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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328892444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18~25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19-04-07

(고전 1:18-25, 갈 6:14) 성도의 자랑, 십자가

2019-04-07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요약

  우리는 자신이 존귀한 이유를 우리에게 있는 자랑거리에서 찾습니다. 성경은 자랑을 허탄한 자랑과 참된 자랑으로 나눕니다(약 4:14~16). 허탄한 자랑이란 육체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를 자랑하려면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있는 허탄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 3:4~8). 그렇다면 무엇이 참된 자랑일까요? 바울은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고전 1:31). 자랑의 토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갈 6:14). 십자가 없는 자랑은 공허한 자랑이며 무너질 자랑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랑이 허탄한 자랑인지 참된 자랑인지는, 자랑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가 아닌가에 따라 구별됩니다.

  바울은 사람을 멸망하는 자와 구원을 받는 자로 나눕니다(고전 1:18). 둘 사이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자들은 멸망할 자들, 다시 말해서 구원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반대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들은 이미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절 기간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는가?”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결정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23~24절).

 

  요즘 우리 주변에서 십자가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한 동안 십자가는 가장 소름끼치는 물건이었습니다. 사람이 고안해낼 수 있는 가장 야만스런 사형도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구주라고 전했습니다. 때문에 로마인들은 십자가를 전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을 무시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저주를 상징하는 도구였기에, 그들은 더더욱 십자가를 혐오했습니다(신 21:23). 그들은 로마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이스라엘의 옛 영광을 회복할 메시아를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하니, 유대인들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기독교를 고작 예수를 추종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모여 자기들끼리 위로를 나누는 무력한 종교집단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앞장서서 그리스도인들을 멸시하고 핍박했습니다. 반면 헬라인들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들의 지혜를 뽐냈습니다. 그들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만을 인정했습니다. 자기들의 판단 기준으로는 도저히 예수를 신으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무식한 자들이 믿는 종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데에 인생을 던졌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만이 참 그리스도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하지 못한 죄인들을 심판하심으로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죄인들을 용서하셔야 합니다. 죄인들을 향하여 반드시 내려져야 할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가 동시에 내려졌는데 그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롬 3:23~26; 5:8~10). 그러므로 십자가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가장 분명하게 계시되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이 부어진다는 것입니다(고전 1:30~31). 뿐만 아니라 성도는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현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인 부활을 경험합니다(갈 2:20).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과 활동의 기초에 항상 십자가를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최절정인 십자가와 무관한 우리의 노력은 허탄한 자랑을 위해 수고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에 피 묻은 십자가가 증거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참된 지혜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십자가는 믿어야 할 기독교 복음의 핵심일 뿐 아니라, 살아내어야 할 삶의 기초요 목적입니다. 그래야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하면 반드시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축하는 공동체입니다. 남은 생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전문

여러분에게 최고로 자랑할 것 한 가지만 얘기하라고 하면 무엇을 자랑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이 각박한 세상에서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자기에게 뭔가 내놓을만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적인 용어로 자존감이라고 합니다. 

 

제법 유명한 배우들이 우울증 때문에 자살한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우울증이 자존감의 상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존감 없이 버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불행한 일이 몰아쳐도 “그래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자존감의 뿌리가 뽑히지 않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버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존감의 뿌리가 심각하게 손상되면 우울증에 걸리고 그 결과로 자살까지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존감이란 말 그대로 자기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존귀한 자라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가 다름 아닌 자랑거리들입니다. 그 자랑거리들이 있기 때문에 자기는 그래도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요즘 여러분들의 관심이 어디에 집중되어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과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누었습니까? 그 관심과 대화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던 실체가 무엇이었습니까? 어쩌면 자랑일 것입니다.

 

성경은 자랑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허탄한 자랑과 참된 자랑입니다.

 

(약 4:14-16)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허탄한 자랑”이란 기초가 허약한 자랑을 뜻합니다. 와우 아파트나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린 것은 허약한 기초와 부실공사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허탄한 자랑은 무너집니다. 무너지기 전이라도 이런 자랑은 하고 나면 허탈해집니다.

 

허탄한 자랑을 하는 것을 성경은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 몸짱, 얼짱을 자랑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자신도 육체를 자랑하려면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빌 3:4-6)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신학박사였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학문과 지식, 가문과 경력 등 자랑거리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겨서 내버렸다고 고백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허탄한 자랑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성도에게 자랑거리가 있다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31 참고). 

 

이것을 갈라디아서 6:14에서는 다르게 표현합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랑의 토대(기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무관한 자랑은 허탄한 자랑입니다. 십자가 없는 자랑은 공허한 자랑이며 무너질 자랑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자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은근히 자기를 자랑합니다. 드러내지는 않을지라도 속으로는 자기 자랑의 뿌리가 있습니다. 남편을 자랑하고 아내를 자랑하고 자식을 자랑합니다. 집안이나 가문을 자랑합니다. 외모나 건강을 자랑합니다. 학벌이나 지식을 자랑합니다. 직업이나 직급이나 권세를 자랑합니다. 과거의 경험도 자랑합니다. 영적인 경험이나 은사도 자랑합니다. 신앙의 연륜이나 교회직분도 자랑합니다. 

 

그런데 그 자랑이 허탄한 자랑일 수도 있고 참된 자랑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자랑의 기초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는 자랑인가 아닌가?” 오늘 본문을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허탄한 자랑과 참 자랑이 구별됩니다.

 

고전 1:18을 보세요. 바울은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멸망하는 자와 구원을 받는 자로 나눕니다. 그런데 무엇이 멸망과 구원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까? 이어지는 본문은 그것이 십자가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자들은 현재적인 상태로 봐서 멸망할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반대로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들은 이미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실제로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이야말로 사순절 기간에 우리가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십자가를 최고로 자랑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그 이유를 명확하게 밝힙니다. 십자가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최고의 자랑거리가 되는 이유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결정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23-24절). 그래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의 도’였습니다(17-18절).

 

요즘 우리 주변에서 십자가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십자가는 평화와 사랑의 상징이 되었고 인기 상표로까지 변모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자들도 십자가 문양의 액세서리를 하고 다닙니다. 십자가가 멋있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당시뿐 아니라 초대교회 이후 한 동안 십자가는 가장 소름끼치는 물건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이 고안해낼 수 있는 가장 야만스런 사형도구였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세계를 제패하고 있던 시절에 십자가 사형제도는 최고의 수치와 고문과 굴욕이 결합된 가장 극악한 사형제도였을 뿐 아니라 로마의 권력에 항거하는 자들을 근절하기 위해 사용했던 가장 효과적인 범죄억제수단이었습니다.

 

중범죄자들을 벌거벗기고 채찍으로 때려서 반쯤 죽인 후에 십자가를 지고 거리를 행진하게 하여 처형장에 이르면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매답니다. 거기에 매달려서 오랜 시간 고통하며 서서히 죽어갑니다. 군중들은 그 광경을 차마 보지 못하여 눈을 돌렸다고 합니다. 그게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므로 1세기 당시 로마인들에게 십자가는 자랑거리일 수가 없었습니다. 최고의 수치거리였습니다. 18절에서 말한 대로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바로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요 구주라고 전했습니다. 십자가의 사형제도를 익히 알고 있던 로마인들이 어떻게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로마인들은 십자가를 전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을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고 무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더더욱 십자가를 혐오했습니다.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성경의 한 구절 때문입니다. 

 

(신 21:23)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나무(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느냐? 메시아라면 다윗처럼 열방을 제압하는 강력한 왕이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정권을 무너뜨리고 다시 이스라엘의 옛 영광을 회복할 메시아를 고대했습니다. 그런 메시야가 오시면 놀라운 이적(표적)들을 베풀 것인데 그 이적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온 열방 중에 최고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라고 했으니 유대인들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예수가 와서 한 일이란 3년 동안 몇 가지 이적을 통해 군중들의 인기를 끌다가 사라진 이단 종파의 지도자로 여겼습니다. “예수는 결국 십자가에 달려 무력하게 죽지 않았느냐?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달라진 게 있느냐?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지 않느냐? 기독교는 고작 예수를 추종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모여 자기들끼리 위로를 나누는 정도의 무력한 종교집단이 아니냐? 나무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를 메시아로 착각하는 무리들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이처럼 유대인들은 자기 동족들 중에 저렇게 어리석은 자들이 있는 것을 보고 창피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앞장서서 그리스도인들을 멸시하고 핍박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메시아를 상상하는 것만 해도 하나님께 불경죄를 짓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헬라인들은 자기들의 지혜를 뽐냈습니다. 그들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만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신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견해를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자기들의 판단 기준으로는 도저히 예수를 신으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무식한 자들이 믿는 종교로 생각했습니다.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인들, 가장 지혜로운 자들이라고 자랑했던 헬라인들,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고집했던 유대인들, 다시 말해서 그 당시 대다수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은 정말 우스꽝스럽고 미련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메시아”라는 어구만큼 불합리한 조합은 없습니다. 마치 “빈약한 몸짱, 바보 박사, 권투시합에서 1회전에 KO 패한 승자, 마라톤에서 중도에 기권한 완주자”라는 말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말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메시아(구세주)”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불합리하고 미련한 어구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의 생을 송두리째 던졌습니다. 이유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만이 참 그리스도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왜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모든 종교에는 신 개념이 있습니다. 어느 종교든지 신을 설정할 때 두 가지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성품은 절대적인 거룩과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모든 종교는 자기들이 믿는 신이 이런 성품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 외에 어떤 종교도 이 두 가지 성품을 조화롭게 설명하거나 증거 하지는 못합니다.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은 이 두 가지 성품, 절대적인 거룩과 절대적인 사랑을 행동으로 확증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지 못한 죄인들을 심판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용서하셔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 인간으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죄인들을 향하여 반드시 내려져야 할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가 동시에 내려졌는데 그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로마서의 두 부분이 그것을 잘 설명합니다.

 

(롬 3:23-26)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롬 5:8-10)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십자가에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가장 분명하게 계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 십자가에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속죄의 근거가 되는 희생제물의 피에 관해 자기 백성들인 유대인들에게 말씀했지만 그들은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할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고난의 종으로,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흠 없는 어린양으로 오실 메시아를 예고하셨지만 유대인들은 그런 메시아를 고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메시아는 사람들이 고안할 수 없는 하나님의 순전한 계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조작된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집행하신 유일무이한 구원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를 놀라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이 부어진다는 것에 더 큰 놀라움이 있습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본문에 이어지는 단락 중에 1:30-31을 보세요.

 

(고전 1:30-31)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이 외에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성경의 증언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는 현재의 삶에서도 생생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 일어난 부활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부활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확신하며 노래합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성도 여러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계시의 최절정이요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요한 사도의 말대로 오직 우리 죄를 지고 죽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자랑한다는 원어의 뜻을 존 스토트 목사님은 “자랑한다, 영광으로 여긴다, 신뢰한다, 기뻐한다, 한껏 즐긴다, 집중한다, 높인다, 그것을 위해 산다.”라는 여러 가지의 뜻이 농축되어 있다고 해설했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자나 깨나 우리의 생각이 온통 십자가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보고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의 시간과 정력을 바쳐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활동의 기초에 항상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 이 예배의 자리로 담대히 나아오게 하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바라보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므로 가족들과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일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의 최절정인 십자가와 무관하다면 그것은 헛것입니다. 허탄한 자랑을 위해 수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공부와 지식에 결국 피 묻은 십자가가 증거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활동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참된 지혜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십자가는 믿어야 할 기독교 복음의 핵심일 뿐 아니라 살아내어야 할 삶의 기초요 목적입니다. 그래야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고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하면 반드시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오늘, 사순절 가운데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금주도 십자가를 자랑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축하는 공동체입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한 주간과 남은 생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끝) 찬송가 15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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