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280034997
    성경본문
    로마서 9:6~13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18-07-15

"하나님의 자녀"

 

 

<로마서강해 21>

(9:6-13) 하나님의 자녀

2018-07-15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사도 바울은 구원의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 때문에 심령에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1-3). 그 고통은 자기의 동족을 사랑하는 데서 우러나온 고통이었습니다. 건강한 영성에서 나온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고통은 바울의 마음을 어둡게 하거나 산란하게 한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로 하여금 맑은 정신을 갖게 하고 신학적 사색을 깊이 하도록 이끈 유익한 고통이었습니다. 이런 고통을 거룩한 고통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통은 신학적 이해의 지평을 넓혀줍니다.

 

오늘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로마서 9-11장은 사도 바울이 고통 가운데 얻은 신학적 통찰입니다. 그 통찰 가운데 하나는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관한 지식입니다. 영원 전부터 어떤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고 어떤 사람은 내버려두셨다(유기하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난해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난해한 주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이해하지 않고는 이스라엘의 구원문제를 바르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가진 의문은 하나님의 특별 총애를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는 반면에 하나님과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기꺼이 환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라는 난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에 인과율의 한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과율이란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업에 성공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성공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야!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때를 잘 만났기 때문일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란 없다고 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사업에 성공한 그럴 듯한 이유를 찾아내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사에 펼쳐지는 모든 일이 인과율의 법칙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면 풀리지 않는 문제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애지중지 키운 자녀인데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는 불효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막 키운 자녀 가운데 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섬기는 효자가 나오기도 합니다. 부유한 집에서 모든 좋은 것을 누리며 자란 자녀라고 훌륭하게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부모의 뒷바라지 없이 자라난 자녀라고 탕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얼마든지 우리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를 다룰 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신비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구원의 근거를 우리 쪽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내가 바르게 믿었으니 구원받은 거야!” “나는 원래부터 천성이 착해서 구원받은 거야!” “내가 이만큼 하나님께 충성하니까 구원받은 거야!” “내가 회개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거야!” 그것도 시원찮으면 내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 부모 덕분입니다. 우리 집안은 수대에 걸쳐 예수를 믿어왔습니다. 그러니 내가 예수님을 안 믿을 수 있나요! 그러니까 모태신앙인 셈이죠!”

 

그러나 성경은 우리 편에서는 구원받을 근거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의 근거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도 구원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도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구약의 사건 두 가지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택하시고 이스마엘을 버리신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는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버리신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기록된 실화입니다.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구원을 확신했습니다.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상 구원받는 것,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생각이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에게 퍼져 있습니다. 소위 말해서 선민사상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자기와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불가능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이 이를 잘 뒷받침해주고 있음을 바울이 깨달았습니다.

 

구약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겠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하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선포하신 약속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지만 10년이나 지났는데도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적인 방법을 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여종인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녀는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이삭이었습니다.

 

이삭이 약속의 자녀인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출생을 한참 미루셨습니다. 사라의 나이 90세가 되었습니다. 그때는 이미 경수가 끊어져 아이를 임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도 100세나 되어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 죽은 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지 25년이 경과한 후, 그것도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력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끊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이삭을 잉태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이삭이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녀임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7-9).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의 섭리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얻은 이삭이 바로 복된 씨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을 다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시지는 않으셨다는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참 이스라엘이 있는데 그 참 이스라엘만이 약속의 자녀이며 그 참 이스라엘만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혈통이나 출생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가 막힌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야곱과 에서의 얘기입니다. 금방 보았던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의 차이는 그래도 이해할 만합니다. 이삭은 여주인의 아들로서 합법적인 아들입니다. 이스마엘은 여종의 아들로서 그 정통성이 결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은 육신의 자녀로 이삭은 약속의 자녀로 구분하신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의 경우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와 비교하면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아버지가 같을 뿐 아니라 어머니도 같습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그들의 부모입니다. 더구나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입니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났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올 정도로 태어난 시간에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신다면 장자인 에서를 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는 버리셨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두 아들이 리브가의 복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11절 척 부분과 12절을 보면, 그 자식들(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인데 하나님께서는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하는데 지독한 편애입니다. 11절 중간 부분을 보면, 선택 받을 만한 조건이 야곱에게 전혀 없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창세기를 살펴보면, 야곱이 별 인격적으로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형에게 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쳤던 꾀보였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즉 에서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는 야곱을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불공평해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택을 하시고 안 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지만 그래도 거기에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지독한 독재자이므로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에는 꽤 괜찮은 독재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부모들입니다. 부모들은 어느 정도 자녀들이 자라기 전까지는 자녀들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습니다. 옷도 어머니 마음대로 입힙니다. 아이가 옷을 안 입으려고 하면 설득합니다. 이걸 입으면 공주가 된다느니 왕자가 된다느니 열심히 설득합니다. 그래도 말 안 들으면 강제로 옷을 입힙니다. 독재자입니다.

 

이처럼 부모는 자녀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자녀가 컴퓨터 게임이 빠져있거나 폭탄주를 마시거나 줄담배를 피우는 것 보고 말리지 않을 부모는 별 없습니다. 아이들이 잘못하면 회초리로 때리고 엄포를 놓습니다. 자녀가 적어도 10대가 될 때까지 부모가 일방적으로 끌고 갑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보다 인생을 좀 더 아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보다 훨씬 좋으신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을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좋으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가도록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늘 우리는 참으로 어려운 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입니다. 그런데 신학적 주제들이 난해한 이유는 신학 안에 신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신비가 있어야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학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한 지식에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신학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다고 해도 하나님에 관하여 완전히 다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게 피조물의 한계입니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개미와 사람, 크게 보면 같은 피조물입니다. 하지만 개미가 사람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개미와 사람의 차이가 아주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미와 사람의 차이가 아무리 크다 해도 피조물인 사람과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차이만큼은 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개미가 사람을 온전히 알 수 없듯이 사람이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는 것, 당연합니다.

 

물론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만큼만 압니다. 이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아는 정도가 다릅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에 관하여 많은 부분까지 이해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선 그가 하나님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자녀이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 보통 성도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깊이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로 나아갔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즐겼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힘써 했습니다. 그때마다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계시를 밝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아주 어려운 주제를 다루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조금 전에 신학의 주제마다 신비가 있다고 했는데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 신론의 신비 가운데 하나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인데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기독론의 신비 가운데 하나는 성육신 사건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성을 가지신 성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인성을 취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하는 것도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입니다.

* 종말론의 신비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 하시는가 다시 말해서 최후 심판의 날이 언제인가 하는 것인데 우리에게는 감추어진 비밀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 가운데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도 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성경에 그 모습을 여러 가지로 그려놓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 구원론의 신비 가운데 하나는 왜 하필 내가 구원받게 되었는가?”입니다. 나 자신을 보면 도저히 구원 받을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특별히 자랑할 만한 것이 별 없습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이 두드러질 따름입니다. 그런 내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된 것,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내가 구원받은 것,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구나! 나를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있었구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씀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1:3-6)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로 선택하신 것이 영원 전이구나!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인생의 역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나의 출생과 구원을 하나님께서 작정하셨구나!

*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나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시고 기쁘게 수락하게 하셨구나!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내게 복음을 전해준 분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더 나아가서 나도 이 좋은 소식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는데 어떤 사람은 버리셨다면 하나님으로서 그게 정당한 일인가라는 의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편애가 하나님의 불의를 증거 하는 셈이 아닌가라는 의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바울이 계속하여 논증하는데 다음주일에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 예정과 선택 교리는 성경이 지지하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의 핵심은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를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있습니다. 내가 약속의 자녀였으며 그래서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이 마음 중심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큰 시험과 고난이 닥쳐온다 해도 담대히 이겨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이 나의 노력으로 나의 선행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기에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늘 겸손한 자세를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교리는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거친 반석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든든히 세우는 기초석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교리가 전도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이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가 구원받기로 선택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한다고 그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육신의 자녀인지 약속의 자녀인지는 마지막까지 두고 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전도를 통해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반드시 전도에 관심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형제들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볼 때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저 분이 약속의 자녀이면 좋겠네! 아직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을 전해야지!” 이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또 하나 오늘 분문에서 우리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라도 그들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비슷한 적용을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로 적용할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라고 해서 다시 말해서 예수 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가정과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있습니다.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가 섞여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알곡이며 가라지인지, 누가 약속의 자녀이며 육신의 자녀인지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을 분별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다음과 같은 증거가 있습니다.

*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구주와 주님으로 믿어집니다.

*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생각할 때마다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다.

*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질 뿐 아니라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되 전심으로 사랑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이웃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는 마음도 생깁니다.

*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을 때 그것이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죄임으로 깨닫고 진심으로 아파하고 회개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도록, 사랑을 실천하며 살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매순간 간구합니다.

* 가족들과 이웃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리도록 전도에도 힘을 씁니다.

이러한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에 와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해서 여기에 앉아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왜 이 설교를 듣고 있습니까? 한밭교회 안에서 좋은 이웃을 만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으뜸가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이 자리에 온 것 같지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 예배의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인도하셨을까요?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신령한 복을 누리는 첫 시작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확실하다면,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모든 좋은 것을 유산으로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그 공동유산을 요약하면, 영생복락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실하게 답할 수 없다면,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교역자들이나 교회식구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도움을 청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라야 행복을 누리고 나눌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참된 행복을 누릴 수도 나눌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자녀라야 참된 행복을 누리고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 아니라, 받은 은혜를 이웃들에게 나누며 삽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나눔으로써 하나님 자녀답게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 찬송 545

 

 

  • 경건한 예배, 진정한 효행
    • 설교자 : 안정순 목사
    • 성경본문 : 창세기 4장 3~12절
    • 설교일 : 2022-05-08
  • 어린아이들을 용납하라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마태복음 19장 13~15절
    • 설교일 : 2022-05-01
  • 다윗과 아비가일: 반려자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25장
    • 설교일 : 2022-04-24
  • 예수님의 부활, 우리의 부활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고린도전서 15장 16~22절
    • 설교일 : 2022-04-17
  • 하나님의 열심, 우리의 열심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이사야 62장 1~12절
    • 설교일 : 2022-04-10
  • 다윗과 사울: 기름부음을 받은 왕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24, 26장
    • 설교일 : 2022-04-03
  • 다윗과 광야: 피난처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23장 1~29절
    • 설교일 : 2022-03-27
  • 다윗과 그의 사람들: 공동체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21장 10절~22장 5절
    • 설교일 : 2022-03-20
  • 다윗과 도엑: 성소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21장 1~9절
    • 설교일 : 2022-03-13
  • 다윗과 요나단: 우정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18장 1~16절
    • 설교일 : 2022-03-06
  • 다윗과 골리앗: 믿음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17장 32~40절
    • 설교일 : 2022-02-27
  • 다윗과 사울: 섬김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16장 14~23절
    • 설교일 : 2022-02-20
  • 다윗과 사무엘: 하나님의 선택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무엘상 16장 1~13절
    • 설교일 : 2022-02-13
  • 다윗과 예수님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마태복음 22장 41~46절
    • 설교일 : 2022-02-06
  • 은혜로 사는 삶(2)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열왕기하 5장 1~27절
    • 설교일 : 2022-01-30

(35200) 대전시 서구 만년남로 3번길 107(만년동) 한밭교회 | 대표전화 042-488-8701~6 | FAX 070-7836-6520

© k2s0o1d4e0s2i1g5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