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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375179851
    성경본문
    출애굽기 25:10~22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19-11-24

 

<출애굽기 강해 21>

(25:10-22) 지성소로 들어오라

2019-11-24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요약

참된 안식은 하나님을 만날 때에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 앞을 구약 용어로 표현하면 지극히 거룩한 곳이라는 뜻인 지성소입니다.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휘장을 열고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반드시 희생제물을 잡을 때 받아둔 속죄의 피를 갖고 들어가서 지성소 앞에 있는 휘장에 속죄의 피를 뿌려야 했습니다. 그 후에야 휘장을 열고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의식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신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10:19~22). 그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는데(27:50~51), 그렇게 갈라진 휘장 사이로 새로운 살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마음에 뿌린 사람이라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길을 통하여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의 표현으로는 그런 자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첫째,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증거궤 앞에 선다는 뜻입니다. 증거궤 안에는 십계명 두 돌 판이 들어있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의 법도이며,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 나타내신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자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시며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하시는 의지를 명확하게 표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이 담긴 언약궤가 인도하는 대로 광야 길을 걸어갔습니다(10:33~36).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점령한 후 승전기념식을 할 때, 여호수아는 언약궤를 가운데 두고 백성의 절반을 그리심산으로 향하게 하고 나머지 절반을 에발산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축복과 저주의 율법을 낭독했습니다(8:33~34). 이는 축복과 저주가 갈라지는 분수령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여부와 깊이 관련이 되어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처럼 증거궤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앞세우고 그 뒤를 따를 때 우리는 바른 길로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를 때 사람이 변하고 땅이 변하여 안식의 땅이 되고 평화의 나라가 열립니다. 하나님 말씀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귀하게 여기며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시길 바랍니다.

 

둘째, 지성소로 들어간다는 것은 속죄소 앞에 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주와 심판 아래에 있는 죄인들을 위해 율법을 가리는 덮개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죄인이 언약궤 안을 들여다보면 심판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덮개가 속죄소입니다. 속죄소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대제사장은 속죄소로 나아갈 때 반드시 속죄의 피를 속죄소 주변에 뿌렸습니다(16:14). 왜냐하면 피 없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피 뿌림의 의식이 예수님에 의해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되었습니다(3:19~26). 그리고 지성소로 들어간 대제사장이 살아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셨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 역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 예수의 죽음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4:14~16).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온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 믿는 것밖에는 없습니다(요일 2:1~2).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 성도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찬송의 제사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선행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13:15~16).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성소로 들어오라고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자기에게로 담대히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영광의 빛으로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빛 안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영광의 빛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지성소를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와 함께 은혜의 보좌 앞으로 지금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최고 소원입니다. 자기를 만나러 나아오는 교회와 성도들을 하나님께서는 정말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예비해놓으신 크고 놀라운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나아가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예배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전문

 

지난 번 출애굽기 강해 때(113일 주일) 성막에 관해 개괄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항상 함께하신다는 표징으로 주신 조립식 구조물이었습니다. 그 성막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성막에서 하나님과 만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을 누렸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 교제할 때 참된 안식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있는가? 지금 나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가?”

 

 

하나님 앞을 구약성경의 용어로 표현하면 지성소(the most holy place)입니다. 지성소는 성막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지성소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림 1”에서 보듯이 성막은 뜰과 내실(텐트)로 구분됩니다. “그림 2”에서 보듯이 내실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지는데 그 사이에 휘장이 쳐져 있어서 성소와 지성소가 구분됩니다. 성소는 말 그대로 거룩한 곳이며 지성소지극히 거룩한 곳, 가장 거룩한 곳이라는 뜻입니다. 성소에는 대제사장이나 선임된 제사장이 매일 들어가지만 지성소에는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 들어갑니다. 그날이 대속죄일입니다. 그날에 대제사장이 휘장을 열고 지성소로 들어갈 때에 반드시 속죄의 피를 갖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속죄의 피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번제단 부근에서 희생제물을 잡을 때 받아둔 피입니다(“그림 3” 참조). 대제사장이 이 속죄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 지성소 앞에 있는 휘장에 속죄의 피를 뿌립니다. 그 후에 휘장을 열고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지성소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규례였습니다.

 

 

이 같은 의식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10:19-22)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목적을 밝히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약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를 지성소로 들어오게 하시려고 온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27:50-51)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그렇게 둘로 갈라진 휘장 사이로 새로운 살 길이 열렸는데 그 길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단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고 그 피를 자기의 마음에 뿌려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 예수의 피를 힘입는다는 것그 피를 마음에 뿌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믿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믿고 그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모신 자는 누구든지 항상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표현으로는 그런 자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성소 안에는 두 가지의 기물이 있습니다(“그림 35” 참조). 증거궤와 속죄소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그 증거궤와 속죄소를 어떻게 제작해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설계도대로 귀한 재료를 사용하여 정성을 다해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증거궤와 속죄소 앞에 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증거궤 앞에 선다는 뜻입니다.

 

 

증거궤는 성막의 기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물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성막을 증거궤를 두는 집으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증거궤가 성막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증거궤를 언약궤 혹은 법궤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그 궤 안에 십계명의 두 돌판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의 핵심이며 그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하시는 의지를 십계명으로 명확하게 표명하셨습니다.

 

 

증거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었습니다(10). 아주 단단하여 썩지 않는 고급나무였습니다. 증거궤의 너비와 높이는 약 68cm, 길이는 113cm로 직육면체의 나무상자입니다. 이 나무상자의 안팎은 모두 정금으로 입혔습니다(11). 고급 목재에 금으로 입힌 것은 증거궤의 신성함을 나타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증거궤 자체의 신성함이나 그 궤 안에 넣을 두 돌판의 신성함이기보다는 두 돌판에 기록된 십계명의 소중함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의 근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는 십계명을 비롯한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소중히 여겨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증거궤 앞에 서는 것이요 증거궤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앞에 서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그 말씀 앞에 날마다 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16절을 보세요. 광야생활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계명의 두 돌판이 담긴 증거궤를 운반할 때에는 선별된 제사장들이 항상 그 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하여야 했습니다(“그림 5” 참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민수기 10장을 보면,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길을 인도했다고 말씀합니다.

 

 

(10:33-36) [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34]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 [35]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여호수아 3장에는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 물에 들어섰을 때 강물이 갈라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가로막힌 장벽을 허물고 새 길을 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언약궤와 함께 매일 한 번씩 돌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7일째에는 일곱 번 돌았는데 그때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악의 진지를 파하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에서는 악한 영들과 대적할 때에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8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서 여리고 성과 이이 성을 점령한 후에 승전기념식을 합니다. 이때 여호수아는 언약궤를 가운데 두고 백성의 절반을 그리심산으로 향하게 하고 나머지 절반을 에발산으로 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축복과 저주의 율법을 낭독했습니다.

 

 

(8:33-34) [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34] 그 후에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30년 전에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제게 가장 깊은 인상을 주었던 곳이 그리심산과 에발산이었습니다. 이 두 산은 아이 성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그리심산은 나무가 많았지만 에발산은 민둥산이었습니다. “에발은 헐벗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그리심산처럼 복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에벨산처럼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실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갈라지는 분수령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여부와 깊이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언약궤(증거궤, 법궤)와 관련된 몇 구절을 생각했는데 요약하면,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그 뒤를 따를 때 바른 길로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거할 때 우리는 참된 안식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전진할 때 장애물이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복이 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람이 변하고 땅이 변하여 안식의 땅이 되고 평화의 나라가 열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십시오! 이것이 지성소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난 자들이 늘 유념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2. 지성소로 들어간다는 것은 속죄소 앞에 선다는 뜻입니다.

 

 

속죄소의 원어는 덮개(cover)라는 뜻입니다. 이 뜻처럼 속죄소는 증거궤의 뚜껑입니다. 증거궤에 뚜껑을 덮어둔 이유는 증거궤 안에 들어있는 십계명의 두 돌판을 사람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무엘상 6장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궤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겨서 일곱 달을 이방 족속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려고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로 인해 적지 않은 벧세메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었습니다.

 

 

(삼상 6:19-20)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이 사건은 우리가 율법 앞에 정면으로 서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증언합니다. 신약성경에서도 같은 뜻으로 말씀합니다.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모든 인생들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부끄럽고 두려워서 감히 하나님의 율법을 정면으로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에 있는 죄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율법을 가리는 덮개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 덮개를 속죄소(죄를 덮는 자리) 혹은 시은소(은혜가 내리는 자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속죄소는 율법의 정죄를 가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속죄소는 순전히 금으로 만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는 신성한 곳임을 상징합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그곳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속죄소로 나아가 하나님을 뵈옵고 은혜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속죄의 피가 담긴 그릇을 가지고 들어가서 속죄소의 동쪽과 속죄소 앞에 피를 뿌려야 했습니다.

 

 

(16:14)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여기 일곱 번 피를 뿌렸다는 것은 충분한 피를 뿌렸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게 한 것은 피 뿌림의 의식이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피 없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 피 뿌림의 의식이 예수님에 의해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3:19-26)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갖고 지성소로 들어가면 백성들은 뜰에서 대제사장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대제사장이 성소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호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살아나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셨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다 지키셨으므로 죄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죄가 없으셨기에 죽으실 이유도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범죄로 인해 죗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이 대속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들 예수의 죽음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증거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성결한 몸으로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제자들 앞에 영광의 몸으로 다시 나타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죄의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복음입니다.

 

 

(4:14-16)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지성소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온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요일 2:1-2)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죄가 깨끗이 처리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새로운 살 길이 열렸다는 확실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내립니다. 서두에서 봉독한 히브리서이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고 그 피를 마음에 뿌린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며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는다는 것과 그 피를 우리의 마음에 뿌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차적으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건이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믿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속죄소 위에는 그룹으로 불리는 두 천사가 마주 대하고 있는 조각이 세워져있었습니다(“그림 5” 참조, 18-21). 이것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받들어 모시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과 지혜를 찬양하는 모습을 조각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울러퍼지는 천사들의 찬송을 들었습니다. 그 찬송의 주제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성도의 구원입니다.

 

 

(5:9-14)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를 (일곱 번) 뿌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에 푹 잠긴다는 것인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폭포수 같은 구속의 은혜에 푹 잠겨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찬송의 제사라고 합니다.

 

 

(13: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우리의 마음에 뿌린다는 것은 더 나아가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13:12-13)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선행과 이웃을 섬기는 제사로 말씀합니다.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의 표현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지성소로 들어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 제사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제사와 이웃을 향한 사랑과 선행의 제사입니다. 찬송의 제사는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찬송하는 제사입니다. 사랑과 선행의 제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나누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주일에 우리는 추수감사절로 지켰습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에 감사한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매순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입술에서 찬송과 감사가 사라지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손과 발이 이웃을 향한 선행과 사랑에서 움츠러들고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는 대신에 우리의 마음이 다른 것으로 분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지성소로 들어오라고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자게에게로 담대히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이유는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지성소 안을 한 번 상상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영광스러운 빛으로 지성소에 임재 해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영광의 빛이 정금으로 만들어진 속죄소에 반사되어 지성소가 더 환하게 밝혀져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비추시는 영광의 빛은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빛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치료의 힘찬 광선입니다. 그 빛은 우리에게 천국을 사모하게 하는 소망의 빛입니다. 그 빛은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하는 새 창조의 빛입니다. 그 빛 안에 거하는 자들은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영광의 빛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지성소를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와 함께 은혜의 보좌로 지금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날마다 나아가십시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최고 소원입니다. 자기를 만나러 나아오는 교회와 성도들을 하나님께서는 정말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예비해놓으신 크고 놀라운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예배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 찬송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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