염병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들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거나를 막론하고 [29]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과 고통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30]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며 사유하시되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의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자연 재해나 전염병이나 전쟁으로 국가적인 위기에 봉착했을 때 백성들이 성전에 모일 수 없을지라도 각기 자기 처소에서 성전을 향해 손을 펴고 간구하거든 주님께서 그 간구를 들으시고 자비를 베푸셔서 국난을 속히 극복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도문은 우리가 드려야 할 모범적인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문의 핵심은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산에서 6시간 동안 드렸던 기도가 바로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드렸던 기도도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도 믿음의 기도입니다.

 

비상사태로 인해 함께 모여 기도하지는 못하지만 각자의 처소에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공지한대로 오늘부터 4주간 릴레이금식기도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참여하셔서 감사합니다. 참여하실 분들은 목자/부목자에게나 김석하 강도사에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믿음의 기도로 승리하는 한 주간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 우리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게 하소서! 영광스러운 교회를 꿈꾸게 하소서. 마지막 이 시대에 주님이 마음대로 쓰실 수 있는 교회 되게 하소서! 이 풍랑을 통해 성숙하고 건강한 교회가 되게 하소서! 목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가 견고하게 세워지게 하소서. 만년동과 서구와 대전과 조국과 세계를 살리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가정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행복한 가정이 되게 하소서! 나도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 찬송가 373, 393, 401, 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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