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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390237789
    성경본문
    창세기 3:9~19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20-02-09

 

<평화 05>

(3:9-19) 평화의 상실과 회복

2020-02-09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요약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에덴동산은 풍요와 즐거움, 조화와 질서, 평화와 안식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땅은 곧 고통의 땅이 되었습니다. 평화로웠던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는 수치심과 불안함, 비겁함이 자리 잡았습니다(7~13).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유혹했던 뱀, 뱀의 유혹에 넘어갔던 아담과 하와에게 저주를 내리셨습니다(14~19).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아내셨습니다(23~24). 그곳에서 그들의 큰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4). 평화로웠던 가정에 이런 비극이 찾아온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간에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이 모든 일을 뱀이 부추겼습니다(3:1).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선악과를 먹게 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도전하는 죄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 타락의 책임을 사탄에게 돌리는 대신에, 사람이 반드시 죽음으로 그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씀합니다(2:17). 여기서 죽음이란 단순히 육체의 죽음만이 아니라, 생명적 사랑의 관계가 깨어져버린 것을 뜻합니다. 이 죽음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와서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 가운데 왕처럼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죽음은 세 단계로 진행됩니다. 처음 단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이것이 첫 인류에게 나타난 영적인 죽음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 하자마자 자신의 잘못을 상대편에게 떠넘기는 이기심과 비겁함을 보였습니다. 그 이후로 사람이 모인 곳에는 항상 갈등과 싸움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죽음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사람과 자연이 서로에게 고통을 부가하는 단계입니다. 사람이 타락한 후에 사람은 자연을 황폐하게 하고, 자연도 사람을 위협합니다. 사람은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땅과 자연 속에서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만 생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힘든 노동으로 인해 사람은 결국 육체가 병들고 노쇠하여 죽게 됩니다. 이처럼 아담이 범죄한 후 사람은 죽음에 굴복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죽음의 굴레에서 사람 스스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찾아온 절망의 뿌리요 평화의 상실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절망 가운데 한줄기 생명의 빛이 강렬하게 비쳤습니다. 죽음에 매여 있는 사람을 다시 살려내시려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계획대로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은 당신의 본성인 사랑이 강렬하게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베푸신 사랑이 어떤 사랑이었나요?

첫째, 범죄한 아담에게로 찾아오셨습니다(8). 범죄한 아담은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3:10~12, 23).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으로 찾아오셔서 아담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심령에 다시 평화를 심어주시기 위해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둘째, 대화를 통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인내와 온유로 다가오셔서 아담과 대화하셨던 하나님은 아담 부부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죄가 평화를 깨는 주범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셋째, 죄에 대한 책임을 사람이 달게 받도록 준비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절감하여,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도록 하셨습니다. 넷째, 범죄한 사람에게 회복과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여자의 후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4:4).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승리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2:13~15; 고전 15:20~22, 57).

이처럼 하나님은 범죄한 사람을 다시 회복하시고 살리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계획을, 사람이 범죄한 바로 그 시각에 공개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15). 심지어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동물을 희생시켜서 그 가죽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범죄한 인생들을 살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이신 사랑은 동물의 죽음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되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해야 합니다(8:32, 37~39).

 

 

죽음에 매여 있는 우리에게 살 길은 오직 한 길,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상실된 평화가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 찾아듭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없이는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할 수 없습니다. 결코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평화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에 감격하고 노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전문

오늘 본문은 창세기 3장입니다. 첫 인유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에덴동산은 풍요와 즐거움, 조화와 질서, 평화와 안식이 가득했었습니다. 낙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함으로써 에덴에서 살지 못하고 결국 추방되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의 내용입니다.

 

 

먼저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7: 인류의 조상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에게 수치심이 생겼습니다. 서로를 보면서 부끄러워했습니다.

 

 

8: 아담 부부가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겼는데 이제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 불안이 찾아들었습니다.

 

 

10: 아담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오신 하나님께 아담이 대답합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 부부에게 수치심과 불안을 넘어 두려움까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11-12: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왜 따먹었느냐?” 아담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아내 때문이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축소시키려고 하는 비겁하고 쩨쩨한 남자의 모습입니다.

 

 

13: 이제는 하와가 변명합니다. “뱀이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담보다는 낫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뱀 때문에 그랬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14-15: 하나님께서 뱀에게 내리신 저주입니다. 15절은 중요한 구절입니다. 조금 후에 살펴보겠습니다. 14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뱀에게 배로 다니면서 흙을 먹도록 했는데 그 뜻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의 뱀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보는 뱀의 모습과는 달랐습니다. 추측하건대 사람에게 가장 친근했던 동물이 뱀이었을 것입니다. 애완용 개처럼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했다고 합니다. “간교하다는 우리말의 뜻은 간사하고 교활하다는 뜻이지만 원어 상으로는 지혜롭고 영리하다는 뜻입니다. 뱀이 들짐승 중에서 지능이 아주 뛰어났을 뿐 아니라 보기에도 아주 멋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담 부부는 들짐승 가운데서 뱀과 가장 친근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뱀이 첫 인류를 타락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뱀을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모습으로 바꾸셔서 배로 기어 다니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뱀을 볼 때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면 저렇게 비참하게 되는구나!”라고 느끼도록 한 것입니다.

 

 

16: 여자에게 주어진 고통입니다. 사람이 겪는 고통 가운데 자녀를 잉태하고 해산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여자가 겪는 해산의 고통은 홀로 견뎌야 합니다. 남편이 곁에 있어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남편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원한다는 뜻은 남편에게 집착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없으면 허전해지는 것이 여자의 숙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삽니다. 그 과정에 반드시 겪어야 할 큰 고통이 있음을 알면서도 여자는 그것이 자기의 운명인양 고통의 길로 갑니다. 이처럼 여자는 남편에게 매여 삽니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말씀은 정상적인 부부 관계가 아니라 왜곡된 부부 관계를 뜻합니다. 사랑과 존경의 관계가 아니라 주종의 관계로, 책임을 추궁하는 관계로, 고통을 주고받는 관계로 변질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이 행복보다는 고통과 억압의 산실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17-19: 아담 즉 남자가 겪게 될 고통이 무엇인지 말씀합니다. 남자가 일할 일터가 고통의 장소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땅과 자연이 황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땀 흘려 수고하지 않고는 결실을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도 충분한 결실을 얻기란 상당히 힘들 것이라는 뜻입니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육체적인 죽음을 뜻합니다.

 

 

23-24: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핀 것은 사람과 자연환경 가운데 불어 닥친 불행입니다. 우리가 에덴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의 차이가 얼마나 큰 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 부부는 에덴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면서 하루하루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4장을 보면 그들의 가정에 더 큰 고통이 몰아쳤습니다. 큰 아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왜 이 같은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답합니다. 첫 인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그게 죄입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부부 사이에, 형제간에, 사람과 자연 간에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사람에게 죄를 짓도록 부추긴 뱀 있었다고 3:1절은 말씀합니다. 여기 이 뱀을 성경 전체의 빛에서 해석하면, 단순히 눈에 보이는 뱀이 아니라 뱀을 악의 도구로 이용한 사탄입니다. 성경은 사탄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사탄이 무슨 일을 했는지, 지금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저 담담하게 묘사합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사탄의 별명을 언급합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 원수 마귀, 악한 자, 시험하는 자, 속이는 자, 거짓의 아비, 살인자, 무저갱의 사자,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이 세상의 왕,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 큰 용(12:3), 옛 뱀(12:9),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27:1) 등입니다. 이런 별명들은 사탄의 성격과 활동상을 나타냅니다. 이 가운데 사탄을 옛 뱀이라고 한 것은 오늘 본문에 등장한 뱀의 실체를 밝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3장은 사탄이 뱀을 이용하여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 타락의 책임을 사탄에게 돌리는 대신에 사람이 그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한 가지만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것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도록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한 가지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금령이었습니다(2:15-17).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금령의 의미는 동산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그 금령을 어겼습니다. 이것이 아담이 범한 죄인데 이 죄는 보통의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도전한 큰 죄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창세기 3장의 주요 내용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깨뜨림으로써 아담 자신은 물론 온 세상이 고통으로 탄식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사람과 모든 피조물이 직면하게 될 고통은 마침내 죽음으로 귀결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2:17에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은 죽음에 굴복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에서 잘 주석하고 있습니다.

 

 

(5:12) [12] 이러므로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사망이란 단순히 육체의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있다고 말할 때 단지 육체적인 생명이 붙어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관계하고 있는 모든 대상들과 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적 사랑의 관계가 깨어져버린 것이 성경이 말하는 죽음입니다. 바로 그런 죽음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와서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 가운데 왕처럼 군림하고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죽음은 세 단계로 진행됩니다. 죽음의 처음 단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아담에게 있어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아담의 마음에 죄가 자리 잡았고 그로써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그 결과가 앞서 확인한 대로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죄를 지적 받고도 회개할 수 없었습니다. 죄로 인해 받을 심판이 그만큼 무서웠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축소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첫 인류에게 나타난 죽음의 시작으로서 영적인 죽음입니다.

 

 

두 번째 죽음의 단계는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범죄 하자마자 서로를 신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서로 남이 되어버렸습니다.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이타적인 사랑의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상대편에게 떠넘기는 이기심과 비겁함이 자리 잡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그들 사이는 갈라져버렸습니다. 그 이후로 사람이 모인 곳에는 항상 갈등과 싸움이 생겼습니다. 심지어 사람이 사람을 죽입니다.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간에 폭력과 전쟁이 일어나서 대량 학살이 벌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만큼 무섭고 잔인한 존재는 없습니다. 이것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죽음의 현상입니다.

 

 

세 번째 죽음의 단계는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가 깨어짐으로써 서로에게 고통을 부가하는 단계입니다. 사람이 범죄 하기 전에는 자연은 사람에게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한 후에는 자연과 사람은 마치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자연을 황폐하게 하는 장본인이 사람입니다. 자연도 사람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땅과 자연 속에서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만 생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힘든 노동으로 인해 사람은 지치고 약하게 되고 결국 육체가 병들고 노쇠하여 죽게 됩니다.

 

 

요약하면 아담이 범죄한 후 죽음에 굴복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로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죽어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사람 스스로 이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찾아온 절망의 뿌리요 평화의 상실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절망 가운데 한줄기 생명의 빛이 강렬하게 비쳤음을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죽음에 매여 있는 사람을 다시 살려내시려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그 계획대로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창 3장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은 당신의 본성인 사랑이 강렬하게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베푸신 사랑이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범죄한 아담에게로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8).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찾아오신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 편에서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이것을 잘 밝히고 있습니다.

 

 

(3:10-12) [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지 않으시면 사람에게는 회복의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본문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람에게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찾아오셨습니다. 늘 그랬듯이 날이 서늘할 때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으로 찾아오셔서 아담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범죄한 사람에게 살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은 범죄한 사람들에게 계속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역사요 구속사의 핵심입니다. 구속사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로 찾아오신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의 심령에 다시 평화를 심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대화를 통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회복과 구원의 길에는 반드시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깨달음도 하나님께서 지각을 열어주셔야 가능합니다. 죄의 본질과 그 죄 때문에 겪게 될 비참한 결과를 사람 스스로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 부부에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아주 차분하고 소상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화내실 만한데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온유하심을 엿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인내와 온유로 다가오셔서 아담과 대화하셨던 하나님, 그래서 아담 부부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죄가 평화를 깨는 주범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책임을 사람이 달게 받도록 준비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 부부에게 앞으로 어떤 고통을 겪게 될 것인지, 예고하셨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자녀를 잉태하고 낳는 고통, 부부관계에서 겪게 되는 고통, 일터에서 겪는 고통 그리고 육체적으로 죽는 고통입니다.

 

 

왜 이런 고통을 겪게 하십니까? 물론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요 심판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사랑이 숨겨져 있습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절감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인생이 겪는 모든 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는 방편이요 하나님을 찾게 하는 은총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23-24: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에서 추방하셨습니다. 에덴으로 들어오는 길을 막으셨습니다.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그룹(천사)들과 불 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유는 범죄한 인간이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고 영생한다면 사람이 더욱 비참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죄를 범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은 정말 살벌한 곳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악의 급속한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한정된 삶을 살다가 죽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적인 죽음도 범죄한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일반은총 속에 포함된다고 해야 옳습니다. 죽음조차도 하나님 사랑의 배려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람에게 회복과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것이 15절 말씀입니다. 최초의 복음, 원복음,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 그 내용은 여자의 후손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남자에게서 났다고 말씀합니다. 즉 사람을 남자의 후손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은 특별한 후손입니다. 여자의 후손도 사람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혈통을 따라 난 자가 아니라 특이하게 출생할 자라는 뜻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실 분이십니다. 즉 범죄로 인해 사탄과 죽음에 매인 사람을 다시 살려낼 메시아(구세주)입니다.

 

 

물론 아담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여자의 후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20절을 보면, 아담은 자기 아내를 통해 구원자가 태어날 것을 바랐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에게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뜻인 하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후손이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 뼈저리게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긴 역사가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역사요 하나님의 구속역사입니다. 마침내 때가 되어 그 여자의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신약성경을 갖고 있는 우리는 이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쓴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13-15) [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예수님)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이처럼 창 3:15의 예언이 예수님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사탄과 싸워서 승리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의 승리는 십자가를 통한 승리였습니다. 그 승리의 증거가 부활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님께서 승리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도 죄에서 벗어나 다시 살게 된다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다른 곳에서 잘 밝히고 있습니다.

 

(고전 15:20-22)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망을 향해 호령합니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리고는 주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동일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노래합니다.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범죄한 사람을 다시 회복하시고 살리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죽어가는 인생들을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최초의 계획이셨습니다. 그 사랑의 계획을 사람이 범죄한 바로 그 시각에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이 창 3:15의 원시복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이 누구신지를 극명하게 드러내신 특별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계획하시고 행동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 부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합니다. 아담 부부가 반영구적인 가죽 옷을 입고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범죄한 자신들을 따뜻하게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더구나 가죽 옷을 짓기 위해 동물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범죄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피부로 느끼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범죄하여 죽어가는 인생들을 다시 살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이신 사랑은 동물의 죽음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강렬한 사랑이 인생들에게 넘치도록 부어진 것은 아담이 범죄한 바로 그 시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고는 배기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되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창 3장에서 우리가 노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바울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8:32, 37-39)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범죄한 아담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이곳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그 큰 사랑을 받아 누리라고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죄 때문에 죽음에 매여 있는 우리에게 살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환영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그렇게 찾아오신 하나님이 바로 성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가 살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환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실된 평화가 우리의 심령과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 찾아듭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살게 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십시오! 그것만이 하나님의 큰 사랑에 바르게 반응하는 첫 걸음입니다. 이것 없이는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이것 없이는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이것 없이는 우리에게 부여하신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할 수 없습니다. 이것 없이는 우리가 결코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평화의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에 감격하고 노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찬송가 462,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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