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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255216717
    본문말씀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성경본문
    로마서 5:12~21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18-02-11


<로마서강해 11>

(5:12-21) 그리스도께서 여신 새로운 세계

2018-02-11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라고 시작합니다. 앞 문단의 결론이라는 뜻입니다. 지난주일 보았던 5:1-11의 내용은 구원 받은 성도가 어떤 복을 누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 즉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게 되었으며 고난 가운데서도 미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을 확신하며 노래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 개인은 물론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된다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복수 일인칭 대명사를 써서 표현했습니다. 바울이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복을 받은 우리는 정말 행복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복이 그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복이 성도와 교회를 넘어서 온 인류에게로 넘쳐흐른다고 바울은 논증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다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복이 온 세계에 미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간단히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세계를 여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이 그리스도께서 여신 새로운 세계입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새로운 세계를 여셔야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죽음과 싸워온 역사입니다. 인류에게 있어서 최대의 적이자 공동의 적은 죽음입니다. 죽지 않으려고 죽도록 싸운 역사가 인류의 역사입니다. 세계의 빅뉴스를 보세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죽음에 항거했다는 뉴스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래도 죽음을 극복하지는 못했다는 뉴스입니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목을 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핵무기가 자기들의 안전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하는 것,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 파생되는 죽음은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살고자 몸부림치는 곳에 죽음이 들어와 자리 잡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 죽음에 포로가 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두 죽음의 세상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요즈음 생명공학이 대단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중국에서 복제 원숭이를 만들었다는 보도가 났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복제 인간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암에 걸린 장기를 복제 장기로 대체하여 인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암에 걸리게 하거나 장애를 유발하는 유전인자를 미리 발견하여 그 유전인자를 건강한 유전인자로 바꿀 수 있는 날이 곧 실현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강한 자만이 살게 될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과학의 발전도 죽음과 싸우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죽음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 몰려올 때 인간의 지식과 기술은 속수무책입니다. 죽음의 세력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죽음의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잠시 지연할 수는 있지만 죽음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소유가 죽음이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폭군처럼 권세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사망이 왕 노릇한다고 표현합니다(14). 12절에는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르렀다는 헬라어 동사의 뜻은 통과했다, 번졌다, 퍼졌다라는 뜻입니다. 연탄가스가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 방에서 잠자는 자들은 질식하여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망의 권세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사람을 질식하게 하는 독가스와 같습니다.

 

그러면 사망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을까요? 죄 때문이라고 바울은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12).” 그런데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왔습니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여기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아담이 어겼습니다. 그 불순종이 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죄를 원죄라고 부릅니다.

 

아담이 범한 죄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이 말씀대로 범죄한 아담은 죽었습니다. 먼저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에덴에서 추방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 뜻입니다. 육체적으로도 점점 노쇠하여 갔고 결국 죽어서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담에게만 사망이 왕 노릇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합니다(12절 하). 한 사람 아담을 통해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 아담으로 인해 죄와 사망이 온 세상에 퍼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12절이 밝히고 있는 것은 인류 타락의 과정입니다. 3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첫 단계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다음 단계는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마지막 단계는 지금도 이 세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바와 같이 죄와 죽음의 영향력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에 종속되고 그 결과로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생각해 보면 억울한 것 같습니다. 공의롭지 못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은 각자 자기가 범한 죄 때문이라고 바울이 지적합니다. 12절을 다시 보세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실제로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것, 당연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율법이 없었던 시대에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그때는 죄목을 분명하게 규정한 성문화된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인 줄을 몰랐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가 14절에 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율법이 없었던 시대에)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죽었다면 그들도 역시 죄를 지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율법이 주어지기 전의 사람들이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했다.”는 것은 그들이 아담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직접 받은 것은 아니며 그래서 그들의 범죄는 아담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직접적으로 불순종한 죄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무죄한 것은 아닙니다. 죄로 드러나든지 않든지 죄는 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죄인은 반드시 죽음으로 자기의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결입니다.

 

여기까지 바울이 논증한 것은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온 세상이 죄와 사망의 통치 아래에 놓였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죄와 사망의 보편적 통치 환경 가운데 태어나 그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환경에서 벗어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의 보편적 통치에 순응하여 결국 범죄하고 그 범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와 이 세상은 죽음으로 그냥 끝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한 사람 아담을 대신하여 이 세상에 생명의 통치를 가지고 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이제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14절 마지막에서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을 선포합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오실 자란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모형이란 표상, 모델, 패턴이라는 뜻입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닮은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선언,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서로 닮은 점이 있다.”는 선언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가 서로 비교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바울은 오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주 대담하게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리게 된 새로운 세계에 대해 명확하게 논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선적으로 오해의 소지를 없애려고 노력합니다. 15절 서두에 그러나로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를 부각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비교는 질적으로 상반되는 비교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카운터파트너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는 다윗과 골리앗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신이 납니다. 그때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붙었습니다. 양쪽 군사들이 서로 맞붙기 전에 먼저 각 진영에서 대표 한 사람이 나와서 싸움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쪽에서는 다윗이 나왔습니다. 블레셋 쪽에서는 골리앗 장군이 이미 나와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이 일격에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을 이겼습니다.

 

이때 다윗과 골리앗은 서로 카운터파트너입니다. 형식에 있어서는 각 진영의 대표라는 점에서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서로 대적의 관계입니다. 이렇게 형식에 있어서는 서로 비교의 대상이지만 내용에 있어서 서로 상반된 관계에 있을 때 그 양자를 카운터파트너라고 합니다. 한글로 번역하면 대응관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대응관계에 있습니까? 15절 이하 21절까지의 말씀 전체가 아담과 예수님의 대응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18: “한 범죄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죄를 뜻합니다. 대신에 한 의로운 행위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일컫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의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19: 한 사람,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결과: 세상에 죄가 들어오도록 문이 열렸습니다. 그 문으로 죄가 들어와 많은 사람(전 인류)이 범죄하게 되었습니다(죄의 전가). 그로 인해 하나님께 정죄 받고, 심판받아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한 결과: 많은 사람에게 죄 용서를 받는 은혜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 문 안으로 들어선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고, 의인이 됩니다. 영생하게 됩니다.

21: 사람이 아담에 속한 채로 머물러있으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옛 시대, 옛 세계에 속한 옛 사람의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대신에 아담에게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소속을 바꾼 자들은 죄와 사망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고 은혜의 통치 안으로 들어갑니다. 넘치는 은혜로 인해 영생에 이릅니다. 이처럼 새 시대, 새로운 세계에 속한 새 사람은 은총의 통치로 인해 죄를 극복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새로운 능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19절 마지막에서 의인이 된다.”는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의로써 통치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17절 하반절: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구원받은 성도도 죄와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처럼 왕 노릇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대조입니까? 그러므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는 서로 대응관계에 있는 두 인류의 대표들입니다. 아담은 옛 인류의 대표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새 인류의 대표입니다. 아담은 옛 세계의 대표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새 세계의 대표입니다. 아담 안에서 죄와 죽음으로 절망하던 세계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총과 생명의 세계가 침입해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은총과 생명의 새로운 세계는 죄와 죽음의 옛 세계를 점령해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전이요 확장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속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속하셨습니까? 새로운 세계를 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아담에게 속한 채로 머물러 있습니까?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누구에게 속했느냐에 따라서 그 운명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대표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지난 금요일부터 동계올림픽이 우리나라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어제 쇼트트랙 남자 1500미터 경기에서 우리나라의 임효준 선수가 여러 나라들의 선수들을 제치고 금메달을 땄습니다. 물론 임효준 선수가 우승했습니다. 하지만 임효준 선수가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뛰었기 때문에 그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요 우리나라의 승리였습니다. 이게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이 대표성의 원리는 우리의 실생활에서도 자주 경험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정치현실을 보면서 대통령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절감합니다. 대통령 한 사람이 잘못된 생각을 하고 과욕을 부릴 때 우리나라 전체가 휘청거립니다. 반대로 대통령 한 사람이 바르게 생각하고 사심 없이 정치할 때 우리나라 전체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물론 전 세계적인 불황이나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로 인해 큰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제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써 국민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을 때 국난을 극복할 뿐 아니라 그로 인해 민족의 긍지와 힘이 비축됩니다. 그래서 대통령 한 사람이 정말 중요한데 이것도 대표성의 원리에 속합니다.

 

정치에 있어서만 지도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업도 마찬가지고 학교도 마찬가집니다. 어느 기관이든 그 기관의 성쇠는 그 기관의 대표들에게 달려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일반은총적인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어느 기관에 복을 내리시겠습니까? 세상기관도 하나님의 통치영역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기관의 대표들이 착실하고 공정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그 기관에 은혜를 베푸시지 않겠습니까?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왕이 나라를 다스리면 그때 나라의 형편이 좋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왕을 통해 나라 전체에 복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한 왕이 등장하여 우상을 섬기고 마음대로 정치할 때 나라가 낭패를 당했습니다. 결국 타국에 의해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담임목사가 중요합니다. 교역자가 중요합니다. 당회가 중요합니다. 안수집사와 권사가 중요합니다. 교회학교의 교사가 중요합니다. 각 지회의 지회장이 중요합니다. 제직회의 위원장들이 중요합니다. 목장의 목자와 부목자가 중요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기 직무에 충성할 때 목장이 살고 위원회가 살고 지회가 살고 교회학교가 살고 교회 전체가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번의 중직자 선거가 정말 중요합니다.

 

가정도 마찬가집니다.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가장입니다. 가정에서 가장이 영적 지도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으면서 그 가정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가장을 통해 그 가문에 복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예수 믿지 않으면 아내가 믿음의 가장이 되어야 합니다. 집안에 믿음의 가장, 한 사람이 바로 서면 온 집안이 복을 받아 새롭게 변화됩니다. 이것이 영적 법칙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을 우리가 존중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를 통해 그 공동체에 은혜와 복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지체들은 지도자를 함부로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축복의 통로로 생각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 여러분들이 왜 교회의 지도자들을 존경해야 합니까? 우리가 왜 나라의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좋은 지도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도자라면 여러분부터 바로 서야 합니다. 여러분이 미래의 지도자가 되기를 바라면 지금 여러분이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 것이 바로 서는 것입니까? 어디에 서야 바로 서는 것입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대표로 모시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의 대표로 모시면 우리가 가는 곳에 예수님께서 함께 가십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 예수님께서도 함께 거하십니다. 우리가 일하는 곳에 예수님께서도 함께 일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우리의 집과 교회와 일터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속됩니다. 그러면 바로 그곳이 새로운 세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새로운 세계를 펼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미 말씀드렸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셔서 통치하시는 새 세계는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으로 풍성한 세계입니다. 15-21절을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20절 하반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죄가 넘쳐 죽음이 왕 노릇하는 곳이라 해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닿으면 새롭게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죄가 극복됩니다. 승리를 경험합니다. 바로 이러한 세계가 예수님께서 여시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은혜가 왕 노릇하는 세계입니다(21). 그 세계에 들어와 사는 자는 예수님처럼 왕 노릇하는 영적인 지도자가 됩니다(17절 하).

 

그러므로 여러분, 다시 강조합니다.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죄와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온 인류가 살아날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희망이며 생명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원수는 사망입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죄 때문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죽이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죽음을 죽이신 방법이 십자가였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죽이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로써 세상을 통치하던 사망이 종식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의 세력이 해체되었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이것이 온 인류가 듣게 된 복음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복음을 환영하고 그 복음이 말하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 영생을 누리며 사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누차 말씀드린 대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여신 새로운 세계에 들어오셨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옛 세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옛 세상에 속한 사람은 기껏해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얽매여 삽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언뜻 보기에는 화려하게 보여도 결국은 헛됩니다.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죽음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는 허망한 인생입니다.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써 새 세계에 들어온 사람은 이 세상의 것을 잃었다고 좌절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것을 얻었다고 기뻐 날뛰지도 않습니다. 새로운 삶의 원리와 목표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 삶의 원리는 나눔이요 목표는 모두의 행복입니다. 그 세계는 넘치는 복과 은혜를 누릴 뿐 아니라 그 복과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나누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너도 살고 나도 살고 우리 모두가 사는 생명의 세계, 영생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 안에서 사는 자는 오늘의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이미 은혜와 생명의 세계 안에서 최후의 승리를 확신하며 현재를 즐거워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왕 노릇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당당하게 사십시오! 여러분 속에 이미 새로운 세계가 들어와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 세계는 이 세상을 넉넉하게 살리는 은혜와 생명으로 충만한 세계입니다. 먼저 여러분 자신이 그 세계를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 세계의 백성임을 이웃들에게 힘 있게 증거 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와 교회가 해야 할 최우선의 일입니다. 그 일에 충성할 때 우리는 이웃과 세상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은혜와 생명의 풍성한 세계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힘 있게 증거 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찬송 282,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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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누가복음 16장 19~31절
    • 설교일 : 2021-12-26
  • 예수님께 경배하는 성탄절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마태복음 2장 11절
    • 설교일 : 2021-12-25
  •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누가복음 1장 1~4절
    • 설교일 : 2021-12-19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마태복음 1장 18~25절
    • 설교일 : 2021-12-12
  •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마태복음 1장 1~17절
    • 설교일 : 2021-12-05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요한복음 1장 1~18절
    • 설교일 : 2021-11-28
  • 성령의 열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 설교일 : 2021-11-21
  • 그래서 예배합니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16장 19~34절
    • 설교일 : 202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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