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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330268993
    성경본문
    요한복음 16:20~24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19-04-14

(요 16:20-24) 기도

2019-04-14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요약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즐거워하셨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다가올 십자가의 무거운 고통을 기도로 이겨내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 인생들이 당하는 고통의 총합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인간이 당하는 최대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감수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기도였습니다(히 5:7).

  예수님의 제자들도 고통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20절). 그 고통은 사모가 아이를 해산할 때 겪는 것과 같았습니다(21절).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을 보실 때, 그들이 기뻐하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22절).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자들은 근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순절에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기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보냄 받으신 성령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도와 교회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하여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내주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을 받게 될 거라고 설교했습니다. 그 결과 그 날에 3천명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행 2:38~41). 지금도 성령님을 받는 조건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고 죄 때문에 죽은 나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 친히 부활하신 것을 믿으면 이미 우리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슬픔과 애곡과 근심과 고통에 빠집니다. 이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묘책이 바로 ‘기도’입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제자들이 더 이상 예수님께 질문하지 않게 될 거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23절). 제자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분명하게 알고, 그 사명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의 최종 결과는 충만한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듣고 시행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14). ‘무엇’이란 ‘아무 것이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 그보다 더 큰 일, 즉 구원의 완성,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요 14:12). 그 같은 일을 이제는 기도하는 제자들을 통해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내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하실 가장 중요한 일은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요 14:26, 16:7~8, 13~15 참고).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성령님의 강림을 사모하며 기도하던 약 120여 명의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그 결과 성도들에게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군중들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선포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기도 제목은 성령님의 충만입니다. 그래야 세상살이에서 겪는 온갖 괴로움을 딛고 일어서서 사명자로 힘차게 나아가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모든 유익을 얻으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셨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하셨고, 기도하신 대로 그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특히 성령님의 충만을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더니 성령님께서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강림하셨습니다(눅 3:21~22). 십자가를 앞두고는 십자가의 고난을 넉넉히 이기도록 눈물로 간구하셨을 때,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했습니다(눅 22:43).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최고의 방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성도를 찾으십니다. 기도 없이는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도, 사명에 충성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비전에 사로잡히고 그 비전을 성취하는 열정과 헌신이 기도를 통해서 나옵니다. 개인과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교회에서 능력 있는 주님의 일꾼으로 살고 싶습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영혼 구원의 열매와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에 우리를 사용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더 큰 일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비밀이요 위력입니다.

 

 

 

전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바로 전날 저녁에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하면서 몇 시간을 보내셨는데 그때 제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소위 다락방 강화라고 하는데 요 13-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락방 강화에서 예수님은 기도에 관해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리고 그 만찬을 기도로 마무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하는데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또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 날, 목요일 저녁부터 다음날 금요일 새벽까지 제법 긴 시간을 기도하셨습니다. 그때 기도가 예수님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우리에게 깨우쳐줍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즐거워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기도야말로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사귀는 시간, 아버지와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기도의 시간은 기쁨과 안식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기도는 지루함이나 괴로움을 안겨주는 그래서 마지못해서 하는 일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벗어 던지고 싶은 무거운 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다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다가올 십자가의 무거운 고통을 생각하며 겟세마네 기도의 동산으로 나아가 기도하실 때 땀이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질 정도로 무척 힘드셨지만 예수님은 기도로써 승리하셨습니다. 기도를 통해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습니다. 못 박혀 달린 십자가 위에서도 자기를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비는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기도의 사람이셨다면 그를 흠모하고 따르는 우리들도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 당연하지 않습니까? 기도를 일로 생각하기보다는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사귀는 시간으로 여겨야 합니다. “기도보다 더 즐거운 시간은 없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신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습니다. 그 어려움의 절정이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은 우리 인생들이 당하는 고통의 총합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그래서 그 고통은 크고 무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에 천지가 어둠으로 캄캄해졌는데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아들의 고통을 차마 보실 수가 없으셔서 눈을 돌리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은 죄와 사탄이 인생들에게 부과한 모든 고통의 총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인간이 당하는 최대의 고통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감수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기도였습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통이 있는 것, 결국 생각해보면 축복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고 거기서 세상을 이기는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여류 소설가 미우라 아야꼬(삼포능자)는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녀가 크리스천이 된 것은 지독한 질병 중에서였습니다. 20대에 결핵과 척추카리에스(척추에 결핵균이 침투하여 척추가 약해져서 파괴되는 결핵성척추염)에 걸려 병석에 누워 있게 되면서 성경을 읽게 되었고 회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0대 젊은 나이에 큰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처절한 고통과 아픔이 전화위복이 된 셈입니다. 

 

그녀가 평소에 애송한 작가 미상의 신앙 시가 있는데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뵙지 못할 성안(거룩한 얼굴)이 있습니다.

아, 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조차 없습니다.

 

시인은 아픔 때문에 주님께서 기뻐하실 최고의 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고 노래합니다. 고통은 기도의 깊은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축복의 관문입니다. 고통 속에서 우리의 인격과 믿음과 기도가 정금 같이 단련되기에 고통은 피해갈 것이 아니라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새 역사가 열립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곡하고 애통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날은 근심의 날이요 고통의 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마치 산모가 아이를 해산할 때 겪는 고통이라고 하셨습니다(21절).

 

여 성도들께서 자녀를 해산할 때 진통이 어떠했습니까?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때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참으로 애석하게도 남자들은 그 해산의 고통을 경험할 수 없지만 남자들도 여자들 못지않게 큰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직장 속에서 만만찮은 고통 속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은 하지 못하지만 속으로는 정말 이 세상을 떠나 주님 품에 안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십대 청소년들이나 대학생들이나 청년들은 어떠합니까? 빨리 어른이 되고 싶고 가정을 이루고 싶고 안정된 자리를 잡고 싶을 것입니다. 불확실한 현실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을 것입니다. 어르신들은 어떠합니까? 외롭고 슬프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근심과 슬픔과 애곡과 고통에 완전히 사로잡힐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로잡는 것이 기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강조되는 단어는 기쁨인데 그 기쁨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근심과 고통을 덮어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주님 주시는 기쁨은 빼앗길 수 없는 기쁨, 충만한 기쁨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경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여러분, 아무리 근심이나 고통이 크다고 해도 일시적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는 도구로 사용될 뿐입니다. 근심과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사도들과 신앙의 선배들이 경험했습니다. 우리들도 경험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지금 주시기 원하는 것이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만찬을 나누면서 제자들이 그때 근심했습니다(22절 전반절). 왜 근심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별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뭔가 암울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 근심이 생긴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내일 예수님과의 이별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짐으로써 주님과 이별하게 될 것입니다. 그 예측하지 못한 일이란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그것도 십자가에서 정말 무력하게 죽으시는 것을 제자들이 목격할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 때문에 제자들이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충격 정도가 아니라 살 소망까지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그 같은 충격과 좌절도 잠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2절 하반절). 곧 기쁨의 날을 맞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기쁨의 날이란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날입니다. 그러면 잃었던 기쁨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후로는 다시 예수님과의 이별이 없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시 만날 날이 언제입니까? 첫 재회의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부활하신 바로 그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그 후 40일간 필요할 때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재림을 약속하시고는 승천하셨습니다.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날에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을 얼굴과 얼굴로 뵙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영원토록 예수님과 함께 지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날과 재림하실 날 사이에 있으므로 현재 예수님과 이별한 상태에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셨습니다.

 

(마 28:20)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오늘 본문도 문맥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재회의 날이 부활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강림절을 가리킵니다.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셨는데 바로 그 성령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의 임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님께서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성도의 심령에 내주해 계십니다.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성도와 교회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께서는 결코 떠나시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는 바로 그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는데 그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시대에를 사는 우리 성도들은 더 이상 예수님과 이별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예수님과 동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에게 성령님께서 내주하십니까? 성경은 한결같이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성령님의 강림을 경험한 베드로 사도가 군중들에게 첫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의 핵심 내용은 예수님을 믿으면 자기들처럼 성령님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행 2:38-41)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여기 회개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님을 선물로 받는다고 사도가 선포했습니다. 그 결과로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은 자가 그 날에 3천명이나 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지금도 성령님을 받는 조건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 우리가 성령의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지 조사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고 죄 때문에 죽은 나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 친히 부활하신 것을 믿으면 이미 우리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해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있고, 그래서 우리의 심령에 성령님께서 내주해계시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주 슬픔과 애곡과 근심과 고통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정말 이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묘책이 있을까요? 예,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묘책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23-24절).

 

“그 날”이란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성령의 시대를 뜻합니다.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시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더 이상 질문할 거리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자신들의 사명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당당하게 나아가 기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결과는 충만한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조금 전에도 비슷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요 14:12-14)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무엇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듣고 시행하시겠다고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무엇’이란 ‘아무 것이나’가 아닙니다. 14:12절에서 예수님께서 밝히신 대로 그것은 예수님의 일과 관계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예수님께서 하시고 싶은 더 큰 일을 지금부터는 기도하는 제자들을 통해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이란 구원의 완성, 즉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만유의 회복과 통일입니다. 그런데 그 같은 일을 이제는 기도하는 제자들을 통해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주시고 싶으신 가장 크고 놀라운 것이 “성령님의 강림”이라는 것입니다. 다락방 강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강화에서 가장 핵심 되는 내용이 성령강림의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하실 가장 중요한 일이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입니다(요 14:26, 16:7-8, 13-15참고).

 

사도행전 첫 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의 강림을 기다렸습니다. 약 120명의 성도가 다락방에 모였는데 모여서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의 강림을 사모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지 열흘쯤 되었을 때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강력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들 모두 성령님으로 충만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에게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신령한 용기가 생겼습니다. 군중들에게 하나님의 큰 일을 선포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령님을 이미 받은 우리들도 지금 사모하며 기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제목은 성령님의 충만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기도의 제목은 성령님의 충만입니다. 그래야 세상살이에서 겪는 온갖 괴로움을 딛고 일어서서 사명자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기쁨이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할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이며 그 큰 일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것은 “성령님의 충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함부로 만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친필 사인이 있는 초청장을 가지고 있다면 아주 당당하게 청와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보초병이 막아도 전혀 걱정이 없습니다. 대통령의 이름이 있는 초청장만 제시하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뜻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위해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직장에서 상관에게 사업계획서를 올립니다. 그 상관이 최종 결재권자라면 그의 사인은 절대적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사가 사인하기 위해서는 직원이 제안한 그 사업이 회사를 유익하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 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결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이름으로 사인을 하시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의 사인을 보시고 그 일을 하락하십니다. 성령님께서도 적극적으로 도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사인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처럼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 시간을 아버지와 사귀는 즐거운 시간으로 여기고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간구하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온전히 성취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 뜻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완성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만 만유가 회복되고 온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기도하셨고 기도하신 대로 그 일에 헌신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의 충만을 간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습니다(눅 3:21). 그때 성령님께서 비둘기 같이 예수님 위에 강림하셨습니다(눅 3:22). 십자가를 앞두고는 십자가의 고난을 넉넉히 이기도록 눈물로 간구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의 능력을 간구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겟세마네 기도의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고통하며 기도하시는 장면을 묘사할 때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눅 22:43).”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최고의 방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것은 기도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는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도 없이는 사명에 충성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능력 있는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비전에 사로잡히고 그 비전을 성취하는 열정과 헌신이 기도를 통해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시대에 정말 찾고 계시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자가 제대로 된 주님의 제자요 일꾼입니다. 

 

개인과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교회에서 능력 있는 주님의 일꾼으로 살고 싶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처럼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영혼 구원의 열매와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처럼 기도의 사람으로 산다면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할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고 싶으신 더 큰 일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비밀이요 위력입니다. 

 

 

금주는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주간은 특히 기도를 배우는 주간입니다. 그래서 특별새벽기도회를 합니다. 새벽에 함께 모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 주님께서 큰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찬송가 86장

  • 부흥하는 하나님의 교회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9장 31절, 13장 1~3절
    • 설교일 : 2023-03-26
  • 예수님의 증인, 스데반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7장 54절 ~ 8장 2절
    • 설교일 : 2023-03-19
  • 믿음의 말로 건강한 교회를 세웁시다
    • 설교자 : 김시영 목사 | 대전소망교회
    • 성경본문 : 민수기 13장 25~33절
    • 설교일 : 2023-03-12
  • 기도와 말씀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6장 1~7절
    • 설교일 : 2023-03-12
  • 영광스러운 교회를 향하여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2장 42~47절
    • 설교일 : 2023-03-05
  • 이 패역한 세대에서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2장 37~42절
    • 설교일 : 2023-02-26
  •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2장 1~4절
    • 설교일 : 2023-02-19
  • 아버지의 훈련
    • 설교자 : 김대중 목사
    • 성경본문 : 히브리서 12장 1~13절
    • 설교일 : 2023-02-12
  • 하나님 나라의 일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1장 1~11절
    • 설교일 : 2023-02-05
  • 더 좋은 교회로
    • 설교자 : 서상욱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6장 1~7절
    • 설교일 : 2023-01-29
  •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요한복음 11장 23~41절
    • 설교일 : 2023-01-22
  • 육신의 눈, 마음의 눈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요한복음 9장 1~12절
    • 설교일 : 2023-01-15
  • 성령의 열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 설교일 : 2023-01-08
  •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에베소서 5장 15~18절
    • 설교일 : 2023-01-01
  •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누가복음 1장 26~56절
    • 설교일 : 202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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