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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316340290
    성경본문
    베드로후서 1:3~11
    설교자
    박우택 목사
    설교일
    2019-02-03

 

(벧후 1:3-11) 성도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2019-02-03 주일설교 / 박우택 목사

 

 

우리 교회의 올해 표어가 세상을 밝히는 우리 가정 우리 교회입니다. 누가 세상을 밝혀야 하고, 어떻게 밝혀야 합니까? 세상을 밝힘으로 어떤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까요? 세상을 밝히는 주체는 우리 가정 우리 교회이지만 우리 가정과 교회 안에 누가 해야 할까요? 이 일은 성도 개개인이 해야 합니다. 그러면 개개인이 무엇으로 세상을 밝힐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말씀의 본질과 이 말씀을 믿음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세상이 될 것인지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성도가 되게 하고, 그 성도가 속한 가정과 사회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 곧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 모든 사람이 서로를 배려하고 어떤 형태의 기준으로도 차별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고, 배신과 거짓말이 아니라 정직과 믿음과 성실이 통용되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밝혀야 할 이유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만들어가려면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만들어가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속해 주셨고 그들에게 이 일을 위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리고 성도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성경은 이 주제를 가장 많이 다양한 문학 장르와 다양한 논리를 설명합니다. 오늘은 사도 베드로가 쓴 베드로후서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베드로가 이 주제를 어떤 논리로 설득하는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당시 성도들은 그들이 믿는 믿음에 대해 회의하거나 의심하기도 하고, 주님이 재림하셔서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여신다는 믿음이 없어 윤리적으로 타락해 갔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데는 당시 로마의 네로 황제(재위 주후 54-68) 치하에서 핍박이 많았고 이 틈을 타 거짓 선지자와 교사들이 들어와 성도들을 미혹하여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 성도가 믿음을 지키며 주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는 성도들의 믿음을 세우고 거짓 선지자의 교훈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가르치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살펴보면서 성도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성도는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능력을 받은 자이기에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자로서 그에 합당한 인격과 삶의 특징을 드러내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 성도는 어떤 사람인지, 두 번째로는 성도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세 번째로는 이러한 성도에게 주시는 위로와 복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성도는 어떤 사람인가(벧후 1:3-4)?

 

 

첫 번째로 우리 성도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당시 성도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하기 전에 먼저 성도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의 신분에 대한 정체성(identity)을 확인시키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3을 보십시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여기에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라는 말은 원문과 약간 뉘앙스가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원문은 그의 신적인 능력으로’(της θειας δυναμεως αυτου)입니다. 이 뜻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령을 보내어 주심으로 그 구원을 적용해 주시기 위하여 행하신 모든 신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가 받은 은혜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생명이라는 말은 아주 익숙한 표현인데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7:3을 보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리고 경건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전반적인 활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경건이 무엇을 말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윌리암 로오(William Law, 1686-1761)는 그의 유명한 책 경건한 삶을 위하여(A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라고 하는 책에서 정의한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경건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인데 시간 사용문제, 재물의 사용문제, 기도, 겸손, 순종 등으로 확대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1:27에 야고보가 정의한 내용도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여러분! 경건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신적인 능력으로 우리를 죄악 가운데 구원하심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신적인 능력으로 구원해 주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는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중요한 DNA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베드로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주셨다고 했습니다(벧후 1:3).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불러주신 것을 앎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것을 어떻게 알게 될까요? 그것은 믿음이라는 안경입니다. 믿음이라는 안경을 끼면 하나님이 은혜로 불러주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알게 되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작용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베드로후서 1:4에서는 우리에게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약속이 이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지만 편 전체 문맥에서 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현재 이 세상에서 믿음이라는 창을 통하여 보고 경험하는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와 우리 눈을 통하여 분명하게 보게 될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특히 사도 베드로는 이 책에서 강조하는 하나님 나라는 지금 현재 이 세상에서 누리고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를 포함하지만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육체가 변화되어 썩지 않는 몸이 된다는데 더 큰 강조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이것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성도들의 궁극적인 믿음의 목표입니다. 우리가 이 목표들을 이해하게 될 때 원수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공격해도 이길 수 있는 저항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주셨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과 지극히 보배로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을 왜 주셨을까요? 그 목적은 베드로후서 1: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에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는 번역이 적절하지 못합니다. ‘그 목적은 이들을 통해라고 해야 합니다. ‘이들은앞에서 언급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과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말합니다. 왜 이것들을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그것은 이 말씀에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벧후 1:4). 여기에 두 가지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정욕 때문에 세상에 썩어질 것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성한 성품은 원문의 의미를 바르게 번역하지 못했습니다. 개역한글판에 있는 것처럼 신의 성품이라고 하든지, 공동번역처럼 하나님의 본성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그리고 참여하는 자’(koinwno,j)라는 말은 우리가 교제, 공유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코이노니아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신적인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과 보배롭고 큰 약속을 주신 하나의 목적은 악한 욕망에 지배를 받아 세상의 잘못된 가치관에 따라 살지 말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자의 아주 중요한 신분적 기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신적인 능력을 통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과 보배로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모든 성도가 받은 신분적 기초입니다.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으로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는 생명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경건에 속한 것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하는 자입니다.

 

 

2. 성도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벧후 1:5-10)?

 

 

두 번째로 성도가 생명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경건에 속한 것을 받은 자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하는 자라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베드로후서 1:5-7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여기에 그러므로’(αυτο τουτο)라는 말은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주셨고, 지극히 보배롭고 큰 약속을 주심으로 세상에 썩어질 것을 피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되었다면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할 삶의 결과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그 삶은 어떤 것일까요? 성도라고 한다면 믿음에다가 아주 익숙한 일곱 가지의 삶의 덕목을 더하라고 했습니다. 그 덕목은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입니다. 이 덕목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자라면 반드시 나타나야 할 인격과 삶의 특징들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성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한 자로 그에 합당한 인격과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용어를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더하라라는 말과 더욱 힘써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더하다’(επιχορηγεω)라는 말은 연극에서 주제를 중심으로 전체적인 그림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필요한 부분을 추가로 보충해 준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당시 헬라 세계에서 성행한 연극에서 극의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데 필요한 의상과 무대장치 그리고 여러 소도구들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믿음에 합당한 인격과 삶의 덕목들을 추가로 보충해 줄 때 성도의 믿음이 돋보이고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더욱 힘써공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믿음이 돋보이게 하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 믿음에 합당한 인격과 삶이 더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을 들을 때 아니,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왜 이러한 일들을 추가로 더해야 하는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받는가?”라는 의문이 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저절로 삶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삶이 변하는 문제는 인간의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문제를 신학적인 용어로 정의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선택하시고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은 무조건적이지만 그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누리는 문제는 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언약에 근거해 구원받은 사람은 마땅히 조건적인 성격의 책임을 이행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하는 자로서 합당한 인격과 삶을 담음으로 믿음을 돋보이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실제로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받았고, 악한 욕망에 지배를 받는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자기 스스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노력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인 아버지의 성품을 공유하는 자로서 삶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혹시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어서 사도 베드로는 성도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인격과 삶의 특징들이 나타나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8을 보십시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여기에서 부지런히 노력하여 믿음에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을 더하는 일을 가리켜 열매 맺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이러한 열매들을 맺기 위하여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사도 베드로는 그 이유를 베드로후서 1:9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맹인이라는 말과 멀리 보지 못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맹인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멀리 보지 못한다라는 말은 가까이 있는 것은 보고 멀리 있는 것은 보지 못하는 근시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멀리 보아야 할 것이나 반드시 보아야 할 앞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들어간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될 완전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세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 자기 코앞에 있는 일시적이고 현재적인 것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에서 잠시 주어지는 세상의 보상이나 행복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이 본문에 있는 표현대로 한다면 악하고 이기적인 욕구에 지배를 받아 세상의 가치관에 따른 것만 바라볼 뿐이지 지금 순종함으로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인 하나님 나라와 재림으로 이루어질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근시안적인 사고와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미래에 우리가 이 세상에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들어가게 될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지금 현재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마땅히 신자로서 맺어야 할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시야를 멀리 바라보십시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러한 미래를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과 함께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지적은 참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믿음에 합당한 삶의 덕목들이 나타나지 못하는 이유를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나 멀리 바라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삶을 사는 사람과 같이 미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동일한 문맥에서 앞의 일도 모르지만 뒤의 일도 모르기 때문에 삶의 열매들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부지런히 노력하여 성도라면 반드시 드러나야 할 인격과 삶의 특징들을 드러내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앞의 일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도 알지 못합니다. 과거에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사건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지금은 멀리 보일는지 모르지만 말씀을 순종함으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과 주의 재림으로 이루신 영광스러운 그 나라를 바라보십시오. 성도의 과거와 미래를 보는 사람을 가리켜 베드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어떤 사람이어야 합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한 자로서 합당한 인격과 삶의 특징을 드러내는 자이어야 합니다. 성도는 믿음의 기초 위에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3. 성도가 받게 될 복은 무엇인가?

 

 

세 번째로 우리 성도가 될 복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성도는 과거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받았고,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하는 자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현재 이 세상에서 부지런히 노력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한 자로서 하나님을 닮은 인격과 삶의 특징을 드러냄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것이 없는 사람은 주님이 영광중에 재림하셔서 선악 간에 심판하실 미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과거에 주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신 십자가의 사건을 잊어버린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11에서 베드로후서 1:3부터 설명해 온 논지의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이 약속은 우리 성도가 이 세상에서 선한 삶을 살아야 할 동기를 부여해 주는 감동적인 진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먼 미래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 임해 있는 하나님 나라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지금 이 세상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은혜와 복을 누립니다. 동시에 주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영원한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넉넉히 들어가는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거룩하고 경건한 삶으로 자신을 가꾸게 되어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10-13을 보십시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면 지금까지 사도 베드로가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보여주며, 서로 연관시키는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성도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세상을 밝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비한 그 영광스러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자칭 성도라 하는 자나 제 과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삶의 양태를 보면 교회당 출입은 하고 성도의 행세는 하면서도 윤리의식이 없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없고, 맡은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거리를 대면서 책임을 회피합니다. 교묘하게 법망을 피하면서 세금을 포탈하기도 합니다. 운전을 할 때 교통법규를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차들이 부득이 끼어들려고 하면 양보하지 않고 배려하지 않습니다. 세종시 교통 안내 표지판에 양보와 배려, 3초면 충분합니다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3초를 견디지 못하고 양보하거나 배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탐욕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과 위선으로 위장하여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와해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고통하는 사람을 보아도 동정심이 없거나 오히려 그것을 약점 삼아 목을 조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가족이나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 중에 우애있게 지내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을 지난 성도가 세상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밝힐 뿐만 아니라 성경의 이상이 실현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이 일의 주체가 되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전하는 성도의 인격과 삶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 새가족 가운데 어떤 분에게 어떻게 이 교회에 오시게 되었는지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대답하기를 여러 사람들로부터 교회에 가자고 전도를 받았으나 가지 않았는데 그분을 보니 다른 사람과 달라서 교회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누구일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주전 384-322)가 쓴 수사학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있도록 설득하는 일에는 세 가지 요소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비교적 헬라어 전문용어로 많이 알려진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입니다. ‘에토스는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삶입니다. 여기에서 영어의 윤리’, ‘도덕을 의미하는 에틱스’(ethics)가 왔습니다. ‘파토스는 듣는 사람이 전하는 자의 말에 공감하도록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로고스는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논리적으로’(logical) 설득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 가지가 다 중요하지만 어떤 말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데 가장 중요한 설득의 수단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가진 자요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한 자로서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가 믿는 복음을 전하여 믿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설득의 수단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장 문제가 되는 가장 중요한 설득의 수단이 인격과 삶이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비논리적으로 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과 경건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과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한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성품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그 사실 자체만 붙들지 말고 이 세상에서 부지런히 노력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한 자로서 인격과 삶의 특징을 드러내며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의 믿음을 돋보이게 만들고, 우리 믿음이 천박해 보이지 않고 세상을 밝히는 삶으로, 더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특히 과거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을 잊어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들어가게 될 영원한 나라를 소유할 복된 미래를 보는 성도는 세상에 살지만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밝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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