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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227576853
    본문말씀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성경본문
    누가복음 15:11~32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17-07-30

[설교] 2017년 7월 30일 "사랑의 고통"


<사복음서 강해 52>

(15:11-32) 사랑의 고통

2017-07-23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잃은 자를 찾는 세 비유가운데 처음과 둘째 비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일명 탕자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가정의 불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깨어졌고 형과 동생의 관계도 깨어졌습니다. 이 같은 가족관계의 파괴는 인생들이 겪는 아픔 가운데 아주 큰 아픔입니다. 가정의 불화로 인한 아픔에 비하면 목자가 양 한 마리를 잃은 아픔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한 여인이 은전 하나를 잃어버린 것도 별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망해도, 친구가 배신해도 견딜 수 있지만 가정이 파괴되면 버티기 힘듭니다. 그 중에서 자녀가 탈선하면 부모의 가슴에 못이 박힙니다.

 

오늘 이 비유에서 클로즈업 되고 있는 것은 자녀들 때문에 가슴에 못이 박힌 한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주인공은 둘째 아들도 아니고 첫째 아들도 아닙니다. 마음이 무너져 내려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어서 밖으로 나가 서성이며 고통하고 있는 한 아버지가 이 비유의 주인공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탕자 비유라기보다는 고통하고 있는 한 아버지의 비유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나에게 줄 유산을 미리 주세요!”

 

성경학자 케네스 베일리(Kenneth Bailey)15년 넘게 중동에 살면서 이 둘째 아들의 요청에 대해 그곳 주민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았는데 주민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동일했다고 합니다.

 

베일리 교수: “여러분의 마을에서 이런 요구를 하는 아들을 본 일이 있습니까?”

주민들: “아니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베일리 교수: “그러면 그런 요청을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민들: “정신 나간 일이지요. 그럴 수 없습니다.”

베일리 교수: “만일 누가 그랬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주민들: “아마도 아버지가 아들을 매로 쳤을 것입니다. 그렇고말고요!”

베일리 교수: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주민들: “그 같은 요구는 아버지가 지금 죽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니까요!”

 

베일리 교수가 조사했을 때보다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가 훨씬 더 엄격한 가부장적 사회였으므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 비유는 청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 중에는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었으므로 이들은 이 비유가 어떻게 진행될지 비상한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에 따르면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회초리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들이 계속 고집을 피운다면 아버지가 아들을 동네 한가운데로 끌고 가서 마을 사람들을 불러 자기 아들의 악행을 폭로하고 창피를 줍니다.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식을 돌로 쳐죽게 해도 괜찮았습니다. 율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얘기는 그 당시의 율법과 관례를 여지없이 깨뜨리는 쪽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괘씸한 청을 순순히 들어주었습니다. 아예 큰 아들까지 유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12). 자식에게 져버린 아버지, 순하디 순한 아버지입니다. 이 순한 아버지에게 어떻게 이처럼 패역한 아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아버지가 너무 순해서 아들이 버릇없이 컸기 때문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아버지는 정말 인자한 아버지, 좋은 아버지입니다. 더구나 인생의 깊은 지혜를 터득한 아버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버지를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선한 아버지로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선한 아버지 밑에서 저렇게 못돼먹은 자녀가 나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작은 아들만 아니라 큰 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큰 아들 역시 자기만 챙기는 이기적인 아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두 아들 모두 그럴 수가 있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그럴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뼈아픈 현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수준을 결코 미화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서글프고 참혹한 모습을 여지없이 폭로합니다.

 

왜 예수 잘 믿는 부모에게서 간혹 패륜아가 나올까요? 그럴 때 우리는 쉽게 판단하기도 합니다. “예수 잘 믿어도 별 수 없네! 겉으로는 잘 믿는 척해도 실은 문제가 많았던 거야! 자식 농사도 제대로 못하면서 교회일 열심히 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 또 반대로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 저분 보라고! 자녀들이 잘 되는 것 보니까 믿음이 좋은 부모가 틀림없어! 하나님께서 저분들에게 보상해주신 거야!”

 

그런데 여러분,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답할 수 있을까요? 물론 부모와 자녀는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자녀가 나오고 나쁜 부모 밑에서 나쁜 자녀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사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자식이 잘되고 가정이 화목하기를 바라지만 우리의 소원과는 달리 자녀가 빗나가고 가정에 불화가 생깁니다. 그래서 큰 고통이 찾아듭니다. 그때 우리는 그 같은 고통을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내할 수 있고 지혜를 얻습니다. 오늘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맞아도 마땅합니다. 빈털터리로 쫓겨난다 해도 당연합니다. 율법을 따라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순순히 아들을 떠나보냈습니다. 돌아올 기회를 주었습니다. 돌아왔을 때 환영했습니다. 아들로 다시 회복시켰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모든 부모들에게 심겨있는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육신의 부모들이 자녀들의 반항과 패역을 보면서 고통을 느끼는 것도 하나님의 큰 은총입니다. 그 고통을 통해 부모들이 하나님의 고통과 사랑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가정에 불화가 생겨 고통 하고 있습니까? 부정적으로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항상 고통도 함께 있습니다. 고통의 크기만큼 우리의 사랑도 커가는 법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향해 고통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항하는 우리에게 매를 때리시기보다는 훨씬 더 많이 자신이 매를 맞으시는 쪽을 택하십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계셨을 때가 대낮이었는데도 천지가 세 시간 동안 캄캄해진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번 상상해보세요! 아무 잘못도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해보세요.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가슴에 대못이 박힌 사건입니다. 그렇게 자기 가슴에 대못이 박혀도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온 힘을 다해 외치신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율법대로 한다면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해 천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그 죗값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범죄 한 인생들을 기어코 회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맹세요 선포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십자가로 인해 새 언약의 시대, 은혜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라 회복의 때요 구원의 때입니다. 인생들이 자기에게로 돌아오기를 하나님께서 애타게 기다리시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향해 심판을 보류하시고 대신에 구원의 문을 활짝 여신 이 은혜의 때에 우리 인생들이 우선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사랑과 고통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고통을 완벽하게 계시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과 고통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그때 새로운 인생이 열립니다. 이것을 중생(거듭났다)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중생하셨습니까? 다르게 표현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과 고통을 이해하고 계십니까? 중생한 자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과 사랑이 가슴에 깊이 박혀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한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고통을 깨달은 성숙한 아버지입니다. 이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사랑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의도는 육신의 아버지 가운데 이처럼 성숙한 아버지가 있다면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는 어떠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비유의 주인공인 아버지는 숙맥 같은 아버지가 아니라 자식의 장래를 꿰뚫어보는 지혜로운 아버지입니다. 이 아버지가 자식의 가출을 허락한 것은 그 길만이 자식을 얻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감정대로 하자면 크게 화를 내든지 매를 때리든지 아니면 울기라도 해서 붙잡아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만약에 작은 아들이 약삭빠르고 세상의 풍조를 잘 아는 자였다면 아버지는 그 아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집을 떠나지 못하도록 붙잡았을 것입니다. 그런 아들을 내보냈다가는 겸손을 배우기는커녕 기고만장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독립하여 스스로 성공한 아들은 더더욱 자기를 신뢰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고 인생의 의미와 목적도 모른 채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버지는 아들을 영원히 찾지 못한 채 큰 고통 속에서 눈을 감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들은 물론 아버지에게도 큰 비극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털털 맞고 충동적인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이 아들이 세상에 나가 곧 실패할 것을 알았습니다. 실패한 다음에는 자기의 우매함을 깨닫게 될 것이며, 창피스럽지만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는 이 아버지가 귀향하는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먼 곳까지 나가 있었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20). 그리고 멀리서도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보았다는 것은 실패한 아들의 몰골을 미리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들이 집을 나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을 아버지가 예상했다면 아들의 가출을 막았어야 하지 않을까요? 왜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가출하기로 작정한 아들을 붙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억지로 붙잡아 둔다고 해도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집을 뛰쳐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할 것이 빤합니다. 그랬다면 이 실패한 아들이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집에 어떻게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녀가 실패할 것이 빤하다면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실패하는 것이 그래도 나을 것입니다. 그래야 자녀를 회복시킬 기회가 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 여러분, 자녀들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자녀가 실패했을 때 오늘의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처럼 신앙의 위력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자녀들의 멋진 회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아버지는 그런 아버지였습니다. 동구 밖까지 나가 오늘은 돌아올까 기대하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실패한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달려가는 아버지, 온 몸으로 끌어안고 감격해하는 아버지, 과거의 잘못을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아버지,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하며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준 아버지, 아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활짝 열어준 아버지였습니다. 이 아버지는 재산보다 아들이 소중했습니다. 자신의 명예보다 아들을 더 귀히 여겼습니다. 아들만 얻는다면 모든 것 다 잃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이와 같은 부모가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자녀들은 부모를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한두 번 크게 실패하는 것, 정상입니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녀가 부모를 떠날 때, 그리고 실패할 때, 그때 여러분의 사랑과 신앙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어야 합니다. 실패하여 면목이 없는 자녀를 끌어안고 격려하고 재기의 용기를 불어넣어준다면 그 자녀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품는 여러분의 모습을 통해 여러분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보다도 더 값진 수확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을 때 자녀들이 멋있게 자라 세상을 선도하는 하나님의 좋은 일꾼이 될 것입니다. 대신에 여러분의 재산과 명예 때문에 실패한 자녀를 외면하고 내친다면 자녀를 영원히 잃어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부모가 되시겠습니까?

 

이제 저는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 한 가지를 더 나누고자 합니다. 여기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떠나보낸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큰 아들 때문이었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두 아들은 남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서로에게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형제 중에서 형이 더 큰 문제라고 이 비유는 지적합니다. 아버지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준 것은 큰 아들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겉으로 보면 별 나무랄 데 없습니다. 가문과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는 장손입니다. 자기 일에 성실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행간을 읽어보면 큰 아들이 어떤 자인지 짐작이 갑니다. 이 형은 동생만 보면 불쾌했습니다. 성실하지 못하고 가문에 욕만 끼치고 매사에 푸석푸석하여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동생에게 아버지가 순순히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을 보면서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자기도 장자가 받을 두 몫의 유산을 챙겼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비유에서 형은 동생의 가출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거나 동생을 붙잡은 흔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고통을 헤아려보거나 아버지를 위로한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동구 밖에 나가 아들의 귀가를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외면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큰 아들이 자기 동생을 한 번이라도 찾아 나섰다면 아버지가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이 큰 아들은 아주 냉정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오래 전부터 그 큰 아들의 내면을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교만하고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큰 아들, 겉으로는 자기 일에 성실하지만 속으로는 불만과 탐욕으로 가득 차있는 지극히 영악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지만 참으로 무서운 아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분명히 성공할 아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생과는 아주 거리가 먼 아들이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집 나간 탕자였다면 큰 아들은 결코 아버지 곁을 떠난 적이 없지만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는 더 큰 탕자였습니다. 즉 집안의 탕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큰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같이 한 집에 살고 있지만 아버지와 장남과의 간격은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둘째보다도 장남 때문에 더 크게 고통 했습니다.

 

이 큰 아들에게 작은 아들이 곁에 있으면 형제간에 더 불화의 골이 깊어갈 것이 빤했기 때문에 작은 아들이 떠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변화를 통해 큰 아들도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비유의 마지막 장면에서 독자인 우리들에게 큰 아들의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28-30절을 보면, 재산을 다 허비하고 돌아온 동생을 용서하고 큰 잔치를 벌여 환영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큰 아들은 화를 냈습니다. 동생을 향한 아버지의 큰 사랑 앞에서 장남은 지금까지 숨겨왔던 자신의 거친 내면이 여지없이 폭발했습니다. 질투와 원망과 교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 아들을 향해 아버지가 간청합니다(28, 31-32). “아들아, 그래도 너는 우리 가문의 장손이 아니냐! 내가 네 동생을 이처럼 사랑하여 영접했다면 하물며 네게는 어떠하겠느냐? 내 마음과 사랑이 항상 너를 향하고 있는 것, 어찌 그렇게 모르느냐? 지금 내가 저 잔치자리에 있지 않고 이렇게 대문 밖으로 나와서 너와 마주하고 있는 이 아비의 심정을 어찌 그렇게도 모르느냐? 장남아, 같이 들어가서 네 동생을 안아다오! 우리 함께 즐거워하자! 이것이 아비의 가장 큰 소원이다!”

 

이렇게 이 비유는 끝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결말이 없는 미완성 드라마와 같습니다. 이후의 드라마는 저와 여러분이 써야 합니다. 글로써가 아니라 삶으로 써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아직 형제들과 불화하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형제들과 불화한 채로 마냥 지낸다면 육신의 부모는 물론 하나님 아버지께 큰 고통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먼저 나서서 화해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부탁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형제들과 화목하세요! 이것이 최고의 효도입니다.

 

육신의 형제만 아니라 영적인 형제들 간에도 화해해야 합니다.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교회의 식구들,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지체들 간에, 목원들 간에, 아이들과 청년들과 장년들과 노년들 간에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와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교회를 향해 바라시는 최고의 소원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이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 같은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여기 큰 아들로 비유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먼저 택함을 받은 유대인들이 바로 이 큰 아들 같은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율법의 잣대로만 사람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육에 속한 교인들이 이 큰 아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겉으로 보면 나무랄 데가 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사랑이나 용서하는 마음이 크게 결핍되어 있습니다. 가난하고 힘이 없고 연약하고 배우지 못한 자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깁니다. 내면세계에 질서가 없고 마음 밭에 가시덤불과 잡초가 가득합니다. 항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중병에 걸린 자들입니다. 그렇게 되는 근본 이유는 하나님의 큰 사랑과 은혜에 잠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신 자들을 멸시합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큰 아들이 그랬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큰 죄악입니다.

 

반대로 여러분들 중에 작은 아들과 같은 분들이 계십니까? , 우리 모두는 작은 아들과 같은 자였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던 탕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큰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떤 자로 살아야 합니까? 여기 비유에서 등장하는 동생처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구원의 잔치자리에서 즐기고만 있어야 할까요? 아니면 대문을 열고 달려 나가 형님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애를 써야 할까요? 형님이 집안으로 들어와 함께 즐길 때 비로소 아버지의 고통이 끝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형을 돌이키게 하는 결정적인 키를 동생이 가지고 있습니다. 동생이 정말 회개하고 정신을 차렸다면 형에게 나아가 이렇게 애원해야 합니다. “형님, 들어오셔서 절을 받으소서! 이제 깨달았습니다. 제가 아버지께만 아니라 형님께도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가문에 먹칠을 했습니다. 형님, 용서해주세요! 이제 형님을 잘 모시겠습니다. 형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형님 없이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들어오셔서 형님께서 이 잔치의 주인이 되어주세요! 그래야 제가 살겠습니다!”

 

이 같은 모습이 은혜 받은 우리에게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요? 성도 여러분, 모든 사람들을 형님으로 대하십시오! 나이와 신분에 관계없이, 신자든지 불신자든지 상관없이 만나는 모든 자들을 형님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돌아왔으므로 아직 문밖에 있는 우리의 형님들, 다시 찾아야 할 형님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벌써 문밖에 나가셔서 그들과 대화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따라서 문밖에 있는 형님들을 집안으로 모셔 들이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시원해질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들께도 부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녀들을 사랑하십시오! 그것만이 자녀들을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육신의 자녀들만 아니라 교회의 모든 자녀들도 사랑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열렬히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에는 큰 고통이 베여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거나 그 사랑에 응답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인생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 비유는 고집을 피우며 돌아오지 않고 있는 인생들을 향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고통하고 계시는지를 생생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이 될 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을 이해하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족들과 이웃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와 기쁨으로 잔치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집밖에 계십니다. 사랑의 고통을 가득 안고 오늘도 이곳저곳을 찾아다니십니다. 성도와 교회는 그 큰 사랑으로 고통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세 비유를 보면, 잃었던 양 한 마리를 다시 찾은 목자가 크게 기뻐하며 벗과 이웃을 집에 불러 잔치했습니다. 잃어버린 은전 하나를 찾은 한 여인도 이웃과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았던 아버지는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큰 잔치를 배설했지만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큰 아들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투덜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큰 아들이 집안에 들어와 함께 잔치를 즐길 때까지 쓰라린 가슴으로 큰 아들과 대화 하고 있는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도 더 큰 기쁨을 위해 작은 기쁨을 유보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불화의 현장으로 달려가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아직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있는 가족들과 이웃에게로 달려 나가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 하는 사랑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철이 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전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 찬송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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