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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267060386
    성경본문
    로마서 8:26~28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18-04-29

"성령님과 기도"

 

<로마서강해 17>

(8:26-28) 성령님과 기도

2018-04-29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사회적 존재라고 합니다. 특히 우리가 곤경에 처했을 때 누군가가 내 곁에 함께 있어주고 위로하여 줄 때 그 곤경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교회로 모여야 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서로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실 때 서로 사랑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야 험난한 세상을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도움이 참으로 귀하고 필요하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세 가지 정도의 한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사람이 돕는다 해도 항상 도울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늘 함께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2) 함께 있어 서로를 돕는다 해도 우리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도움이 별 소용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3) 더 안타까운 것은 사람이 도움이 오히려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때도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이 잘 되기를 바라며 전폭적으로 지원합니다. 그러나 그 도움이 지나칠 때 오히려 자식을 망칩니다. 이처럼 사람의 도움이 항상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도움과는 달리 우리를 가장 잘 도우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의 별명이 보혜사인데 보혜사란 곁에서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1) 성령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우리와 함께 사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변함없이 항상 도우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즉시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렇게 내주하신 후로는 우리를 떠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언제나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2)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바르게 도우십니다. 우리를 바르게 도우실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곤경과 그 곤경의 근원을 아실뿐 아니라 그 곤경을 해결할 실마리와 과정까지 다 아시기 때문에 성령님의 도우심은 완벽합니다.

3) 성령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를 도우시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으십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라도 다 도우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요지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돕다는 헬라어 동사는 세 단어로 연결된 복합어입니다. ‘함께+대신+받다입니다. 풀어 쓰면 고통을 함께 나눈다, 대신 받다, 무거운 짐을 함께 진다, 대신 진다라는 뜻입니다.

 

*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을 때 그 짐을 함께 져주십니다.

* 그 짐 때문에 쓰려질 때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실 뿐 아니라 그 짐을 대신 져주시기도 합니다.

* 자신감이 생겨서 주님, 이것쯤은 제 혼자 지고 갈 수 있겠습니다.’라고 할 때, ‘아니다! 네가 무리하고 있구나! 너무 욕심 부리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짐을 받쳐 주십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우리를 왜 도우십니까? 오늘 본문은 아주 간단하게 답합니다. 26절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인생들의 특질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이 연약성입니다. 왜 사람이 연약합니까?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전지할 수 없고 전능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의 연약성 혹은 한계성은 피조물이 벗어날 수 없는 본유적 속성입니다. 그래서 창조주와 구별됩니다.

 

사람이 얼마나 연약합니까? 지금도 곳곳에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과거의 전쟁사를 보면 정말 사소한 이유 때문에 승패가 갈라진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정복에 실패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러시아 겨울의 혹독한 추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한 이유는 갑자기 불어 닥친 한파 때문에 나폴레옹이 감기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감기 때문에 지휘력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보로디노 전투에서 참패했습니다. 겨우 소수의 군인들만 도망쳤습니다.

 

우리도 경험하지 않습니까? 독감에 걸리면 의욕이 상실되어 버립니다. 아무 것도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육체는 참으로 연약합니다.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과학이 급속히 발달해서 인간의 지식이 크게 증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 한 가지는 우리의 모르는 부분이 더욱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알지 못했는데, 지금은 우리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과학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외로 최고의 과학자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많은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기 지식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사람이 연약한 이유는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강해 때 말씀드렸듯이 피조물인 사람도 타락의 영향으로 인해 허무한 데 굴복하고 썩어짐에 종노릇합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유혹 앞에서도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연약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지적하는 인간론입니다.

 

인생의 연약함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 연약함이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바울 자신도 연약한 자들 가운데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인물입니다. 가장 믿음이 강한 자로 평가 받을만한 위인입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아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연약한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들을 살펴보면 거기에 자신의 강함을 결코 자랑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3-5을 보면, 고린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할 때 똑똑한 사람들 앞에서 심히 약하여 두렵고 떨었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했다고 고백합니다.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런 구절들을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연약한 나를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연약함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지지합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정말 연약한 자인지를 인정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자를 성령님께서 기쁘게 도우십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어떻게 도우십니까? 성경을 보면 성령님께서 성도들을 돕는 방법이 아주 다양합니다. 초자연적인 이적을 통해 우리를 돕습니다. 환상을 보여주셔서 미래를 알려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도우실 때 기도로써 돕는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8장은 로마서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부 영화를 보면 클라이맥스에 역전이 일어납니다. 주인공이 말을 타고 홀연히 나타나서 거리의 깡패들을 소탕합니다. 그러면 관중들은 속이 시원합니다. 마찬가지로 로마서의 클라이맥스에 해당되는 이 부분에서 성령님의 사역을 어떻게 묘사하는 것이 우리에게 속 시원할 것 같습니까? 성령님께서 불 같이, 폭풍 같이 임하셔서 우리의 대적을 소탕하시고 우리의 곤경을 기적적으로 해결하신다고 한다면 정말 클라이맥스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기이한 능력으로 이제 나타날 것이니, 성도들이여 염려하지 마시오, 두려워하지 마시오!’라고 하는 대신에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십니다.’라고 바울은 쓰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성도들을 돕기 위해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즐겨하시는 일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다급하여 기적 같은 것을 원하지만 성령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기적의 영이기보다는 오히려 기도의 영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는 기도를 아주 귀하게 여기십니다. 성령님께서는 기도하기를 좋아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아주 흐뭇해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위해 기꺼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기도가 정말 중요합니다. 성도의 성공과 실패가 기도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기도가 아주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받는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응답의 약속을 믿지만 정작으로 기도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기도해야 하는데도 기도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왜 기도가 안 될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 우리의 육체가 피곤하면 기도가 안 됩니다. 깨어 기도해야 하는데 자꾸 눈이 감깁니다.

* 육체에 병이 들면 더욱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가 안 됩니다. 몸에 열이 조금만 나도 기도를 못하고 누워버립니다.

* 기분이 상하면 기도할 마음이 안 생깁니다.

*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실망했을 때도 기도가 안 됩니다.

*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기도 또한 막힙니다.

* 일이 계획대로 잘 안될 때 낙심하여 기도가 안 됩니다.

* 창피한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민망하여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 하나님의 존재나 능력을 의심할 때 기도할 수 없습니다.

* 게을러서 기도하지 못합니다.

* 일이 너무 바쁠 때도 기도하지 못합니다.

* 너무 세상살이가 재미있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 자신만만해서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처럼 얼마든지 기도할 수 없는 경우를 나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이렇게 기도할 수 없을 때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위기의 때라는 것입니다. 장기간 기도하기를 쉴 때, 혹은 기도하는 힘까지 상실할 때 찾아오는 것이 영적 침체입니다. 이렇게 영적 침체에 빠져 기도하지 않고 있을 때 우리 대신 기도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또 우리의 기도가 연약하고 부족한 것이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자주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에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라고 말씀하는데 이 뜻은 우리가 기도는 하는데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확신에 찬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꽤 오랫동안 기도하기는 했는데 기도를 마치면 여전히 답답합니다. 중언부언하며 기도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 기도가 참 힘듭니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기도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런 경우의 기도를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가장 적합한 식량을 매일 공급하셨습니다. 만나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가 싫증이 났습니다. 애굽에서 먹던 고기가 먹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그 불평을 듣고는 메추라기 떼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메추라기 때문에 그들은 탐욕의 노예가 되었고 하나님의 큰 재앙이 그들 가운데 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106:1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이처럼 우리는 손해 보는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대로 다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 참으로 다행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기도한 것마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응답하셨다면 우리는 큰 곤경에 빠질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칼을 달라고 떼를 쓰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도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육체의 가시(불치의 병)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래야 복음 전파에 더욱 힘 있게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No!’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평생 육체의 가시를 안고 사는 것이 바울에게 더욱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의지할 것이므로 그 연약함이 바울에게 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가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성령님의 온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기도하시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26절에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27절에서는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간구하십니다. 성령님의 중보기도의 목적은 우리의 유익입니다.

 

* 기도를 쉬고 있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영적 침체 속에 빠져 있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모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셔서 바르게 기도하도록 성령님께서 기도하십니다.

* 우리가 계속 잘 못된 기도를 고집할 때 우리를 대신하여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바로 그 성령님의 기도 덕분에 우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받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기도의 모습 혹은 태도입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고 26절에서 말씀합니다. ‘탄식이라는 뜻은 이전 강해에서 말씀드렸듯이 해산의 고통을 뜻합니다. 해산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산모들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산모가 그 고통을 감수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래야 생명을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뱃속에 있는 아이가 자기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해산의 고통을 감내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탄식은 불평이나 푸념이나 하소연이 아닙니다. 사랑을 가지고 간절하게 기도하신다는 뜻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병든 자녀의 손을 잡고 눈물로 기도하듯이 성령님께서도 그보다 더 애절하게 기도하십니다. 자신이 대신 아파서 자녀가 낫는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것이 어머니의 심정인데 그보다도 더 간절하게 기도하신다는 뜻입니다.

 

말할 수 없는탄식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탄식을 뜻합니다.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신적인 탄식입니다. 해산의 고통이라는 표현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깊은 기도, 통절한 기도를 성령님께서 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기도의 내용입니다. 27절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성도를 위해 간구하시는데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기도만 하십니다. 이유는 성령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은 서로의 생각을 정확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성령님의 기도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가도록 성령님께서 기도하십니다.

*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를 더 풍성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니다.

* 성령님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우리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게 함으로써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와 싸워서 이기게 하십니다.

* 성령님은 또한 권능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기도는 우리를 힘 있게 하십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서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게 하십니다. 선교의 사명을 이루게 하십니다. 환난을 견디게 하십니다. 결국 승리하게 하십니다.

* 성령님은 교회를 세우시는 영이십니다. 교회로 하여금 마침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그래서 이러한 성령님의 기도 때문에 교회에 속한 우리들도 영광스러운 교회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성령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기도이기 때문에 반드시 응답됩니다.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응답이 안 되고 다른 결과가 나타났을 때에는 성령님의 기도가 응답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기도야말로 최선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응답에 관하여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운 부분이 많습니다.

 

기도에 관한 확실한 진리는 우리가 기도하면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적절한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에 항상 최선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기도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 열매가 맺힙니다. 비록 우리가 기도하지 못할 때라도 성령님께서 항상 우리를 위해 최선의 것을 기도하시기 때문에 이 험난한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위해 항상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속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중보자가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관심사는 성령님의 관심사입니다. 나의 문제는 성령님의 문제입니다. 나의 고통은 성령님의 고통입니다. 나의 탄식은 성령님의 탄식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너무 지쳐서 기도할 수 없을 때가 있지만 성령님께서는 기도를 쉬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지내온 것, 다 성령님의 기도 덕분입니다. 우리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항상 우리 속에서 기도로 도우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이상 우리는 실패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고 험난한 세월이 예상된다고 해도 성령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육신의 어머니보다 더 깊은 사랑으로 우리를 아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며 자랑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심령에서 낙심과 고통의 한숨이 새어나올 때 성령님의 기도를 생각하십시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여러분의 유익을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새 힘을 얻고 일어서십시오! 여러분 앞에 펼쳐질 하나님의 아름다운 역사를 곧 보게 될 것인데 그것은 성령님께서 여러분 속에서 기도로 여러분을 돕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26-27절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이유는 연약한 우리를 기도로 돕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성령님께서 기도하시기 때문에 28절이 가능합니다. 28절도 함께 봉독합시다! 우리 성도들에게 항상 모든 것이 합력하여 최선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은 우리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성령님의 기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연약함을 극복하는 자들입니다. 성령님의 기도를 신뢰할 뿐 아니라 성령님과 함께 기도함으로써 한 주간도 힘 있게 전진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찬송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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