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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239289627
    본문말씀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성경본문
    로마서 1:14~17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17-10-22


<로마서강해 03>

(1:14-17) 복음의 능력

2017-11-22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로마서의 서론은 117절까지인데 여기서 가장 핵심이 되는 단어는 복음입니다. 7번 등장합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 본문은 1:14-17의 네 구절 가운데 네 번이나 복음이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의 관심이 복음에 집중되어 있음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복음에 매인 사람, 복음에 감격했던 사람, 복음으로 살았던 사람, 복음에 자기의 생을 헌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 전하는 것이 그의 일차적인 사명이었습니다.

 

이것을 14절에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빚 갚는 심정으로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란 바울이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에게 바울이 복음의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바울이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빚을 지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죄와 율법으로 죽은 바울을 복음으로 살렸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에게 그 복음을 사람들에게 나누도록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맡겨진 복음은 세상에 나누어야 할 빚이 된 것입니다. 고전 9:16에서 바울은 복음에 빚진 자로서의 심정을 더욱 강하게 표현했습니다.

 

(고전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복음을 받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복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나누지 않는 복음은 복음일 수 없습니다. 좋은 소식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 의무가 있습니다. 이 의무를 다 하지 않는 것은 빚을 갚지 않고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태만일 뿐 아니라 수치입니다.

 

바울은 빚 갚는 심정으로 로마교회를 방문하고자 했습니다. 방문의 일차적인 목적은 당연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15절을 보세요. 복음 전파에 대한 바울의 열정을 잘 표현해주는 구절입니다.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만반의 준비를 다하여 소원하는 바는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는 것이라.”

 

그 당시 로마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이 말은 로마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로마가 세계의 질서와 평화를 주도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모든 좋은 것이 로마로 운반되었습니다. 문화와 지식과 철학이 로마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거리에는 건장한 군인들이 제복을 입고 활보했습니다.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자기의 지식을 공중 앞에서 자랑했습니다. 왕궁이나 공공건물들은 웅장하고 화려했습니다. 황제는 신처럼 높임을 받았습니다. 로마에 산다는 것, 로마 시민이 되었다는 것은 큰 특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도시에는 갖가지 축제와 놀이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로마를 방문해서 로마의 위용을 보고 경탄하기를 바랐습니다. 수도 로마는 로마제국의 자부심과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한 것은 로마의 위용에 감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바울의 외관은 초라했습니다. 짙은 눈썹, 안짱다리, 대머리, 매부리코, 지독한 근시에 키도 작고 수사학적 재능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사내였습니다. 이러한 그가 로마로 들어가고자 한 것은 로마의 허영을 복음으로 깨뜨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를 살리는 길은 오직 한 길, 복음밖에 없음을 그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곳이었습니다. 교만과 방탕이 절정에 다다른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반드시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고난 가운데서도 복음을 당당하게 전할 수 있을까요? 우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16절 상반절을 보세요.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서두에 붙어 있습니다. “로마에 복음 전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유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까? 원문을 보면 16절의 아니하노니이 복음은사이에도 또 왜냐하면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가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이며 어떤 특질을 갖고 있을까요? 세 가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1) 복음은 구원에 관하여 인간의 무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을 적나라하게 대비합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인간의 자력 구원이 불가능함을 폭로하는 대신에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력하게 증언합니다.

 

16절 중간을 다시 보세요. 누가 구원을 주신다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입니다. 사람 스스로가 노력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을 기독교는 철저히 배격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사람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얼마나 선행을 많이 하면, 얼마나 남에게 구제를 많이 하면, 얼마나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면, 얼마나 헌금을 열심히 하면, 얼마나 전도를 잘 하면 구원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목사님께서 구원에 대하여 이런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사람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구원을 촛불로 비유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태양으로 비유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태양 빛이 꺼질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태풍이 불어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태풍이 지난 다음에 태양 빛이 더 강하게 비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밤이 와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음날 아침이면 태양이 어김없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촛불 앞에 있으면 불안합니다. 언제 꺼질까 걱정이 됩니다. 조금만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꺼져버립니다. 초가 다하면 새로운 초로 바꾸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노력해서 얻고자 하는 구원은 촛불처럼 언제나 불안합니다. 선행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구원은 불안합니다. 지금은 내가 착하고 선하다하더라도 한 시간 후에 내가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가장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사람마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어서 혹 어떤 사람은 아주 큰 촛불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태양은 아닙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그가 남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남은커녕 자기 한 사람조차도 구원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절망하는 인간에게 비로소 복음이 들립니다. 구원이 사람에게서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소식입니다. 이렇게 들려온 복음은 우선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낱낱이 보게 합니다. 마치 촛불 앞에서는 드러나지 않던 불결함이 태양 앞에서 사정없이 노출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추함과 한계를 보게 됩니다. 죄에 종노릇함으로써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자신 뿐 아니라 온 세계가 죄와 죽음의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신은 물론 이 세상 사람들이 덜 부패해지려고 몸부림치고 있지만 그 부패의 행진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탄식에 대한 해답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사람에게 구원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구원의 길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구원을 하나님께서 가능하게 하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되 그저 주셔야 합니다. 이유는 인간의 공로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그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구원을 정의합니다.

 

(2:8-9)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자력으로 구원이 불가능한 우리 인생들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가 새로운 희망을 갖습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 희망찬 복음의 첫 메시지입니다. 바로 그 복음 안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2) 복음을 믿는 자는 모두 구원받아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16절 중간을 보면, 누가 구원을 얻는지 밝히고 있습니까? ‘모든 믿는 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 얻는 유일한 길이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믿어야 구원 얻습니까?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복음이란 두 주 전에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복음(1:1) 그리고 그의 아들의 복음(1:9)입니다.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1:4). 오직 예수님이 복음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 받는다는 메시지가 복음입니다.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내가 길 중의 하나요 진리 중의 하나요 생명 중의 하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아버지를 알게 하는 유일한 진리요, 아버지와 교제하게 하는 유일한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성인들이 구원의 길과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을 가르치는 것과 길은 다릅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것과 진리는 다릅니다. 생명을 가르치는 것과 생명은 다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 이 세상에서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 외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무엇으로 증명하셨습니까? 두 주전에 1:4절을 해설하면서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명확하게 증거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계룡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우리 한밭교회로 오는 길도 여러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 가는 길,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한 길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현해탄을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선수가 헤엄쳐서 건넜습니다. 도버 해협도 누군가 헤엄쳐서 건넜습니다. 그러나 태평양을 헤엄쳐서 건널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평양을 건너기 위해 헤엄을 얼마나 잘 치느냐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집니다. 천국 가는 데는 얼마나 실력이 있느냐, 얼마나 착했느냐, 얼마나 강인하느냐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돈과 경험과 힘을 다 동원한다 해도 천국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태평양을 건너기 위해 배나 비행기를 타야 하듯이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구원 얻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길이 오직 한 길,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믿는 것을 아주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태양이 하나여서 불편한 적이 있습니까? 나를 낳으신 어머님도 한 분이십니다. 천국 가는 길도 하나입니다. 하나님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구원의 진리도 하나입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받습니다.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누가 구원 받습니까? 예수님만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 받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에서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신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암송하는 요 3:16 말씀이 무엇입니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영생을 얻는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죄를 용서 받습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도 죽음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영생의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차별 없이 모두 구원 받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본문 16절에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먼저라는 말은 복음을 듣게 된 시간적 순서를 일컫습니다. 복음의 소식을 어떤 사람은 먼저 듣고 어떤 사람은 뒤에 듣습니다. 이것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우리 인생들에게 아주 자연스런 일입니다. 즉 구원 받는 것,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먼저 받았다고 해서 나중 받은 사람보다 더 큰 특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 동일한 구원을 받습니다. 복음을 믿는 모든 자에게 차별 없이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므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믿어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원의 주님으로 믿습니까? 그러면 복음의 능력으로 살게 됩니다. 그 복음의 능력이 구원받은 우리를 통해 온 세상으로 흘러들어가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3)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자는 오직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삽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최악의 상태에서 최상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을 뜻합니다. 죄에서 벗어나 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타락의 행진을 멈추고 성화의 길을 걷습니다. 육체의 욕심에 매인 종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자유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영원한 죽음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생의 축복을 누립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말하는 구원은 현세와 내세의 구원, 영육의 전인적인 구원, 전포괄적인 구원, 온전한 구원입니다. 복음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구원하셔서 최상의 축복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 같은 복음의 강력한 능력을 바울은 17절에서 설명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말씀은 우선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는 모든 자에게 의인의 신분을 부여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복음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 루터가 외친 이신칭의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덧입혀지게 되는 방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바뀌게 된 우리의 신분이 의인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는 더 이상 원수지간이 아니라 부자지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제하실 때 단 한 가지만 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와 교제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기처럼 의롭게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성화요 믿음의 성숙입니다. 사도가 말한 대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에 의해서만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믿지 않을 때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에 믿음만이 성도의 삶을 안전하게 보장하고 승리하게 하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인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뜻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 구약성경이 하박국서입니다. 하박국서는 하박국 선지자가 기록한 예언서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악한 왕 여호야김의 통치기간(주전 608-579)에 활동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를 가장 괴롭혔던 문제는 패역한 이스라엘의 왕과 지도자들을 하나님께서 그냥 보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언제까지 그들을 그냥 보고만 계실 겁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답변하셨습니다. 곧 바벨론 군사들을 일으켜 징벌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물었습니다. “어떻게 악한 자를 징벌하시려고 이방의 더 악한 자들을 사용하시려고 합니까?” 그 질문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 바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을 가진 의인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말씀해주심으로써 그의 믿음을 강화시키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벨론 군대를 멸하시려고 곧 강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믿음의 노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 안에 서있기만 하면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결국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믿음만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확실한 기초입니다. 믿음 위에 우리의 삶을 건축할 때 우리의 삶이 견실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들은 물질이나 건강이나 명예나 권세를 잃으면 못살 것 같다는 착각에 종종 빠집니다. 사랑하고 의지했던 사람을 잃게 되면 삶의 희망과 의욕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도가 선택해야 할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물질과 건강을 잃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 위에 굳게 서있으면 능히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면, 사람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보다도 더 훌륭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비밀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얼마든지 그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능히 훌륭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비결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불굴의 믿음을 발휘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을 때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역사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결코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믿는 자들 속에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의 능력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우선 복음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살아 생동하는 능력이 복음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과 함께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드러납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는 사람에게 복음의 능력이 임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자는 복음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이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고 외쳤던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외침은 현실이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자는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베길 수 없습니다. 복음을 믿을 뿐 아니라 복음 안에서 삽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요동쳐도 흔들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1세기 당시에 로마교회에 가장 필요했던 것은 복음의 능력을 믿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편지 서두에서부터 복음의 능력을 선포했습니다.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사람의 머릿수입니까? 건물입니까? 아닙니다. 한국교회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도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요즘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능력, 성령의 능력, 구원의 감격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교회 건물을 화려하게 짓는다고, 교회 종탑에 십자가를 높이 단다고 교회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와 교회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복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세상에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과는 다른 삶의 원리와 방식으로 산다는 것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성도의 삶의 원리와 방식은 오직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산다는 것은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사랑하고 존경하고 그 예수님을 말과 삶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연합여전도회의 사랑나눔바자회나 새생명축제를 하는 이유와 목적도 예수님의 구원과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럴 때 복음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아 복음의 능력을 생생하게 경험하고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찬송 308.

(35200) 대전시 서구 만년남로 3번길 107(만년동) 한밭교회 | 대표전화 042-488-8701~6 | FAX 070-7836-6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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