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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357135232
    성경본문
    출애굽기 17:1~7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19-09-01

<출애굽기 강해 15>

(17:1-7) 광야입니까

2019-09-01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요약
광야를 만나면 마음도 광야가 되기 쉽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물 없는 광야에서 자신들마저 광야가 되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봅니다. 노예에서 해방된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물이 없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광야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에도 불평이 생깁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꼭 한 가지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가 지속되면 결국 우리의 마음은 메마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마음상태는 환경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경이 변하면 광야였던 마음이 낙원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는 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광야가 낙원으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주인으로 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은 광야일 수밖에 없습니다(17:5~6).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물이 없다는 한 가지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믿지 못했습니다(7).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다투었습니다(2).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었습니다. 물이 없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은 광야가 되었지만 모세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공급하심을 온전히 신뢰했습니다. 이런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서 무엇이 부족하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주님께서 제게 우선적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까지도 덤으로 주십니다(6:31~33). 물 없는 사막에서도 하나님께서 은혜의 생수를 터트려 마음껏 마시게 하실 것입니다(78:15, 20).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을까요? 반석과 그 반석에서 솟아난 물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사도 바울은 생수가 솟아난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고전 10:1~4).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따라 르비딤 광야까지 동행하셨고, 더 나아가 호렙산 반석 위에까지 올라가 서계셨다는 것입니다(6). 따라서 호렙산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난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생수가 흘러나온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호렙산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수는 명백하게 성령님을 상징합니다(7:37~39).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모세의 지팡이로 내리침을 당한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났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나일강을 쳐서 나일 강물을 피로 변화시켰던 바로 그 지팡이였습니다(5). 지팡이로 나일강을 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지팡이로 강타당하여 쪼개어진 반석에서 생수가 풍성하게 흘러나왔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강타 당하신 것, 매 맞고 찔림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53:5). 바로 그 수난의 장소가 갈보리 십자가였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말갛게 씻는 보혈이 강같이 흘러내렸습니다. 죄 용서 받은 우리에게 생수까지 터뜨려주셨습니다. 그 생수를 받아 마신 자들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을 예수님께서 친히 약속하셨습니다(4:14).

성도 여러분, 자신을 죽여 우리에게 생수를 터뜨려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광야 같은 우리의 마음을 소생시키기 위해 오늘도 생수를 넉넉히 공급하십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참회하면 믿음의 회복은 물론 성령의 생수를 흡족히 마시게 하셔서 광야 같은 우리의 마음이 옥토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 옥토에 생명의 말씀이 떨어져 풍성한 열매가 맺힙니다. 그래서 낙원이 됩니다.

 

요즘 여러분의 마음상태가 어떻습니까? 광야입니까? 광야라면 여러분이 밟는 땅도 광야가 될 것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성령의 생수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생수가 이웃에게로 풍성히 흘러넘치기를 바라십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한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4:11~13). 이처럼 바울은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힌 사람,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만족하고 기뻐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위협하고 있는 외부의 광야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는 주위에 있는 광야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광야입니다. 내 마음의 광야를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먼저 구해야 할 것은 성령의 생수를 흠뻑 마시는 것입니다. 그 생수가 우리의 마음에 강같이 흐를 때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낙원으로 가꿀 수 있습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셔서 광야를 낙원으로 만드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전문

대부분의 사람은 환경에 좌우됩니다. 광야를 만나면 마음도 광야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개척자와 선구자는 다릅니다. 우리나라 가곡 중에 선구자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이 노래에 나오는 선구자란 일제 때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세우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독립투사들을 일컫습니다. 그 독립투사들의 육신은 일송정 푸른 솔처럼 늙어갔지만 그들의 정신은 한줄기 해란강처럼 오늘에까지 굽이쳐 흘러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애국애족 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변함없이 요청되기에 시인은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도 그 선구자의 대열에 서있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애국자가 되어야 합니다. 애국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선구자들의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선구자들의 정신은 대의를 향한 불굴의 투지입니다. 그 정신을 시인은 거친 꿈으로 표현했습니다.

 

선구자나 개척자들은 광야 같은 환경을 만날 때 좌절하지 않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것은 그들의 마음 중심에서 거친 꿈이 용솟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를 만나면 오히려 불굴의 투지가 생깁니다. 말을 타고 광야를 구석구석 돌며 낙원으로 바뀌게 될 미래를 꿈꾸며 개척의 의지를 불태웁니다. 그 광야를 개간하고 강줄기를 끌어들여 마침내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릴 새 시대, 새 땅을 내다봅니다. 광야가 거친 만큼 꿈 또한 거칩니다. 선구자는 그 거친 꿈이 성취될 때까지 지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와는 달리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물 없는 광야에서 자신들마저 광야가 되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봅니다. 그들은 신 광야에서 르비딤으로 이동했습니다. 르비딤도 광야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곳이 광야가 아니었다고 해야 맞습니다. 태양이 작열하는 낮에는 하나님께서 구름기둥으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추위가 엄습하는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하셨습니다. 냉난방이 완비된 장소에서 캠프생활을 했습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하늘에서 신선한 양식이 내렸습니다. 아침에는 만나,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내렸습니다. 애굽의 노예생활과 중노동의 고역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자유를 얻은 가족들과 동족들이 함께 어울려 지내는 그곳을 광야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광야가 되었습니다. 물이 없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광야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두나 계속 늘어납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광야가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불평이 생기고 남을 원망하고 비방하고 다투고 세상 욕심에 찌들어갑니다. 이렇게 마음이 황폐하게 되는 것은 한 가지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마음이 헝클어져서 광야가 되었습니까? 한 사람 때문이지 않습니까? 다른 모든 것은 별 문제가 없는데 바로 그 한 사람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고 상하기가 일쑤입니다. 바로 그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직장 동료나 가까운 이웃이나 친한 친구일 수 있습니다. 교회의 형제자매일 수도 있습니다. 가족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돈 때문에 광야가 됩니다.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아서 그럴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실적이 좋지 않거나 승진에서 누락되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청년들에게는 진로가 불명확하거나 제 때에 결혼하지 못하거나 취업하지 못해서 그럴 수 있습니다. 건강이 좋지 못해서, 좋지 못한 성격이나 습관을 고치지 못해서 생활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한 가지가 해결되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걸 해결하려고 몰두하고 매달립니다. 그래도 그 문젯거리가 해결되지 않고 장기간 지속될 때 인내에 한계가 옵니다. 마음이 산란해지고 광야가 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상태는 어떻습니까? 낙원입니까? 광야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상태가 주위 환경과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이 광야인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처한 환경은 정말 광야인데 그 사람의 마음이 낙원일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했습니다. 그들이 맞닥뜨린 환경은 고난과 박해의 감옥이었지만 그들에게 그곳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성전이요 천국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을 아시는 분들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사님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1.4 후퇴 때 두세 달이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차남 가용 씨만 데리고 남하하셨습니다. 그때 박사님의 나이는 40세였습니다. 그 후 45년 동안 독신으로 지내면서 마음을 다해 환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셨습니다. 박사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아주 단출하게 사셨지만 어려운 자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나누셨습니다.

 

8순을 넘겼을 때 (1992년경) 박사님은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사진과 편지를 받으셨습니다. 그때 기자와 대담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기자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남하하신 후 사랑의 인술을 실천하며 한평생 보내셨는데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이었습니까?” 장 박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을 믿었는데 경성 의전에 시험을 칠 때 하나님, 저를 의사가 되게 하시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의 그 약속이 나의 한평생을 지배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남하한 후 피난지 부산에서 오갈 데 없는 행려병자들을 치료하는 천막병원을 세웠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과 뜻을 모아 복음병원, 청십자 의료보험, 청십자 병원 등을 창설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신앙의 힘이었으나 마음속 깊이 가족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불쌍한 이웃을 위해 일하는 만큼 북에 남겨두고 온 아내와 자녀들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게 되리라고 나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불쌍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내 가족을 사랑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가족이 그리울수록, 걱정이 될수록 나는 더 열심히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가족의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나는 내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은 아버지 없이도 잘 컸고 아내도 지금까지 살아있으니 그들도 누군가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장남은 약학박사, 삼남은 물리학박사가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기자가 다시 질문합니다. “부부가 서로 떨어져 40여년을 독신으로 살면서 변하지 않은 사랑에 대해 들려주십시오.” 박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결혼한 지 15년쯤 되던 어느 날, 나는 우리 부부가 정말 참 사랑을 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다. 나는 책을 읽고 있었고 아내는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 나는 우리의 사랑이 육신의 한계를 넘어 죽거나 헤어지더라도 영원하리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참 사랑을 아내에게 고백했고 아내도 오늘까지 참 사랑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40년간 나에게 재혼을 권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나는 결혼이란 한 번만 하는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살아서 아내와 만날 수 있기를 빌고 있지만 이제 나이 팔십이 넘었으니 살아서 못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저 세상까지 영원할 것입니다.”

 

그 이후에 정부에서는 장 박사님께 북한 방문단의 일원으로 가족들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우선적으로 드리겠다고 제의했지만 박사님은 거절하셨습니다. 많은 이산가족들을 제치고 자신이 먼저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 양심에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가족들을 만나보지 못한 채 소천 하셨습니다. 2000817일에 서울대 의대교수로 있는 차남 가용 씨가 방북하여 그때까지 수절하고 계신 어머니와 형제 모두를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장기려 박사님의 생애를 보면서 박사님의 마음에 가득 채워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천국의 소망과 가족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봅니다. 그분의 마음이 광야처럼 황폐하게 되었다 해도 충분히 동정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사님은 자신의 마음을 낙원으로 가꾸셨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박사님을 존경하며 그의 인격을 닮고 싶어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일차적인 교훈은 우리의 심령이 광야가 되는 것은 주변의 환경이나 세상의 것들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착각하고 있습니다. 돈이 충분하면, 지위가 높아지면, 상관에게 인정을 받으면, 좋은 집을 구입하면, 건강하게 되면, 좀 더 몸매가 날씬하게 되면, 시험에 합격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부부간이나 고부간에 갈등이 해소되면 광야가 낙원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 중요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그 같은 문제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들이 극복되었다고 해서 광야가 변하여 낙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의 핵심은 내가 변해야 합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주인으로 계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변두리로 내몰고 내가 중심이 될 때, 당면한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해도 나의 마음은 광야일 수밖에 없습니다.

 

(17:5-6) [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지 않으면 결국 광야가 된다는 말씀인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제 저녁에도 하늘에서 내린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없다는 한 가지 이유로 그들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소리쳤습니다. 7절 하반절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라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의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아우성을 치면서 덤벼들었습니다. 모세와 다투었습니다(2).

 

그래도 모세는 백성들을 설득해보려고 했습니다. 이미 비슷한 경우를 네 번이나 당했기 때문에 정말 변하지 않고 있는 동족들의 불신앙과 추태를 보면서 모세는 속이 크게 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소연을 합니다. 2절 하반절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이게 몇 번째냐? 해도 너무하지 않느냐?”라는 뜻입니다.

 

백성들은 모세의 하소연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졌기 때문입니다. 모세를 향해 돌까지 던질 기세였습니다. 그런 백성들을 보고서 모세는 그들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었습니다(4). 그 많은 무리 중에서 모세 한 사람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물이 없는 것 그 하나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이 광야가 되었지만 모세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믿음이 얼마나 크게 성장했는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하면 아브라함을 생각합니다.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그는 무작정 출발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고 합니다. 이전에 가나안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대단히 큰 믿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모세의 경우는 다릅니다. 애굽에서 도망하여 40년간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 광야생활 마지막 무렵에 호렙산(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호렙산 부근에 위치한 르비딤 광야의 지형지세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거기서 물을 찾기란 아주 어렵다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랬어도 모세는 백성들을 리비딤 광야로 인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1). 그러므로 모세의 믿음도 대단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공급하심을 온전히 신뢰했습니다.

 

성경은 모세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한결같이 약속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약속하셨습니다.

 

(6:31-33)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러분에게도 지금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것, 부족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돈입니까, 건강입니까? 가족과 직장과 사업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 같은 문제들은 신령한 것을 구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인(sign)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를 향한 주님의 소원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잘 분별하고 그것을 먼저 구하면 그것을 주실 뿐 아니라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까지도 덤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서 무엇이 부족하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주님, 왜 제게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까? 주님께서 제게 우선적으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의 상황에 적용하면, 물이 없는 르비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자기 백성들에게 물을 주시기로 이미 계획하셨습니다. 이유는 인생들이 물 없이는 생존할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을 달라고 백성들이 소리 친 것은 믿음의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전에 수르 광야에서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신 하나님의 기적을 그들이 체험했었기 때문에 그때를 회상하면서 지금도 놀라운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물 없는 광야에서 물을 얻어 마시는 것보다도,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보다도 더 우선적인 것은 우리의 믿음이 주님 보시기에 합격 점수를 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광야가 됩니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장기려 박사님처럼 믿음으로 행할 때 우리의 마음에 평화와 소망이 피어납니다. 박사님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산다면 북에 있는 가족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공급하시고 보호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올바르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올바르게 반응한다면 물 없는 사막에서도 하나님께서 은혜의 생수를 터트려 마음껏 마시게 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 생수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오늘 본문에서는 반석과 대비시켜 묘사합니다. 5-6절을 보세요. 호렙산 반석에서 흘러나온 물이 얼마나 풍성했는지 시편 78편에서 말씀합니다.

 

(78:15)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78:20 상반절) 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을까요? 반석과 그 반석에서 솟아난 물이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분, 어느 누구도 물을 구하기 위해 반석에 올라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상식입니다. 그런데 6절을 다시 보세요. 호렙산 반석 위에 하나님께서 올라가 서셨습니다. 그러므로 반석을 터뜨려 생수를 솟아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생수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때 마신 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호렙산 반석에서 솟아난 생수에 관하여 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고린도전서에서 설명합니다.

 

(고전 10:1-4)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단락에서 사도 바울은 생수가 솟아난 호렙산 (신령한)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따라 르비딤 광야까지 동행하셨고 호렙산 반석 위에까지 올라가 서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호렙산 반석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즉 호렙산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난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생수가 흘러나온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호렙산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수는 명백하게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7:37-39)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런데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남아있습니다. 어떤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로 내리침을 당한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났습니다. 본문 5절을 보면, 모세의 지팡이는 애굽의 나일강을 쳐서 강물을 피로 변화시켰던 바로 그 지팡이였습니다. 지팡이로 나일강을 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조금 전에 읽었던 시 78:5에서는 하나님께서 반석을 쪼개시고 물을 내셨다고 표현합니다. 지팡이로 강타당한 반석, 그래서 쪼개어진 반석에서 생수가 풍성하게 흘러나왔습니다.

 

지팡이로 강타당한 반석, 쪼개어진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합니다. 메시아의 수난의 장면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께서 강타 당하신 것, 채찍에 맞고 찔림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대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바로 그 수난의 장소가 갈보리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말갛게 씻는 보혈이 강같이 흘러내렸습니다. 죄 용서 받은 우리에게 생수까지 터뜨려주셨습니다. 그 생수를 받아 마신 자들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약속하셨습니다.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성도 여러분, 자신을 죽여 우리에게 생수를 터뜨려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생수를 가득 품고 우리 곁에 와계십니다. 광야 같은 우리의 마음을 소생시키기 위해 오늘도 생수를 넉넉히 공급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마주 대하고 계십니다.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으신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 우리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고 참회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회복하실 뿐 아니라 성령의 생수를 흡족히 마시게 하십니다. 그로써 광야 같은 우리의 마음이 옥토로 변합니다. 그 옥토에 생명의 말씀이 떨어져 3060100배의 풍성한 열매가 맺힙니다. 그래서 낙원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예수님께서 성령의 생수를 받아 마셔야 합니까? 왜 우리의 뱃속에서 성령의 강이 흘러넘쳐야 합니까? 왜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까? 적어도 세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광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우리도 광야처럼 황폐해질 수 있기 때문이며, 셋째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두 가지 이유는 오늘 말씀드렸고 세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번 강해 때 살펴볼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요즘 여러분의 마음상태가 어떻습니까? 광야입니까? 의심과 원망과 불평과 다툼과 욕심에 휘둘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님께서 부으시는 성령의 생수로 넘쳐나지 않는다면 여러분 자신은 물론 여러분 주위에 펼쳐져있는 광야를 낙원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광야라면 여러분이 밟는 땅도 광야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이웃과 교회가 광야인 것은 여러분 자신에게 그 일차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남이나 환경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 속에 있는 광야입니다.

 

그래서 광야인 우리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오늘도 예수님께서 생수그릇을 받쳐 든 하인처럼 친히 우리 곁에 와계십니다. 아니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이유는 성령의 생수를 부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최고 소원은 우리가 성령의 생수를 넉넉히 받아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수가 이웃에게로 풍성히 흘러넘치기를 바라십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빌립보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4:11-13)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능력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최고의 능력은 성령의 충만입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한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힌 사람,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만족하고 기뻐했습니다. 감옥에서도 천국을 맛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위협하고 있는 외부의 광야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는 주위에 있는 광야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광야입니다. 내 마음의 광야를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먼저 구해야 할 것은 성령의 생수를 흠뻑 마시는 것입니다. 그 생수가 우리의 마음에 강같이 흐를 때 우리는 광야 같은 세상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낙원으로 가꿀 수 있습니다.

 

교회와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이웃과 우리나라와 세계를 살리는 하나님 나라의 선구자가 되려면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일꾼들을 주님께서 찾고 계십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하셔서 광야를 낙원으로 만드는 주님의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찬송가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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