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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232194047
    본문말씀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성경본문
    누가복음 18:1~8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17-09-03

[설교] 2017년 9월 3일 "마음에 원한이 쌓일 때"


<사복음서 강해 57>

(18:1-8) 마음에 원한이 쌓일 때

2017-09-03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사람의 마음은 상처 받기 쉽고 깨어지지 쉽습니다. 마치 유리그릇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네 마음을 강하게 하라고 권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상하고 깨어지고 병이 드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는 원통함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원한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였는데 그것이 해결되지 않을 때 마음에 응어리가 생기는 내면의 부정적인 감정이 원한입니다.

 

그런데 이 원한은 주로 약자에게 생깁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과부는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구약시대에나 예수님 당시에 사회적으로 약자 중의 약자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참 경건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사회든지 많이 배우고, 똑똑하고, 부유하고, 권력 있는 자들, 즉 강자들이 사회를 좌지우지합니다. 문제는 그 강자들이 공의와 사랑에서 멀어질 때 수많은 약자들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부조리와 불의가 판을 칠 때 사회적 약자들이 억압당하고 손해를 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손해에 대하여 정당하게 배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강자들에게 이용만 당합니다. 그래서 약자들의 가슴에 원한이 쌓입니다.

 

이 원한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 원망입니다. 원망의 대상을 셋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향해 원망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오늘 본문에서 과부의 경우가 이에 해당됩니다. 좀 넓혀 말하면 인간관계가 깨어질 때 원망이 생깁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실망할 때나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배신감을 느낄 때 원망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받은 상처는 더욱 쓰리고 아픕니다. 오랫동안 그 상처가 아물지 않으면 미움과 분노가 마음에 크게 자리 잡습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원망하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을 향한 원망은 주로 죄책감이나 열등감 때문에 생깁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미래의 충격에서 급격한 사회변동은 사회 구성원들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부적응 현상을 유발한다.’고 말했는데 한국사회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그 동안 급격한 변화를 거쳐 왔습니다. 이렇게 사회가 급격하게 변동할 때에는 사람들 간에 생존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합리적인 절차와 공의를 추구할 여유가 없습니다. 법과 질서가 무시됩니다. 강자의 대열에 서야 제대로 대접 받고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살벌한 경쟁에는 낙오자가 많이 생기는데 문제는 낙오자들의 상당수가 자기 탓으로 돌립니다. ‘내가 못나서, 내가 실력이 없어서, 내가 뒷줄이 없어서라고 자책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원망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계십니까? 살아계신다면 저렇게 큰 불의와 부정을 어떻게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왜 저를 이렇게 불의한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왜 저를 이런 꼴로 만드셨습니까?”라고 하나님을 향해 불만을 터트립니다.

 

타인을 향해서, 자신을 향해서, 심지어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을 터트리는데 그 원망을 극복하지 못하면 좌절합니다. 어디에도 소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깊어지면 ()화병이 됩니다.

 

화병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마치 불붙은 납덩어리 같은 것이 가슴 한 가운데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울컥 화가 솟구치고 몸이 떨리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조그만 일에도 신경이 예민해지고 불안해집니다. 사람 만나기가 귀찮고 두렵습니다. 무기력증에 빠집니다. 의사를 찾아가면 별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스트레스가 가중되어서 그럴 수 있으니 마음을 편히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도들 중에도 화병에 걸린 자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어느 책에 상담을 전담하는 목사님이 경험했던 몇 가지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 성실하고 빈틈없으신 권사님에게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이 권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권사님, 이 사실을 누구에게 얘기하셨어요?” 그 때 권사님이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권사회도 몰라요. 거기에 어떻게 말해요. 대학교 동창도 모르고 중학교 동창 몇은 알고 있죠.”

어느 교회의 구역장(여성도)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목사님, 그리스도인도 자살할 수 있어요? 자살할 수 있다고 말해주세요! 제 마지막 희망이에요. 그것마저 빼앗지 마세요.” 이유는 고부간의 갈등이었습니다.

한 여성도가 남편의 가정폭력으로 상담실을 찾아왔는데 과거를 얘기하는 가운데 어릴 때 아버지에게서, 동네 오빠에게서, 심지어 교회 전도사에게서 끔찍한 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저는 어떻게 해요!”라며 어떤 희망도 자신에게 없다고 울면서 몸부림쳤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는 중소기업의 사장인데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려고 하면 먼저 두려움이 생기고 위축된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어릴 때 부모로부터 율법주의적인 신앙교육을 받은 것이 그 문제의 근원이었습니다. 부모가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을 늘 감시하고는 하는 일마다 지적하셨다는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성도들이 겪는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가족 간의 불화입니다. 28%나 됩니다. 10명 가운데 3명은 가정의 불화로 지금 마음에 큰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를 믿음과 결부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의 가정 안에 어떻게 불화가 있을 수 있느냐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사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가정의 문제를 교회의 친구들이나 목장의 식구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까? 대부분은 창피스러워서 말 못합니다. 마음이 시커멓게 멍이 듭니다. 몸에 갑자기 열이 오르고 가슴이 조여 와서 숨 쉬기가 곤란해집니다. 자주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습니다. 식욕이 떨어지고 몸의 기력도 약화됩니다. 얼굴색이 죽어갑니다. 이게 화병증세입니다.

 

게다가 기도조차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려고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해집니다. 믿음이 없어서 이런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고 자책합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도 못합니다.

 

가정의 문제 외에도 성도가 당하는 억울한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세상물정을 잘 모르고 사람을 쉽게 믿어서 사기를 당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어리숙기 때문에 부당한 처사를 당합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에서 다루었듯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성도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과 박해를 당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선행을 악용하는 자들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그럴 때 성도는 비둘기 같이 온유하고 뱀 같이 지혜로워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꾐에 넘어가 손해 볼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 믿는 자이기에 참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원망이 쌓입니다. 믿음은 자꾸 떨어집니다. 심지어 죽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주님께서 나를 그냥 데리고 가셨으면 좋겠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박국 선지나와 엘리야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하나님, 저 악한 자들 보세요. 편히 잘 살지 않습니까? 더욱 살기등등하지 않습니까? 이제 저는 선지자 노릇, 그만하겠습니다. 죽는 게 차라리 낫겠습니다. 하나님, 저를 데려가 주세요!”

 

여러분, 우리도 얼마든지 그런 자리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성도도 화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화병을 미리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화병을 극복하고 건강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심리학자나 정신의학자들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억압할 때 그 감정이 마음에 쌓여 고착화되는데 그 같은 현상을 화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화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부정적인 감정을 밖으로 표출해야 한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스트레스가 마음에 쌓이지 않도록 밖으로 내보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를 밖으로 표출하는 방안으로 규칙적인 운동과 좋은 친구와의 교제를 추천합니다. 그것으로 안 될 때에는 전문 상담자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권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화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가장 좋은 처방이 있습니다. 성경적 처방인데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두 가지인데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견고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우리의 상처 난 마음이 치료되고 원한이 풀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털어내 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가 그것입니다(1, 7).

 

대신에 사람에게 원한을 푸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원한을 푸는 것도 별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미움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원수라 하더라도 우리가 품고 이해해야 할 대상입니다. 분풀이를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사람에게 분풀이를 하면 대체로 그 분을 상대방이 소화해내지 못합니다. 그리하면 그 분이 다시 내게로 돌아와 더 큰 고통으로 쌓입니다.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고통을 주고받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원한이 쌓이는 것, 나 하나만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원한의 물줄기는 끊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원한을 채우는 큰 저수지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불교의 각성 교리와 비슷합니다. 깨달음을 얻어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면 화를 삭일 수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불교는 사람의 마음이 강인하다고 믿습니다. 수양하면 모든 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큰 저수지 같은 마음이 된다고 합니다.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이 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그분이 주장하기를, 마음에 쌓이는 화를 극복하는 비결은 화를 인정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수양이 필요한데 수양에 필요한 훈련으로 천천히 걸으면서 법문을 명상하기를 추천합니다. 그러면 마음에 깨달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화가 남에게 전달되지 않고 자기에게서 멈출 뿐 아니라 그 화를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에게 상처를 안겨준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안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원한은 우리의 명상으로 해결이 가능합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는 수양이나 훈련으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저수지로 비유했는데 우리 마음의 저수지에 무한정으로 원한을 채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다가는 결국 마음의 댐이 파괴되기도 하고 원한의 물이 넘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깨어지든지 아니면 화를 다른 사람에게로 더 크게 분출하고야 맙니다.

 

설교 초두에 말씀 드렸듯이 우리의 마음은 상처 받기 쉽고 깨어지기 쉽습니다. 연약한 마음, 억압 받는 마음, 불안한 마음, 혼란한 마음, 분노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시기에 불타는 마음, 불평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이 되기 쉽습니다. 이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 원한이 쉽게 풀리지 않아 마음에 쌓이게 되고 결국에는 그 원한을 분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원한을 밖으로 분출하지 않으면 자신이 곧 파멸될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시 강조합니다. 원한을 사람에게로 분출하면 악순환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원한을 용납할 수 있는 분에게 표출해야 합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7-8절입니다.

 

마음의 저수지에 원한이 가득 찰 때 그 저수지의 수문을 하나님을 향해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원한이 풀립니다. 이유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원한을 다 받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바다보다 넓고 크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아들을 갖지 못한 한나가 아들을 낳은 브닌나에게서 수모를 겪었을 때 한나는 하나님께 나아가 탄원했습니다. 그로써 한나의 원한이 풀렸고 바라던 아들까지 얻었습니다.

 

시편을 읽어보면 의외로 탄원시가 많습니다. 탄원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의 시편인데 가장 강력한 탄원시가 소위 말하는 저주의 시편들입니다. 대표적으로 시 109편을 들 수 있습니다. 109편의 저자인 다윗은 대적으로 인하여 원한이 사무쳤습니다. 그 원한을 삭이려고 몸부림쳐보았습니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 탄원하였습니다. 그 탄원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저 대적들을 심판하소서! 대적들의 자손들까지 씨를 말려 주세요! 그래야 제가 살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이런 기도를 했다는 것이 믿어집니까? 그러나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가 성경에 포함되었습니다. 그 같은 탄원의 시가 시편 109편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의 시편이 여러 편 있습니다. 여러분, 이걸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 이해해야 여러분이 인생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생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다윗이 살 길은 이 길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마음을 토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이 왕입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칼로 복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다윗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칼로 대적을 복수한다고 해도 또 다른 대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대적이 사라졌다고 해도 자기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원한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원한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에서 결론으로 말씀하신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7-8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누구신가? 졸라대는 과부의 원한을 마지못해 들어준 악한 재판장보다 못하시겠느냐? 아니지 않은가! 우리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시는 하나님,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니신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 나아가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만 아니라 성자 예수님께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고통을 친히 체휼하신 분이십니다(4:15). 그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30).”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분이요 최고의 위로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원한을 다 받아주십니다.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고 친구 같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안으시고 등을 쓰다듬으시며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은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한나처럼, 다윗처럼 체면 차리지 말고 부르짖어라! 마음에 있는 모든 원한을 다 쏟아 놓아라! 도무지 참을 수 없으면 저주의 기도도 해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어주시고 위로하시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으로 응답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탄원할 때 우리의 체면이나 품위를 지켜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벌거벗은 모습 그대로 나아가 부르짖어야 우리의 원한이 풀립니다. 그래야 우리의 숨통이 트이고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믿음의 기도는 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어린아이처럼 나아가 모든 것을 다 털어내 놓고 탄원하는 기도가 믿음의 기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원한을 하나님만이 푸실 수 있다는 것,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원한이 사무칠 때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모든 원한을 낱낱이 하나님 앞에 쏟으십시오! 믿음으로 부르짖으십시오! 응답될 때까지 부르짖으십시오! 그래야 여러분의 마음이 모든 원한을 잠재우는 잔잔한 호수가 됩니다. 그렇게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의 평화가 임하면 그때 원수도 품을 수 있습니다. 철천지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고 축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끈질기게 기도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찬송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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