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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245560746
    본문말씀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성경본문
    로마서 2:1~16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17-12-03


<로마서강해 5>

(2:1-16) 누가 착한 사람인가?

2017-12-03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지난주일 1:18-32을 살펴보면서 이방세계의 타락과 타락의 처참한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그 타락과 참상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타락의 굴레에 매여 사는 이방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는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피치 못할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그것은 이방세계 전체가 다 타락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래도 선하게 살려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을 개탄하면서 선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 당시 이방세계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스토아학파의 도덕주의자들이 그랬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로마왕실의 가정교사였던 세네카입니다. 세네카는 로마사회 전반에 만연되고 있는 악의 참상들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도덕적 세계에로의 회복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도덕적 미덕을 찬양하고 모든 인간의 동등 됨을 옹호했습니다. 우상숭배를 비웃었고 위선을 폭로했으며 날마다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세네카는 로마사회에서 도덕적 안내자의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유대사회에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런 도덕주의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선다는 것입니다(1절 상반절). 하나님만이 심판의 자리에 앉으셔야 하는데 그 심판 자리에 자기가 앉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심판합니다.

 

더 나쁜 것은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들추어내었던 죄를 자신들도 범한다는 것입니다(1절 하반절). 단지 차이가 나는 것은 그 죄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지난주일에 보았던 타락한 이방인들의 죄는 쉽게 노출됨으로써 도덕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습니다. 반면에 도덕주의자들은 동일한 죄를 범하고도 들키지 않습니다. 머리가 비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죄를 들추어내어 거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위선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도덕주의자들의 위선을 폭로합니다.

 

위선이 무엇입니까?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것이 위선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실수에 대해서는 크게 흥분하는데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정당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서는 분노하지만 자기의 죄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는 남보다 낫고 옳다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 속에 들어있는 작은 티는 정확히 봅니다. 그래서 그 티를 빼지 않고는 못 견딥니다. 그런데 자기 눈 속에 들보가 들어있는데 어떻게 남의 작은 티를 볼 수 있을까요? 자기 눈 속에 들보가 박혀있으면 소경처럼 아무 것도 볼 수 없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남의 티가 더 잘 보인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눈에 박혀있는 들보가 이상한 들보이기 때문입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그 들보의 재료가 돋보기 유리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남의 눈에 들어있는 작은 티가 아주 잘 보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눈에 남의 약점과 실수와 죄가 환히 보이면 여러분의 눈에 돋보기 들보가 들어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자기 눈에 더 큰 죄악의 들보가 박혀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남의 눈에 들어 있는 작은 티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자들이 위선자입니다.

 

이런 위선자들이 선악을 판단할 때 그 기준이 일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항상 자기에게 유리한 기준을 갖다 댑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하고 높은 기준을 적용하고 자기 자신에게는 느슨하고 낮은 기준을 적용합니다. 즉 하나님의 기준을 제 맘대로 변경하고 오용합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남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행하는 위선자는 겉으로 아무리 고상하게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더 심각한 죄인으로 취급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바울이 말씀합니다(2-3).

 

그런데 더 놀랍게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으면 누가 받겠느냐는 식으로 교묘하게 신학적 논리를 폅니다. 4절입니다. 이 구절을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형통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복을 받아 잘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로움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어려움을 당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망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제 곧 풍성한 복을 내리실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에 이 같은 신학의 왜곡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때가 있었습니다. 이사야 시대였습니다. 그 때의 주류신학은 소위 왕실신학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유다의 왕에게 나아가 직언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북쪽 이스라엘이 망한 것처럼 남쪽 유다도 망하고 말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왕실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이사야를 이단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하나님의 뜻과 율법에 대치되는 거짓 예언이기 때문에 참고할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편 논리는 유다가 멸망할 수 없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요, 하나님의 언약대로 다윗의 왕위가 이어져 내려온 나라요,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건재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다를 지키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국가적인 참회를 촉구한 이사야의 말을 거부하고 계속 우상을 섬겼습니다. 지도자들은 자기 배만 채우기에 바빴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이방의 강대국들과 화친하려고 갖은 애를 썼습니다.

 

이런 유다에 대해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죄를 지적하고 살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여러 번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고집을 부렸고 자기들의 신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쌓였던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것이 바벨론의 침공이며 그 결과로 유다가 망했습니다.

 

유다의 패망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2절을 다시 보세요.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됩니다. 그 진리란 5절입니다. 5절이 오늘 본문의 요절입니다. 어떤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간다고 말씀합니까? 고집을 부리는 자, 회개하지 않는 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자신에게 먼저 비추어보면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나의 모습을 조사하면 내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에 자기는 그래도 남보다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고집을 부리는 자요, 교만하여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이런 자들은 회개의 자리로 내려갈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쌓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내세우는 자들을 향해 언젠가는 그들의 도덕적 수준을 만천하에 공개하시는데 그 날이 바로 진노의 날입니다.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입니다(5). 대신에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는 즉시 용서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겸손히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예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비유입니다. 바리새인은 불의한 세리와 비교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착하고 의로운 지를 자랑하며 감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고개도 못 들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세리를 의롭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인물 가운데 바리새인에 가깝습니까? 세리에 가깝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진노든지 용서든지 하나님의 판단은 항상 의롭습니다. 이것을 본문 6-11절까지 바울이 논증합니다. 하나님의 판단이 항상 의로운 이유는 그 증거가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충분한 증거란 각 사람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를 따라 상과 벌을 정확히 내리십니다.

 

상에 대해서는 7절과 10절에서 언급합니다. 어떤 자가 상을 받습니까? 참고 선을 행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차별 없이 동일한 상이 주어집니다(10절 하반절). 그 상이 영생입니다(7). 영생은 하나님과의 생명적 연합과 교제를 뜻합니다. 그리고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누립니다(10). 그러므로 선행에 따라 하나님의 상급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선행에 따라 상급이 결정된다는 것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조한 이신칭의 교리에 반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바울은 앞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말씀했고 앞으로도 더욱 자세히 이 교리를 설명하는데,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착한 행위가 상급을 결정하는 근거가 된다고 말함으로써 이신칭의의 교리와 상충되는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 믿음이란 언제나 선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7절에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란 믿음으로 사는 자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행함이 따르는 참된 믿음의 소유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의 근거도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참을 수 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을 따라 선행을 실천한 자는 하늘의 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벌 받을 자에 대해서는 8-9절에서 말합니다.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습니까?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8)’ 악을 행하는 자(9)’입니다. 오늘 본문의 문맥을 따라 해석할 때 그런 자들은 자기의 죄를 가볍게 보는 대신에 남의 죄를 크게 봄으로써 판단하는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자칭 의로운 자, 자칭 선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진노하십니까? 진노와 분노로 갚으십니다(8). 그들의 심령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습니다(9). 이처럼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고집부리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차별 없이 내립니다(9절 하반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근거가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심판의 날에 벌거벗은 자처럼 그 치부가 드러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고 정확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내면을 정확하게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11절이 바로 그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보다도 내면의 마음상태를 더 중요하게 보신다는 뜻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유대인의 경우와 이방인의 경우를 비교합니다(12-16).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율법의 교훈을 자주 듣고 공부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율법을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13). 만일 율법을 듣고도(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율법을 범한 자이므로 율법이 그를 죄인으로 정죄합니다(12절 하반절).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행치 않는 것은 집을 모래 위에 세우는 것과 같다고 하시면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그 집이 크게 무너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율법의 자구만을 지키는 것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율법의 정신을 잘 헤아려서 온 마음을 다해 율법을 사랑하고 지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구체적인 예로, 형제에 대해 노하거나 욕하는 것, 형제와 불화하는 것,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 이 모두가 형제를 살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율법을 지킬 때 겉으로 드러난 행위 이전에 마음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를 판단하실 때 먼저 마음을 보십니다. 겉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마음으로 율법을 즐거워하지 않을 때 그는 율법을 범한 자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로움과 착함을 자랑하며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버젓이 앉아있는 자는 위선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위선자들을 정확히 가려내셔서 심판하십니다.

 

이방인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유대인과는 달리 이방인은 율법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마음에도 율법이 새겨져 있다고 말씀합니다(15, ‘그 마음에 새긴 율법’). 이방인들이 외적으로는 율법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마음에 어느 정도 기본적인 율법을 새기셨습니다. 그로 인해 모든 사람이 도덕적 존재가 된 것입니다. 마음에 율법이 새겨진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무엇이 옳은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옳은 일을 행하고자 하는 내적 충동을 느낍니다. 그 내적 충동에 반하여 옳지 못한 일을 행했을 때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이것이 도덕적 인간의 본질적 특성입니다. 14-15절이 그 사실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율법 없이 범죄 한 이방인도 내면에 기록된 율법과 양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인 됨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의롭다고 내세우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남을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도덕주의자들은 부도덕의 극치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다른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기는 매 한 가지입니다. 오히려 자기의 죄를 알고도 은폐하기 때문에 그 위선의 죄가 더 악하다고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지적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 16절을 보세요. 오늘 본문의 결론입니다. 도덕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은밀한 것을 속속들이 찾아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밀한 것 안에 은밀한 죄악이 들어있는데 은밀한 죄란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은 죄를 말하는 동시에 율법과 양심이 그 감추어진 죄를 고발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기는커녕 그래도 자신이 착한 자라고 우기는 죄를 뜻합니다. 그것이 이미 5절에서 본 대로 고집회개하지 않는 죄입니다. 이런 죄를 짓는 도덕주의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그러나 도덕주의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의 선언도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구원의 배경이 된다고 바울은 결론적으로 말씀합니다. 16절을 다시 보세요. 하나님의 심판이 복음의 일부라고 바울이 언급한 것입니다. 바울이 도덕주의자들의 은밀한 죄를 여지없이 들추어낸 것은 그들을 심판과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머리에 쌓이고 있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경고는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와 회개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죄와 구원의 초청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서도 은총의 길을 항상 열어두고 계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를 던지겠습니다. ‘누가 착한 사람입니까?’ 이 질문이 오늘 설교의 제목이며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는 설교를 끝낼 수 없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가 말씀한 대로 이 세상에서는 자신이 비교적 착하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자신은 비교적 죄를 덜 짓고 남에게 좋은 일도 많이 하는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짓말도 안 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며 신세지기도 싫어합니다. 어쩌면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남모르게 선한 일들도 할 뿐만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불의에 항거하기도 하고 대의를 위해서 손해와 고난도 감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일수록 자기의 선함과 의로움을 인정받지 못할 때 참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 기준으로 남을 쉽게 비판합니다. 자주 남을 훈계하고 충고하려고 합니다. 누가 죄에 대해 이야기하면 자기는 언제나 떳떳하여 자기와는 별 상관없는 일처럼 여깁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믿기가 참 힘듭니다. 이런 자들이 착한 자가 아니라 위선자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고 모두 착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도 위선자가 될 소지가 큽니다. 잘 믿는 척 할 수 있습니다. 자기 판단이 옳다고 소리를 높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속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위선자를 더 크게 책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는 착한 사람은 어떤 자일까요? 착한 사람의 특성들 가운데 네 가지만 말씀드맀습니다.

 

1) 남을 비판하는 성향을 억제하는 사람입니다. 타인을 향해 비판적인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 인간의 고질적인 약점임을 잘 알고 조심합니다.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깁니다. 그리고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삽니다.

 

2)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죄에 대해 민감합니다. 양심의 소리에도 민감합니다. 이웃의 잘못을 보면 나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나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합니다.

 

3) 하나님의 기준 앞에서 자신의 의롭지 못함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입니다. 우리 주님은 회개하는 세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다윗을 가장 훌륭한 왕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보다 훨씬 위대했던 순간은 회개했을 때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이스라엘의 도둑이 바로 당신이요!”라고 지적했을 때 한 마디 변명 없이 참회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성도는 죄짓지 않는 자가 아니라 죄를 회개하는 자입니다. 자기의 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가 착한 사람입니다.

 

4) 선행조차도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음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착함을 자랑하지 않는 자입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서울의 변두리였던 강서구 화곡동에서 매일 장거리 통학을 했습니다. 통학시간이 1시간 30분이나 걸렸습니다. 하교 시에는 아주 피곤했습니다. 전철을 타고 종각 역에 내려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했습니다. 버스를 탈 때는 자리에 앉아가기를 바랐습니다. 한 번은 바라던 대로 금방 자리가 나서 앉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할머니 한 분이 올라오셔서 제 곁으로 비집고 들어오셨습니다. 마음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일어나서 자리를 할머니에게 권했습니다.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고 하시면서 저의 착함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부끄러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일어나지 않고 자리에 버티고 앉아 있던 그 짧은 순간에 내면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창대야, 그래도 네가 일어서야지! 저 할머니가 네 어머니라고 생각해 보렴! 그리고 너는 예수 믿는 청년이 아니니?” 그 내면의 소리를 듣고 겨우 일어났습니다. 할머니께 자리를 내어드린 후에 저는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순간 저를 깨우쳐주지 않으셨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에 그나마 착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한 것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누가 착한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허물과 죄를 인정하고 참회하고 사람 앞에서도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착한 자로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529장 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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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23장 1~29절
    • 설교일 : 2022-03-27
  • 다윗과 그의 사람들: 공동체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21장 10절~22장 5절
    • 설교일 : 2022-03-20
  • 다윗과 도엑: 성소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21장 1~9절
    • 설교일 : 2022-03-13
  • 다윗과 요나단: 우정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18장 1~16절
    • 설교일 : 2022-03-06
  • 다윗과 골리앗: 믿음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17장 32~40절
    • 설교일 : 2022-02-27
  • 다윗과 사울: 섬김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16장 14~23절
    • 설교일 : 2022-02-20
  • 다윗과 사무엘: 하나님의 선택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16장 1~13절
    • 설교일 : 202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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