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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332896818
    성경본문
    마가복음 6:30~44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19-04-28

(막 6:30-44) 빈들에 임한 천국

2019-04-28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요약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표적인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빈들로 데리고 가셨습니다(35절). 세례요한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분노의 가슴을 안고 빈들로 가셔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빈들에서 하나님과 독대하신 예수님은 구원이라는 자신의 소명을 재확인하셨을 겁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빈들에서 조용히 하나님과 대면하여 우리의 소명을 재확인하고 그 소명으로 재무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빈들로 가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제자들의 전도보고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빈들로 가서 쉬자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막 6:30~31). 아침부터 그들은 쉬지 않고 전도하고 가르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습니다. 심신이 지쳐 있을 제자들을 쉬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빈들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적당한 휴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쉬어야 일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휴식의 장소가 바로 조용한 빈들입니다. 

 

  쉬기 위해 갔던 빈들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평민들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도 고치셨습니다(34절). 그런데 날이 저물어가자 제자들은 귀찮아하며 무리들을 보내려 했습니다(35~37절). 예수님과 제자들의 결정적인 차이가 빈들에서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바로 사랑의 유무였습니다. 사랑이 없어도 얼마든지 남을 대접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도, 능력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모두 불법입니다(마 7:22~23). 바울 역시도 사랑의 결핍과 상실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씀합니다(고전 13:1~3). 사랑 없는 열심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 없는 능력은 바람에 날려가는 겨와 같습니다. 제자들이 빈들에서 배워야 했던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이 빈들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제자도였습니다.

 

  이 수준 높은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방법을 삶으로 보이셨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달아났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것을 다 아셨음에도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 만져주시고 치료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아가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폐부 깊숙이 체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라고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부탁하기 위해 빈들에서 제자들에게 삶으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민낯은 빈들에서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반면 한 아이가 예수님께 작은 도시락 하나를 바쳤습니다(요 6:9). 그 행위가 사랑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우리의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재현해야 합니다. 

  이렇게 내가 즐겁게 그들의 종이 되고, 그들보다 앞서서 수고하고, 그들의 짐을 대신 져주고, 그들의 고통과 아픔에 깊이 동참하면, 안식을 확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정신을 구현하지 않고는 이웃을 안식하게 할 수 없습니다(빌 1:23~24). 그러므로 우리는 가족과 이웃이 안식하기까지 나의 안식을 잠시 유보하고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우리의 가족과 이웃에게 안식을 나누어주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천국은, 참된 안식은, 오병이어를 나누는 빈들과 같이 사랑을 주고받는 곳에 임합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바로 그 한 사람에게 다가가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섬길 때 하늘의 행복과 안식이 찾아 듭니다.

 

  우리는 오늘도 사랑으로 사셨던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빈들로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와 대면하여 우리의 소명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빈들이 풍요의 들판이 되는 비결은 사랑의 실천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으로 산 시간만이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사랑이 흐르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거기서 참된 안식과 하늘의 평안을 맛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꾼들에게 주시는 위로이며 보상입니다.

  성도 여러분, 천국을 맛보려면 우리 각자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가정과 학업과 사역에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참된 안식도 누립니다. 그게 지금 여기서 맛보는 천국입니다.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천국을 날마다 맛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전문

오늘 읽은 성경본문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사건”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오병이어(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한 소년이 예수님께 내어드린 작은 도시락이었습니다. 그걸 가지고 남자 장정만 헤아려도 5천명이나 배불리 먹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만 명은 족히 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열 두 바구니의 부스러기까지 남았습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사건이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것은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 대표적인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복음서를 대조해보면 성경기자들이 이 기적이 일어난 장소에 대해 일치된 관심을 표명합니다. 오늘 분문인 마가복음에서는 한적한 곳(31절), 빈들(35절)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도 빈들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산이라고 했습니다. 민가에서 제법 떨어진 들판이나 낮은 야산쯤으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 빈들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는데, 사복음서를 종합하면 그날 오전부터 저녁 무렵까지 몇 가지 중요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 예수님께서 아침에 12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전도대로 파송하시다.
  •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자기 선생 세례요한이 헤롯 왕에 의해 참수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다(마 14:12).
  •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도를 마치고 돌아와서 전도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고하다.
  • 제자들의 전도보고를 듣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고 하셨다.
  •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편 뱃세다 부근의 빈들(한적한 곳)로 향하시다.
  • 무리들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달려서) 예수님과 제자들보다 먼저 빈들에 도착하다.
  • 빈들에 모인 무리들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들도 고치시다(마 14:14).
  • 저녁 무렵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빈들로 가신 이유, 두 가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요한의 참수소식과 관계가 있고 다른 하나는 전도하느라 수고한 제자들에게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날 오전에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참수소식을 들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은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증언한 하나님의 선지자요 예수님의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분봉왕 헤롯에 의해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당장 헤롯에게로 달려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저주와 심판을 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만천하에 헤롯의 죄악을 들춰내고 친구의 원수를 속 시원하게 갚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빈들로 가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마 14:12-13)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예수님께서 빈들로 가신 것은 힘이 없거나 비겁해서가 아닙니다. 분통을 터트린다고 해서, 원수를 보기 좋게 제압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을 아셨던 예수님께서는 슬픔과 분노의 가슴을 안고 빈들로 가셔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슬픔과 분노의 격정에 사로잡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꼭 한 가지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 이해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같은 기막힌 일을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지 화가 나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배반과 모욕을 당했습니까? 예,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예수님을 바라보시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처럼 빈들로 가십시오! 원수가 있는 화려한 궁궐이 아니라 빈들로 가셔서 하나님을 독대하십시오! 슬픔과 분노는 빈들로 나아갈 때 풀어집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독대할 때 평정을 되찾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그 빈들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간 집중해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그 소명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빈들이 필요합니다. 빈들에서 조용히 하나님과 대면하여 우리의 소명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도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죄 용서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명입니다. 이 거룩한 소명을 재확인하고 그 소명으로 재무장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을 홀로 대면하는 빈들입니다. 하나님과 독대하는 빈들로 자주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빈들로 가신 또 다른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막 6:30-31)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아침에 전도대로 파송된 제자들이 전도를 마치고 예수님께 돌아와서 전도보고를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회개했는지, 얼마나 많은 귀신들을 쫓아냈는지, 얼마나 많은 병자들을 고쳤는지 신나게 보고했습니다. 그 성공적인 결과를 보고 받으면서 예수님께서도 흐뭇해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빈들로 가서 쉬자고 하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을까요? 제자들에게 잠깐이라도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그들은 쉬지 않고 전도하고 가르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습니다. 결과가 너무 좋아서 시간이 금방 지나갔겠지만 그들의 심신이 무척 지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탄과 영적 전투를 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음식도 먹고 쉬면서 심신의 피로를 풀도록 빈들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적당한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다시 일할 수 있는 새 힘이 공급됩니다. 적당한 휴식은 낭비가 아니라 재충전의 시간입니다. 쉬지 않고 일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잘 휴식해야 일할 수 있는 힘과 지혜가 생기고 집중력도 생깁니다. 그 휴식의 장소가 바로 조용한 빈들입니다. 우리는 여름 휴가철만 아니라 가끔씩 개인적으로나 가족들과 함께 적당한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힘차게 일할 수 있습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쉬어야 일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쉬기 위해 빈들로 갔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평민들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로마의 압제, 종교 지도자들의 사치와 부패, 자신들의 가난과 질병으로 하루하루 사는 것이 정말 힘겨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청년이 나타나서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기적 행하는 것을 보고는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도보로 빨리 걸어서 예수님과 제자들보다 먼저 빈들에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도 고치셨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이제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상대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고는 예수님께 나아와 그들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35-36절입니다. “주님, 이곳은 빈들입니다. 이제 날도 어두워가니 무리를 해산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이들이 동네에 들어가서 저녁을 해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도 끝도 없는 일,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도 쉬면서 저녁 요기나 하십시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37절 상반절) 마태복음 14:16에서는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저 불쌍한 자들을 끝까지 책임지려고 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아주 상식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37절 하반절입니다.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7개월 치 노동자 봉급)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주님, 빵을 마을에서 사온다고 해도 적어도 200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 지금 그 돈이 우리에게 있기나 합니까? 있다고 해도 여기 빈들에서 어떻게 그 많은 빵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제자들의 오전과 오후의 모습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전도보고를 할 때 그들은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군중들로 인해 짜증이 났습니다. 그들 때문에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피곤이 산더미처럼 밀려왔습니다. 사람의 머릿수가 돈으로 환산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자기들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열심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제자들의 실상이었습니다. 

 

여러분, 제자들과 예수님의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 빈들에서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34절). 그런데 제자들은 그들을 귀찮게 여겼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사랑의 유무였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어도 얼마든지 남을 대접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도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도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도 능력을 행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도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결론부분에서도 예수님께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7:22-23)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러분, 무엇이 “불법”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불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산상수훈의 말씀을 요약하면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최고로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되 최선을 다해 사랑하라.” 그러므로 불법은 사랑의 상실입니다. 사랑의 상실이 불법이요 죄의 뿌리입니다.

 

고전 13장 사랑장에서도 사도 바울이 같은 말씀을 합니다.

(고전 13:1-3)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의 결핍과 상실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불행해지는 이유는 사랑의 결핍과 상실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 없는 성공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열심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 없는 능력은 바람에 날려가는 겨와 같습니다. 제자들이 여기 빈들에서 배워야 했던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끝까지 베푸는 사랑,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것이 여기 빈들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제자도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 반론을 제기하고 싶어집니다.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수준 높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니까 가능하지, 우리는 불가능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은 사람의 생각을 다 아십니다. 원하기만 하면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조건 없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믿음으로 나아온 자들도 있었겠지만 그저 호기심으로 나아온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진실로 회개하는 자들이 있었던 반면에 전혀 회개하지 않은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건강을 되찾은 후에, 건강한 손과 발로 범죄 할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고쳐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짐작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 다음 날도 예수님께 나아와서는 또 기적을 기대했습니다. 그런 군중들에게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설교하시면서 자기를 영접해야 영생한다는 복음의 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군중들이 실망하고는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얼마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달아났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런 자들을 사랑하신다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군중들의 실상을 다 아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 만져주시고 치료하셨습니다. 굶겨 보내지 않으시고 넉넉하게 먹여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아가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34절의 “불쌍히 여겼다”는 말은 원래 의학용어입니다. “창자가 끊어지도록 아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의 고통을 자신의 폐부 깊숙이 체휼하셨습니다. 그들의 아픔과 배고픔이 자신의 아픔이며 배고픔이셨습니다. 그들은 마치 목자를 잃은 양들처럼 유리방황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부모 잃은 고아와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외면할 수 없으셨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향해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자주 느낍니다. 자녀들이 어긋난 길로 갈 때, 고집을 피우고 반항할 때, 가슴에 시커먼 멍이 듭니다. 그래도 부모는 자녀들을 향한 사랑을 멈출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그보다 더 큰 사랑, 더 진한 사랑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면 바로 그 같은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섬기라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장 크게 아파하신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예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우리가 그 사랑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기 빈들에서 제자들에게 실물교육을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사랑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이 빈들에서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대신에 요한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께 작은 도시락 하나를 바친 한 아이의 행위가 대조적으로 높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행위는 다름 아닌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한나절 동안 지켜보았던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향한 존경과 사랑이 피어올랐다고 보아야 합니다. 자기도 예수님처럼 사랑의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도시락을 존경하는 예수님께 바친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 아이의 소박한 사랑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동기와 방식은 오직 한 가지, 사랑입니다. 오병이어의 도시락을 예수님께 바친 아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희생적인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의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재현하는 것입니다. 

 

윌리엄 우드핀(William Woodfin)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인생을 볼 때마다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자라야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입니다.

 

이 진리를 가르치고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빈들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휴식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소명입니다. 그 소명은 예수님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빈들이 필요합니다.

  • 빈들은 우리의 격정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장소입니다.
  • 빈들은 육체의 휴식과 영적 재충전의 장소입니다.
  • 빈들은 하나님과 독대하는 장소입니다.
  • 빈들은 우리의 삶의 방식과 사역의 동기를 점검하는 장소요 우리의 소명을 재확인하는 장소입니다.

 

더 나아가 오늘 우리가 살펴본 빈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해야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되는지를 생생하게 훈련하신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빈들로 가서 잠깐 쉬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제자들은 쉴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그러니 예수님도 그러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과 예수님이 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을 돌려보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저 불쌍한 자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돌아간다면 그날 밤은 두 발을 뻗고 주무실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언제 우리가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까요? 형제가 안식할 때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가 안식할 수 있습니다. 형제가 안식하도록 사랑으로 섬긴 후에라야 우리도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교훈입니다. 이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우리에게 주는 우선적인 교훈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사명은 안식을 확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을 확산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자기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자기희생 그것이 바로 십자가 정신입니다. 십자가 정신은 이웃의 안식을 위하여 내가 즐겁게 그들의 종이 되는 것, 그들보다 앞서서 수고하는 것, 그들의 짐을 대신 져주는 것, 그들의 고통과 아픔에 깊이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정신을 구현하지 않고는 이웃을 안식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십자가 정신으로 살았던 바울을 보세요! 그가 로마감옥에 갇혔던 때,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밝힙니다.

 

(빌 1:23-24)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저는 지금 여기 로마 감옥에서 순교하면 좋겠습니다. 모든 고통과 고생 그치고 천국에서 주님의 품에 안겨 안식하고 싶은 것이 제 솔직한 소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금 제게 죽음과 삶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하신다면, 삶을 택하겠습니다. 제 자신만 생각하면 순교하여 하나님께 가는 것이 좋지만, 제가 살아서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저는 여러분의 유익을 위하여 삶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의 안식을 위하여 저는 고난의 길을 즐겁게 걸어가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 때문에 고통하고 있습니까?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자녀입니까? 이웃입니까? 그런데 왜 그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까? 생각해 보세요! 남편이 주님을 만나서 안식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신앙 좋은 부인이라도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자녀가 주님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는 아무리 신앙 좋은 부모라 해도 안식할 수 없습니다. 내 이웃이 고통 속에 있음을 보고도 못 본 체 한다면 어찌 우리의 마음에 참된 안식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가족과 이웃이 안식하기까지 나의 안식을 잠시 유보하고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입니까? 할 수 있는 대로 우리의 가족과 이웃에게 안식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입니다. 형제가 안식할 때까지 나의 안식을 유보하는 것이 기독교 복음에 합당한 삶입니다. 성도 여러분, 안식 없는 이 땅에 안식을 나누는 자로 우리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도 이 땅에 안식을 확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와 교회가 자신의 안식을 당분간 유보하고 대신에 안식을 이 땅에 심기 위해 땀 흘려 수고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신 떡과 생선을 제자들이 받아들고 무리들에게 분배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제자들은 신이 났을 것입니다. 빈들에 50명씩 100명씩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며 식사하는 모습도 그려보세요. 물론 식사는 아주 조촐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그 빈들에서 천국을 맛보았습니다. 천국을 맛본 공동체, 사랑과 평화와 기쁨이 가득한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였습니다. 

 

그 멋진 광경을 본 제자들은 비로소 참된 안식을 누렸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날 밤에 참된 안식이 어디에서 오는지 생생하게 경험했을 것입니다. 어디에 천국이 임합니까? 사랑을 주고받는 곳입니다. 우리 한밭교회도 주님께 받은 풍성한 사랑을 나눔으로써 천국을 맛보는 공동체가 되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금주 토요일과 주일에 1박2일로 한밭가족축제를 엽니다. 그 축제에서 교우들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생생하게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천국을 맛보는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 한밭가족축제는 5월 4일 토요일 오후 3시에 무주태권도원에서 시작합니다. 토요일에 참석하지 못하시는 교우들께서는 주일이라도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무주태권도원에서 드리는 주일예배는 오전 10:30에 온가족에배로 한 번만 드립니다. 여기서 자동차로 1시간 20분정도 걸립니다. 주일예배 후에 태권도원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해산합니다. 

* 주일에 무주에 오지 못하시는 교우들께서는 주일오전예배를 여기 만년동 교회당에서 드릴 수 있습니다. 주일 오전 11시, 3층 중고등부실로 오시면 됩니다. 점심식사가 없는 것, 양해 바랍니다. 

* 대예배실 리모델링 공사 기간 중에 세 주일을 지나는데 5월 5일, 12일, 19일입니다. 5월 5일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주일오전예배만 드립니다. 오후예배는 없습니다. 5월 12일과 19일에는 한밭대학교 아트홀에서 역시 오전 11시에만 온가족예배로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점심식사와 오후예배는 없습니다. 

* 앞으로 세 번의 주일 모임이 평소와 달라 어수선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더더욱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세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모든 인생들이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 세 가지를 던지고 답했습니다.

1) 가장 소중은 시간은 언제인가?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이다.

2)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다.

3) 가장 소중한 일은 무엇인가?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언제 행복해질까요? 언제 참된 안식을 누릴까요? 훌륭한 신앙의 선배, 톨스토이가 말한 대로, 아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대로 지금 내 곁에 있는 바로 그 한 사람에게 다가가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섬길 때 하늘의 행복과 안식이 찾아듭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요한복음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다음날에도 군중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 설교를 하셨는데 그 설교를 들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가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 가오리이까?”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요? 어제 빈들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이전보다 더 예수님께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승리하려면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사셨던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빈들로 나아가야 합니다. 빈들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대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우리의 소명을 재확인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에 붙잡혀야 합니다. 빈들이 풍요의 들판이 되는 비결은 사랑의 실천에 달려있습니다. 사랑으로 산 시간만이 의미 있습니다. 다 잊어버려도 이 한 가지를 잊지 않고 산다면 우리의 삶은 풍요로울 것입니다. 사랑이 흐르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빈들이 변하여 풍요의 들녘이 됩니다. 거기서 참된 안식과 하늘의 평안을 맛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일꾼들에게 주시는 위로이며 보상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천국을 맛보려면 우리 각자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가정과 학업과 사역에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참된 안식도 누립니다. 그게 지금 여기서 맛보는 천국입니다.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천국을 날마다 맛보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송) 9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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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본문 : 사도행전 6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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