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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354447078
    성경본문
    출애굽기 15:22~27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19-08-18

<출애굽기 강해 13>

(출 15:22-27) 우리를 치료하소서!

2019-08-18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요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찬송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순식간에 돌변했습니다. 광야에서 마실 물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찾은 호수마저 ‘마라’라는 이름의 쓴 물이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노예근성을 봅니다. 첫 번째 노예근성은 ‘책임전가’입니다. 노예로 살다가 자유민이 되었지만 그들의 의식은 여전히 노예였습니다. 물이 없는 광야로 인도한 책임을 지도자인 모세가 져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두 번째 노예근성은 ‘조급함’입니다. 대체로 노예들은 압제자 앞에서는 고분고분하지만 압제자로부터 받은 수모와 원한을 동료들에게 풀어버립니다. 노예시절에는 자기통제력, 자기절제력을 훈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조급한 성향이 생활습관으로 자리 잡습니다. 세 번째 노예근성은 ‘대세와 환경에 쉽게 좌우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잘 될 때는 모세를 믿고 따랐지만, 잘 안 될 때에는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처럼 자립심과 자존감이 약한 군중들은 큰 소리를 내는 사람 쪽으로 몰립니다. 네 번째 노예근성은 ‘피해의식’입니다. 사흘 동안 물을 마시지 못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물 걱정을 하지 않았던 노예 시절을 동경했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마치 하나님 때문에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자유를 얻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노예근성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악한 뿌리가 남아있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계속 새롭게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고질병은 또다시 터져 나오고 맙니다. 바울 사도도 자신의 그 같은 모습을 보고는 탄식했습니다(롬 7:19, 24).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우리의 신분과 위치는 이미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여전히 옛 사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별 다를 게 없어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언젠가는 그 고질병이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치료된다는 것입니다(엡 1:3~6; 롬 8:28~30). 그래서 우리는 온전하게 될 그 날을 소망하면서 우리의 내면을 치료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둘째, 세상이 주는 물은 고작 쓴물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은 우리의 갈증을 영원히 해소하는 생수입니다. 마라 호수는 세상이 주는 좋은 것들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우리의 지친 영혼을 소생시키고 치료하고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렘 2:13, 18). 우리는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고 만족하게 하는 생수를 공급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모세가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25절上). 마라의 쓴 물보다도 더 지독한 물이 백성들의 마음에 고여 있음을 꿰뚫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불신앙을 치료하시기 위해 쓴 물을 단물로 바꾸시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적을 통해 백성들을 향한 당신의 열망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열망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습니다(25~26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모든 복을 내리십니다. 우리의 옛 사람, 쓴 뿌리, 노예근성들을 다 고치셔서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곤경 때문에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로 나아와 치료를 간청하는 자들에게 치료의 생수를 부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치료의 생수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고질병을 치료하는 생수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거기서 하나님의 법을 깨닫고 회개할 때 우리는 소생합니다. 바로 이것을 가르치시려고 백성들에게 수르 광야를 걷게 하셨고 마라의 쓴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는 하나님의 학교입니다.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엘림으로 인도하셨습니다(27절). 조금만 참고 행진하면 좋은 곳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하셨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의심하고 불평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심령을 치료하셨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것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지 맙시다. 시련의 때에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치료하십니다.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의의 길, 생명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샘터를 만나게 하셔서 그 샘터에서 우리로 안식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성도의 여정입니다. 영원한 생수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시면서 그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써 광야 같은 인생 여정 가운데 승리의 걸음을 날마다 힘차게 걷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전문

우리는 지난 주일에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자마자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크게 노래했던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그 다음 단락이 오늘 본문인데 조금 전의 장면과 정반대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돌변할 수 있을까?” 춤추며 노래했던 때가 불과 사흘 전이었습니다. 감동과 감격으로 어우러져서 찬송했고 지도자 모세를 따라 힘차게 전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실 물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사흘 동안 물을 얻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세요.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기진맥진해 있을 그때 호수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살았구나!”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호수로 뛰어들어 물을 마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쓴 물이었습니다. 물이 고여 썩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못을 “마라”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쓰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폭발해버렸습니다.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실제로는 하나님께 불평한 것입니다. “불기둥 구름기둥을 따라왔는데 고작 이런 곳이냐? 홍해를 가르시던 하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그들의 입술에는 감사와 찬송이 떠나버렸고 대신에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왔습니다.

 

신약성경 야고보서의 한 단락이 생각납니다.

 

(약 3:8-10)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야고보 사도는 그 당시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주 안타까웠습니다. “어떻게 너희가 그럴 수가 있느냐!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올 수 있느냐?”

 

그런데 이것이 성도라고 이름 붙여진 우리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것, 소중하지만 구원 이후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로는 광야를 지나게 하시고 마라의 쓴 물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얻게 되는 교훈, 두 가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는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노예로 살다가 자유를 얻은 지 불과 사나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그들은 하나님의 큰 위엄과 능력을 보았습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내리신 10가지 재앙을 목격했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그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홍해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건넜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충격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출애굽 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는 성숙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마음에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면서 깊이 내린 쓴 뿌리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이것을 노예근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그들 가운데 뿌리를 내린 노예근성들은 하루아침에 뿌리가 뽑혀질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출애굽기를 살펴보는 동안에 계속 확인하게 될 것인데 이 노예근성들이 수시로 터져 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노예근성들 가운데 네 가지가 두드러집니다.

 

1. 책임전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께 져야 할 책임을 모세 탓으로 돌렸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세 당신 때문에 우리가 지금 목말라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억압을 오랫동안 받은 백성들은 책임의식이 현저히 약화될 가능성이 큽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책임을 회피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가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은 지도자나 주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조상 탓, 부모 탓, 지도자 탓으로 돌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로 살다가 이제 해방되었습니다. 자유민이 되었습니다. 공동의 과제가 생겼을 때에는 함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난관을 만나면 그 난관을 헤쳐 나가기 위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자유민이 되었지만 그들의 의식은 여전히 노예였습니다. 물이 없는 광야로 인도한 책임을 지도자인 모세가 져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2. 조급함

 

노예로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고역은 혹독했지만 참았습니다. 애굽 사람들의 채찍 때문에 할 수 없이 참았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더 이상 채찍을 때릴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기분 내키는 대로 해도, 금방 웃다가 금방 화를 내어도, 조금 전에 찬송했다가 이내 불평을 쏟아내어도, 간섭하는 자, 제재하는 자가 없어졌습니다. 자유를 오용하여 쉽게 방종으로 흘렀습니다. 그 방종 가운데 하나가 조급함입니다.

 

그런데 이 조급함도 노예로 살면서 그들 가운데 깊이 뿌리를 내린 생활습관 가운데 하나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대체로 노예들은 자기들끼리 잘 싸웁니다. 압제자의 권세에는 대항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는 고분고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받은 수모와 원한을 같은 동료들에게 풀어버리기가 일쑤입니다. 모두 신분이 똑같은 노예들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앞부분에서 그런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모세가 말렸을 때 오히려 역효과가 났습니다. “네가 우리의 재판관이냐!” 

 

이처럼 노예시절에는 자기통제력, 자기절제력을 훈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억눌렀던 원한이나 불평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조급한 성향이 생활습관으로 자리 잡습니다. 

 

3. 대세와 환경에 쉽게 좌우됨

 

광야생활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 될 때는 모세를 믿고 떠받들었습니다. 잘 안 될 때에는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여기 수르 광야에서도 몇 사람에게서 불평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백성 전체에게로 펴졌습니다. 자립심과 자존감이 약한 군중들은 큰 소리를 내는 사람 쪽으로 몰립니다. 자기 철학이나 소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로 몰려다닙니다. 대세와 환경에 끌려다닙니다.

 

4. 부정적인 생각이 앞섬 

 

“피해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꾸 불길한 쪽으로 생각이 끌립니다. “지금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 옛날 노예 시절보다 더 힘들구나! 이렇게 고생할 바에는 차라리 먹을 것이 있고 물 걱정 하지 않았던 옛날이 낫지. 앞으로도 험난한 길이 계속 될 거야!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구나!”

 

박윤선 목사님은 그의 출애굽기 주석에서 이런 성향을 “악한 건망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들을 잊어버렸습니다. 노예로 살 때 받았던 고역과 수치심까지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기억은 애굽에서는 그래도 물은 실컷 마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흘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해 목이 타올랐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어버렸습니다. 오히려 바로의 노예로 살 때 물 걱정을 하지 않았던 시절을 동경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유를 얻었지만 여전히 그들 속에는 노예근성들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매사에 조급하고, 대세와 환경에 끌려다니고, 부정적인 생각이 앞서는 쓴 뿌리들이 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경은 우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 속에 쓴 뿌리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지 않으면 또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계속 새롭게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고질병은 또다시 터져 나오고 맙니다.

 

바울 사도도 자신의 그 같은 모습을 보고는 탄식했습니다.

 

(롬 7:19, 24)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접한 뒤 즉시 우리의 신분과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성령의 사람, 성도, 의인이 되었습니다. 땅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분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 신분에 걸맞은 사람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 우리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죄의 습성, 생활습관, 세상의 풍속 등 쓴 뿌리들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옛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이 옛 사람이 남아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와 예수 믿지 않는 자들 간에 별 차이가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세상 욕심에 빠지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쉽게 불평할 때가 많습니다. 잠시 곤란을 피하려고 거짓말도 하고 편법을 쓸 때도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찬송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싸우고 화내고 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예수 믿어도 소용없구나! 너희들을 보니까 예수 믿을 마음이 하나도 생기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을 듣고 우리는 고개를 쳐들고 변명해서는 안 됩니다. 백 번 옳은 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지금 그 고질병이 치료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고질병이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치료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명예를 걸고 우리를 치료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서 치료의 속도가 빠르고 느리고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예수님처럼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찬송했습니다.

 

(엡 1:3-6)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롬 8:28-30)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온전하게 될 그 날을 소망하면서 우리의 내면을 치료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둘째는 세상이 주는 물은 고작 쓴물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은 우리의 갈증을 영원히 해소하는 생수라는 것입니다. 

 

23절에 등장하는 “마라” 호수는 세상이 주는 좋은 것들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의 지친 영혼을 소생시키고 치료하고 만족하게 할 수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렘 2:13, 18)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18]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여러분의 심령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만족과 감사와 소망이 가득합니까? 성령의 열매를 가득 맺고 있습니까? 아니면 찌들려있습니까? 병들어있습니까? 후자의 상태라면 그 영혼의 갈증과 피곤과 고질병을 누가 해소해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주는 물은 여러분들을 결국 실망시키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주는 물을 찾아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신에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고 만족하게 하는 생수는 오직 하나님께서만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마라의 쓴 물을 생수로 바꾸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가르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 없는 광야를 걷게 하셨고 사흘 만에 발견한 호수의 물도 마실 수 없는 쓴 물임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국면에서 크게 돋보이는 것은 모세의 부르짖음입니다(25절 상반절).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가 이 곤경을 해결해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물론 부르짖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신앙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회복되는 가장 정상적인 길, 가장 빠른 길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간절히 구하는 것인데, 그 간구의 한 형태가 부르짖음입니다.

 

왜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을까요? 모세는 마라의 쓴 물보다도 더 지독한 물이 백성들의 마음에 고여 있음을 꿰뚫어보았습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온갖 악독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백성들을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설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불과 며칠 전에 보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냐?”라고 책망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즉시 응답하셨습니다.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갈증을 해소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이적의 근본 목적은 그들의 갈증을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불신앙을 치료하시려고 하셨습니다.

 

다시 25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셔서 그것을 물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쓴 물이 단물로 바뀐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때문임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르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것, 마라의 쓴 물을 경험하게 하신 것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 믿음의 시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들의 불신앙이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신 최종적인 목적은 그들의 불신앙을 드러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습니다(25절 하반절). 

 

물론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는 얼마 후에 시내산에서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법도와 율례를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와 목적을 하나님께서 친히 밝히셨습니다(26절). 백성들의 영혼은 물론 육체까지 건강해지도록 법도와 율례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밝히셨습니다.

 

“물은 생명이다”라는 구호가 새겨진 일회용 종이컵이 있습니다. 그 구호처럼 사람은 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사막에서 물을 마시지 않고 사흘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별 없을 것입니다. 상식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상식을 뛰어넘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물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물을 마시지 않은 채 사흘이 아니라 사십 일을 걸어도 그것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광야를 일구어 낙원을 건설하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신 일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고 친히 맹세하심으로써 뽑아내신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물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죽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 즉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을 때 영적으로 병들어 죽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모든 복을 내리십니다. 옛 사람, 쓴 뿌리, 노예근성들을 다 고치셔서 새롭게 하십니다.

 

물론 신자들도 병에 걸려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질병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애썼다면,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면 그는 질병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때가 차서 죽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질병이 없는 천국으로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온전한 치료를 위해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자에게도 마찬가집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병들어 죽는 것, 겉모습일 따름입니다. 죽음의 근본 원인이 질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셨기 때문에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치료받을 수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시든지, 아니면 완치 받을 곳으로 데려가시든지, 이 둘 중의 하나 때문에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살펴보실 때 우선적으로 보시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지 순종하지 않는지를 보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는 하나님 말씀의 순종 여부입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우리가 물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들이 부족해서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그게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죄입니다. 

 

혹 여러분이 지금 영적인 나태와 침체를 겪고 있습니까? 곤경 가운데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곤경 때문에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대신에 그 곤경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것 하나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모세처럼 부르짖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치료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자기의 이름을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부르게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약속하십니다. 자기에게로 나아와 치료를 간청하는 자들에게 치료의 생수를 부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치료의 생수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고질병을 치료하는 생수입니다. 그 생수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법을 깨닫고 우리의 죄를 회개할 때 우리는 소생합니다. 우리의 심령은 물론 육체도 건강을 되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을 가르치시려고 수르 광야를 걷게 하셨고 마라의 쓴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치료의 생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데 그 생수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광야가 우리에게 있어야 우리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물 없는 사막을 걸어봐야 우리가 별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세상이 주는 물이 소용없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게 됩니다. 그럴 때 생수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고 우리의 믿음이 자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에게 광야가 필요하고 마라의 쓴 물이 필요합니다. 광야는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는 하나님의 학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광야 학교에서 받는 훈련과 연단이 무척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광야를 빨리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게 안 되니까 옛 사람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종종 터져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40년의 광야생활에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합리화하거나 두둔해서는 안 됩니다. 하루빨리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답게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모세처럼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걸 하나님께서 간절히 바라십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27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엘림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단물이 된 마라 호수보다 백배나 좋은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조금만 참고 행진하면 좋은 곳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이미 예비하셨습니다. 하루만 더 참고 걸었다면 풍성한 샘터, 휴식의 장소, 엘림에 더 빨리 이르렀을 터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중에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의심했습니다. 불평했습니다. 그랬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심령을 치료하셨습니다. 엘림으로 인도하여 푹 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크고 놀랍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 받은 자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것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지 맙시다. 언제까지 시련의 광야를 걸어야 하느냐고 불평하지 맙시다. 그 시련의 때에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세처럼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령을 치료하십니다. 새롭게 하십니다.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의의 길, 생명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배하신 샘터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 샘터에서 우리로 안식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성도의 여정입니다.

 

 

영원한 생수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시면서 그 말씀을 먹고 마심으로써 광야 같은 인생 여정 가운데 승리의 걸음을 날마다 힘차게 걸으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끝) 찬송 28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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