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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393204933
    성경본문
    누가복음 18:9~14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20-02-23

 

<평화 07>

(18:9-14) 평화를 깨는 큰 죄(1): 교만

2020-02-23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요약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싫어하십니다(101:5; 50:31; 4:1; 4:6; 벧전 5:5). 피조물이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사탄이 이를 부추깁니다. 에덴동산에서 뱀과 하와와 아담에게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죄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배후에 사탄과 그의 졸개들인 악한 영들의 역사가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시날 평지에 이르러 탑을 세우고 견고한 성읍을 건설하려고 했던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 없이도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어떤 문제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교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11:3~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던 바벨론 제국과 두로를 심판하신 것 역시 그들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14:12~15; 26:2~28:19).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교만한 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교만한 자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을 때 자신의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무시하거나 틀렸다고 몰아붙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대신에 남을 멸시하고 비판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의로움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결코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가 영적으로 교만한 자입니다. 영적 교만의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교만한 자들은 천박한 감사에 머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들이 세리와는 다르게, 바르게 산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11). 그들의 기도에는 화려한 문구와 감사가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감사가 진정한 감사가 아니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나은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상대적인 감사가 아니라,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은혜를 넉넉히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향해 온 마음을 다해 올려드리는 감사입니다. 또한 이웃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고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며 감사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감사는 대단한 감사가 아니라 아주 천박한 감사였습니다. 그 감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리가 없습니다.

둘째, 교만한 자들은 회개를 멸시합니다. 바리새인은 세리의 참회를 비웃으며, 세리와는 달리 자신은 회개할 죄가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죄는 안 보이고 남의 죄가 보인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선 자가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죄로 오염되었다는 것입니다. 교만의 죄, 남을 멸시하는 죄가 그의 기도 안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면서도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회개 없이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교만해지고, 자기의 의를 과시하고 싶고,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고, 영성이 자꾸 어두워집니다. 하지만 올바르게 기도하면 기도하는 중에 자신이 큰 죄인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러지 않았던 바리새인의 기도에 대해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기도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는 기도라고 평가하셨습니다. 겸손하지 않는 기도, 자신의 죄를 애통하지 않는 기도는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적 교만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16:18). 웃시야 왕의 분향 사건이 그 예입니다(대하 26:16). 둘째, 공동체가 분열됩니다. 어느 공동체에 교만한 자들의 말과 힘이 우세하면 그 공동체는 얼마가지 않아 와해됩니다. 교만한 자는 공동체를 와해하는 장본인입니다(16:5). 특히 지도자가 교만할 때 자신은 물론 공동체 전체가 큰 곤경에 처하기도 합니다. 다윗 왕의 인구조사가 그 예입니다(삼하 24:3).

이러한 결과를 낳는 교만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1:1~6, 31:23). 둘째, 그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하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교만의 싹을 잘라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온전한 제사를 하나님께 올린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고 회개할 때, 중보자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십니다(요일 1:8~2:2). 그리고 우리를 다시 세우십니다. 이것이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2:5~8).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실천하는 우선적인 현장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겸손을 배우고 실천하라고 말씀합니다(2:3; 살전 5:12~13; 벧전 5:5~6). 모두 겸손의 띠로 허리를 동이고 서로를 섬길 때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닮은 성숙한 공동체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할수록 겸손해집니다. 성경은 빛이요 거울입니다. 성경에 비추어 자신의 죄를 날마다 회개할 때 더더욱 겸손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도록 교회 공동체 안에 두셨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겸손을 배우고 실천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쳐흐르게 됩니다. 그럴 때 세상을 선도하는 성도와 교회가 됩니다. 주님의 겸손을 배우고 실천하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문

평화를 깨는 7가지의 큰 죄에 관해 오늘부터 하나씩 다루려고 합니다. 7 가지의 큰 죄는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입니다. 오늘은 교만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교만의 정의

 

어떤 자가 교만한 자입니까? 잘난 체하는 자, 건방진 자가 교만한 자입니다. 비슷한 말은 오만방자한 자, 거만한 자, 자만하는 자, 자고하는 자 등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시는 교만의 죄

 

교만한 자를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아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성경의 몇 구절을 소개합니다.

 

(101:5)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50:31)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교만한 자여 보라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너의 날 곧 내가 너를 벌할 때가 이르렀음이라

 

(4: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죄의 뿌리, 교만

 

왜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아주 미워하실까요? 지난주일에 죄를 엄중하게 다루어야 할 가장 큰 이유는 우리에게 고통과 불행을 안겨주는 주범이 죄이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죄를 방치하거나 수용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등, 모든 관계가 왜곡되고 파괴됩니다. 그로써 자신은 물론 피조세계에 평화가 사라지고 대신에 고통과 불행이 몰려듭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담이 그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도록 사탄이 부추겼습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사탄이 먼저 타락했습니다. 그 사탄이 뱀을 이용하여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3:4-5)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처럼 사탄과 뱀과 하와와 아담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피조물의 위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교만의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므로 교만이 죄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욥기에 사탄이 등장하는데 사탄이 욥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래서 욥기는 하나님께 대드는 오만방자한 사탄의 특성을 부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탄이 하나님의 적수는 아닙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통제 가운데 있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간계를 내버려두기도 하지만 도가 지나치면 그 간계를 폭로하고 무산시키십니다. 이처럼 사탄은 강력하지만 전능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지성적이지만 전지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합니다. 사탄은 아주 완고하고 교만합니다.

 

사탄이 직접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을 부추겨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기도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첫 인류 아담과 하와의 범죄 배후에 사탄이 관여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배후에 사탄과 그의 졸개들인 악한 영들의 역사가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창세기 11장을 보면 인류들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동하다가 시날 평지에 이르러서는 거기에 탑을 높이 세우고 견고한 성읍을 건설하려고 계획했습니다.

 

(11:3-4)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탑을 하늘 높이 건축하려고 했던 것은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견고한 성읍을 건설하려고 했던 것은 성 안에서 자기들의 힘으로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는데 이들은 함께 모여 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여 견고한 성읍을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어떤 문제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계획이 교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의 계획을 무산시키셨습니다. 그로써 언어를 따라 인류가 분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전 8세기에 선지자로 활동했던 이사야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에 의해 곧 패망할 것을 예고합니다. 여러 선지자들이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백성들은 고집을 피우며 회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제국을 들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이 이스라엘을 패망시킨 후에 도가 지나쳐 오만방자해질 것을 예고하시면서 그렇게 된 바벨론 제국을 하나님께서 영원히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4:12-15) [12]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바벨론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당했을 때 인접 국가였던 두로가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보고는 아주 기뻐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영토에 들어가 주민들의 가산을 약탈했습니다(26:1-2). 그 같이 비열한 두로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곧 망하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예고하셨습니다(26:2-28:19).

 

(28:15-19)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18]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에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보고 있는 모든 자 앞에서 너를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19]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말미암아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얼마 후에 두로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바벨론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멸망당합니다. 두로와 바벨론이 멸망한 가장 큰 이유는 교만입니다.

 

최악의 교만, 영적인 교만

 

교만한 자에 관하여 예수님께서 간단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입니다. 일명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비유인데 이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이 교만한 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기도하는 바리새인의 모습과 말에서 바리새인의 영적인 교만이 뚜렷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어떤 자가 교만한 자인지를 말씀합니다.

9: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가 교만한 자입니다.

14: 자기를 높이는 자가 교만한 자입니다.

 

서로 간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을 때 교만한 자는 자신의 의견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틀렸다고 몰아붙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대신에 남을 멸시하고 비판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의로움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상석에 앉는 것을 아주 당연히 여기는데 자기가 그렇게 대접받아야 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결코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가 영적으로 교만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교만이 최악의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사건건 예수님을 대적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두드러진 죄가 영적인 교만이었습니다.

 

영적 교만의 특징, 두 가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비유에서 영적인 교만의 특징이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두 가지만 들겠습니다.

 

1) 천박한 감사에 머문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공식적으로 예배(제사)가 거행되었습니다. 이 예배에 참석한 바리새인들은 가능한 성소 가까이로 나아갔습니다. 거기서 경건한 자세로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대로 그들은 따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화려한 문구와 감사로 가득했습니다. 11-12절을 보세요. “하나님, 감사하게도 저는 저 세리와는 달리 도덕적으로 바르게 (의롭게) 살았습니다(11). 종교적인 의무도 잘 수행했습니다(1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바리새인의 감사가 진정한 감사가 아니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리는 감사는 상대적인 감사가 아니라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나은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상대적인 감사, 비교하는 감사가 아니라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은혜를 넉넉히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향해 온 마음을 다해 올려드리는 감사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또한 이웃을 품는 감사입니다. 이웃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고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며 감사합니다. 여기 바리새인이 참 신앙인이었다면 참회하는 세리를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들과 함께 크게 기뻐하심을 알고 그 또한 함께 기뻐했을 것입니다. 성도는 형제들의 진정한 변화와 깊은 참회를 보면서 감사의 기도를 올려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의 감사는 대단한 감사가 아니라 아주 천박한 감사였습니다. 그 감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리가 없습니다.

 

2) 회개를 멸시한다.

 

여기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세리의 참회를 비웃었습니다. 대신에 저 세리와는 달리 자신은 회개할 죄가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기도하는 자는 옆 사람의 죄를 볼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처럼 자신의 죄는 안 보이고 남의 죄가 보인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선 자가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죄로 오염되었다는 것입니다. 교만의 죄, 남을 멸시하는 죄가 그의 기도 안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향기로운 기도가 아니라 악취를 풍겨서 주님을 역겹게 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조심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도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살피며 회개에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서 기도 시간만 길게 가진다면 그건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 없이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교만해지고, 자기의 의를 과시하고 싶고,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고, 영성이 자꾸 어두워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기도는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에는 회개가 포함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자신이 큰 죄인임을 자각하게 될 때 그 기도가 올바른 기도입니다. 여기 바리새인이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는데 금식의 목적도 깊은 회개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정한 시간에 기도했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거나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큰 길 가에서 기도했습니다. 두 손을 들고 유창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가 외식하는 기도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는 기도라고 평가하셨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올린 기도는 엄격하게 말하면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않고는, 자신의 죄를 애통해하지 않고는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영적으로 교만한 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 교만의 결과

 

1)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교만한 자에게는 참된 회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 용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교만한 자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웃시야 왕도 그랬습니다.

 

(대하 26:16)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제사장 아사랴가 말렸습니다. 제사장만 분향하도록 한 하나님의 율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왕에게 직언했습니다. 그럼에도 웃시야 왕은 분향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고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로 별궁에서 지내다가 죽었습니다.

 

(16:18) [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2) 공동체가 분열된다.

 

바벨탑 사건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공동체에 교만한 자들의 말과 힘이 우세하면 그 공동체는 얼마가지 않아 와해됩니다. 교만한 자는 공동체를 와해하는 장본인입니다.

 

(16:5)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특히 지도자가 교만할 때 자신은 물론 공동체 전체가 큰 곤경에 처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의 성군이었던 다윗이 통치 말기에 군 사령관 요압에게 전국을 다니며 인구를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요압은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직언합니다(삼하 24:3). 다윗은 요압의 충언을 무시하고 자기의 명령을 속히 이행하라고 재촉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한 것은 자신의 업적과 통치력을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대신에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교만에 대해 엄중히 징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로 이스라엘 전역에 전염병이 돌아 7만 명이 죽었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의 교만 때문에 수많은 백성이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들이 교만하면 그 폐해가 광범위하게 퍼집니다.

 

교만을 극복하기 위한 세 가지 제언

 

1)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라!

 

(31:23)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라!

 

기도할 때마다 교만의 싹을 잘라내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참회기도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요즘 회개할 거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게 문제입니다. 회개를 멈추는 순간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리처럼 자기의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성도라야 진실한 성도입니다. 다윗도 고백했습니다.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바울 사도도 죄에 매여 있는 자신을 보며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처럼 제가 문제입니다. 제가 몹쓸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터져 나와야 정상입니다. 그럴 때 세리처럼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홍정길 목사가 지난 212일에 열린 목회자 시국기도회 때에 설교하면서 고려신학교와 합동신학원의 교장이셨던 박윤선 목사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이 80 생일을 맞으셨을 때 제자들이 축하하면서  말씀을 해달라고 했더니 일어나셔서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80 묵은  흉악한 죄인이그 말씀에 저렇게 겸손하신 분이 있을까라고 크게 놀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홍정길 목사님이 요즘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지금 그 나이가 되어보니 분이 겸손한 것이 아니라 그게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죄의 유혹 앞에 순간순간 넘어지는 하나님 없이 살고 싶어 하는 나의 가증한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요즘 자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내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사실 기독교의 성인들은 잘나고 똑똑하고 거룩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자기 죄악의 깊이를 아는 사람입니다.”

 

요한 사도가 말씀합니다.

 

(요일 1:8-2:2)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죄를 깨달을 때 지체하지 말고 즉시 회개하라! 그리하면 용서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가 십자가에서 온전한 제사를 하나님께 올린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고 회개할 때 중보자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십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날마다 회개하는 것은 죄를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실 뿐 아니라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죄와 싸워 이기게 하십니다. 깊은 회개를 통해 성령님으로 충만하셔서 날마다 죄와 싸워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실천하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하면서 예수님의 마음 즉 예수님의 성품 가운데 하나가 겸손임을 강조합니다.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런데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실천하는 최고의 현장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겸손을 배우고 실천하라고 말씀합니다.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살전 5:12-13) [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3]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벧전 5:5-6)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지도자와 교우들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이 겸손입니다. 모두 겸손의 띠로 허리를 동이고 서로를 섬길 때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닮은 성숙한 공동체가 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알고 믿으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바르게 알려면 가장 먼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창조한 만물을 다스리시는 역사와 만유의 주님이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죄로 인해 깨어진 만유를 새롭게 하시고 회복하시는 구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까이 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더 바르게 알고 믿게 됩니다. 그러면 겸손해집니다.

 

성경은 빛이요 거울입니다. 성경을 가까이하면 우리의 허물과 죄가 환히 드러납니다. 성경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면 우리 내면에 깊이 숨어있는 죄들이 보입니다. 그때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회개하면 더욱 겸손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도록 교회 공동체 안에 두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실천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쳐흐르는 천국을 누리고 나누게 됩니다. 그럴 때 세상을 선도하는 성도와 교회가 됩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실천하는 한 주간되기를 기원합니다. () 찬송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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