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281110339
    성경본문
    로마서 9:14~23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18-07-22

"우리 주 하나님"

 

<로마서강해 22>

(9:14-23) 우리 주 하나님

2018-07-22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사도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유대인의 구원 문제를 다룹니다. 유대인의 구원 문제가 바울에게 아주 중요했기 때문에 세 장이나 할애했습니다.

 

유대인의 구원 문제가 바울에게 왜 중요했을까요? 유대인이 자기 동족이므로 그들의 구원에 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관심정도가 아니라, 자기 동족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생각하면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떠나지 않았습니다(9:1-3).

 

유대인의 구원 문제가 바울에게 중요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유대인의 구원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진전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경륜 속에는 유대인의 구원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깨달은 복음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9-11장은 로마서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부분이 로마서의 절정이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사도 바울은 자신이 깨달은 하나님의 구원 계시를 심혈을 기울여 이곳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구원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부터 이 논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9:4-5입니다. 하나님께서 갖가지 특별 은총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했습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 사실이 바울에게는 너무나도 안타깝고 원통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줄기차게 약속하셨는데 이제 그 약속이 무효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던 6-13절입니다. 우선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이 무효가 될 수 없다고 결론부터 말씀합니다(6절 상반절,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유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파기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현재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실상과 파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바울은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옴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소수가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관하여 바울은 9장 말미에서부터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아브라함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슬러 살펴보면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고 바울은 증거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결론을 내린 것은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구원받는 참 이스라엘이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둘은 같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지만 이삭만 아브라함의 씨로 선택되었습니다. 심지어 한 배에서 태어난 에서와 야곱을 들어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창세기에 나오는 선조들의 얘기를 예로 삼은 이유는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 성경 앞에서는 입을 다물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증거를 들어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지금도 그 약속을 기억하실 뿐 아니라 그 약속을 성취해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신다면, 더구나 누구는 사랑하시고 누구는 미워하신다면,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심지어 야곱과 에서를 비교할 때 야곱이 에서보다 나은 점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야곱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14절의 질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바울이 무엇이라고 답변합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단호하게 부정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불의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버리심(유기)은 절대적으로 정당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다시 두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듭니다. 그 두 사람은 출애굽기에서 등장하는 모세와 바로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으로, 바로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15절은 출 33:19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출애굽기 32장부터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광야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해내신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큰 범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진멸하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차라리 자기에게 징벌을 내리시고 대신에 백성들을 용서해달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간구를 들으시고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동행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무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뒷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보고는 살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오늘 본문 15절의 말씀입니다. 출애굽기(33:19)의 표현대로 하면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입니다.

 

시내광야에서 중죄를 범한 이스라엘의 소행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동행하시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광야에서 유리하다가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렇게 멸망당해도 하나님을 향해 불의하다고 항의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죄로 멸망을 자초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간구를 들으셔서 모세에게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없었다면 이스라엘의 구원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집니다. 죄를 범한 우리 인생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16절에서 자신의 노력이나 선행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울의 논증은 확실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얼마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 작정을 이루시기 위해 끊임없이 은총을 베푸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물론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을 말씀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유기(버리심)까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선택하시고 누구를 버리시기로 작정하셨으며, 그렇게 작정하신 대로 실행에 옮기시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 주권자이시며 절대 자유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버리심에 대하여 바로를 예로 듭니다. 17-18절입니다. 핵심 구절은 18절 하반절입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자(바로)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애굽의 바로 왕은 이스라엘에게 자유를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전보다 더 강하게 종으로 부렸습니다. 자기 백성을 놓아주지 않는 바로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10가지 재앙을 선언합니다. 그때마다 바로는 완강하게 대응했습니다. 결국 10가지 재앙을 차례로 당합니다. 재앙을 당할 때마다 바로는 그 재앙을 물러가게 해달라고 모세에게 간청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놓아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재앙이 물러간 다음에 다시 바로는 완악해져서 약속을 파기합니다(7:13, 8:15, 28, 32, 9:34).

 

대표적으로 한 구절만 든다면,

(8:15) 그러나 바로가 숨을 쉴 수 있게 됨을 보았을 때에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더라

 

그러나 출애굽기를 보면 그때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말씀도 나옵니다(7:3, 9:12, 10:1, 20, 27, 11:10).

 

대표적으로 한 구절만 든다면,

(9:12)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은 바로가 완악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강제로 바로를 완악하게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범죄 하도록, 완악하게 되도록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역사하지는 않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 범죄의 조장자이거나 책임자라는 식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사람이 완악해지도록 내버려두실 따름입니다. 내버려두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긍휼과 은혜 베푸시기를 중단하시고 성령님의 영향을 철수시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미치지 못하는 자에게는 결국 자기 마음대로 죄 짓고 더욱 완악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로 하여금 점점 더 완악하도록 내버려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7절에 그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능력을 보이셔서 바로에게는 물론 이 얘기를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리는 기회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청소년 시절에 십계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그 영화에서 바로가 완강하게 대항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을 아주 실감나게 표현했는데 속이 시원했습니다. 십계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방영되었을 때 신자들만 보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는 단체 관람을 했습니다. 모두 신나게 봤습니다. 그러면서 불신자들도 기독교의 하나님이 저런 하나님이구나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왜 바로와 같은 폭군이 필요할까요? 하나님께서 전능자이시기에 바로를 단번에 제거하실 수 있는데 그리하지 않으시고 왜 그토록 질질 끄셨습니까?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와 애굽의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깁니다. 바로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기의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면 바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마땅한가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자유와 절대 주권 하에서 바로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였다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에 대적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19절을 새번역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9:19, 새번역) 그러면 그대는 내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책망하시는가? 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람이 완악하게 된 것이 크게 보아서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뜻 안에서 그리되었으므로 그 책임을 사람에게 돌릴 수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일반적인 논박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바로의 경우처럼 사람 편에서 먼저 완악하게 되었으므로 완악하게 된 책임은 근원적으로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답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 다르게 답합니다. 그것이 토기장이 비유입니다. 21절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으로, 하나는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있는 것, 당연하지 않느냐?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피조물인 인간의 운명을 자기 마음대로 정하실 권한을 갖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바울이 답합니다.

 

20절에서는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엄청난 간격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께 감히 반문(항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누구는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시기로 작정하시는 것 당연하지 않느냐? 하나님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나님이시지!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거나 간섭받거나 방해받지 아니하시고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정하시고 집행하시는 분이시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구원의 대상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자기 동족 유대인들을 생각할 때 심히 안타까웠던 사실은 그들이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면서 실은 하나님을 정말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누구인지도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늘 보고 살았지만 성경의 중요한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유대인들이 거부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과 우리 사람에 관하여 적어도 세 가지 사실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는 기독교 복음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이상의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최고의 심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자유자이시며 최고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보다 크신 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항변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을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이 인정되지 않고는 기독교의 복음이 세워질 수 없습니다.

 

2) 하나님은 전적으로 선하시고 의로우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폭군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완벽하게 선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행동은 언제나 정당합니다. 22-23절을 보세요.

 

* 22: 멸망 받을 자들을 향해서도 하나님은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십니다.

 

(18: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것이 악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 23: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는 하나님께서 풍성한 영광으로 채우십니다.

 

(고후 4:17-18)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행동에 억울한 생각이 든다면 아직도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3) 인간은 피조물일 뿐 아니라 하나같이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앞에서 예로 든 모세를 보세요.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친구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뒷모습까지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모세의 자세는 시종일관 겸손했습니다. 자신이 피조물이며 죄인임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자기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죄악을 용서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을 전심으로 구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동행해주시기를 절박하게 간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공적인 여행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달려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모세에게서 배우는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모세가 지은 시편 90편을 보세요.

(90:10-17)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6]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만난 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는 그 고백이 다릅니다. 하나님께 항변하지 않습니다. 방자하게 대어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정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긍휼과 영광이 나타나기를 사모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자들의 일관된 자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에 자기가 하나님을 판단하는 자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다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바르게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자는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르는 것은 그냥 모른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아야 올바르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지식의 정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에 대하여 다 알지 못해도 텔레비전을 보는 데는 별 지장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하나님에 관하여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추어진 것은 우리가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습니다. 정말 알아야 할 것을 안다면 우리는 바르게 살 수가 있습니다.

 

저는 철학자 김용옥씨의 강연을 들을 때마다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보다 똑똑한 자가 없는 듯이 말합니다. 모든 사상을 비판하고 해석하고 좌충우돌합니다. 성경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예수님도 자기 마음대로 물건 다루듯이 취급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이웃을 향해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께 정의를 요구한다면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셨거나 적어도 성경의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정의롭지 못하군요!”라고 항의하는 것은 하나님, 나에게도 정의의 잣대로 심판하십시오! 내가 죽을 죄인이라면 죽겠습니다. 내 죗값을 내가 당당히 치르겠습니다. 당신에게 자비를 구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 듣기 싫습니다. 나는 당당하게 심판받겠습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보다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께 불만이 있습니까? 불평이 생깁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아직 믿어지지 않습니까? 자신이 죄인인지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여러분이 하셔야 할 일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이것보다 시급하고 우선적인 일은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당신을 만나고 싶습니다.” 씨름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를 기쁘게 만나주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지금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즐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자는 하나님의 예정이나 주권에 대하여 의문이 생겨도 그 의문 때문에 깊은 회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내가 부족해서 모르는 것이지 하나님께 모순이 있거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꼭 알아야 할 것이라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자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사모합니다. 하나님 없이 한시라도 살 수 없는 자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 바르게 살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이십니다. 절대 자유자이시며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시기에 우리의 든든한 보호자, 아낌없는 후원자, 확실한 인도자, 완벽한 구원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절대 자유자이시며 절대 주권자라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한없이 베푸실 수 있습니다. 절대 자유자이시며 절대 주권자이신 우리 주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영원히 돌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 찬송 402

 

  • 부흥하는 하나님의 교회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9장 31절, 13장 1~3절
    • 설교일 : 2023-03-26
  • 예수님의 증인, 스데반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7장 54절 ~ 8장 2절
    • 설교일 : 2023-03-19
  • 믿음의 말로 건강한 교회를 세웁시다
    • 설교자 : 김시영 목사 | 대전소망교회
    • 성경본문 : 민수기 13장 25~33절
    • 설교일 : 2023-03-12
  • 기도와 말씀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6장 1~7절
    • 설교일 : 2023-03-12
  • 영광스러운 교회를 향하여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2장 42~47절
    • 설교일 : 2023-03-05
  • 이 패역한 세대에서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2장 37~42절
    • 설교일 : 2023-02-26
  •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2장 1~4절
    • 설교일 : 2023-02-19
  • 아버지의 훈련
    • 설교자 : 김대중 목사
    • 성경본문 : 히브리서 12장 1~13절
    • 설교일 : 2023-02-12
  • 하나님 나라의 일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1장 1~11절
    • 설교일 : 2023-02-05
  • 더 좋은 교회로
    • 설교자 : 서상욱 목사
    • 성경본문 : 사도행전 6장 1~7절
    • 설교일 : 2023-01-29
  •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요한복음 11장 23~41절
    • 설교일 : 2023-01-22
  • 육신의 눈, 마음의 눈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요한복음 9장 1~12절
    • 설교일 : 2023-01-15
  • 성령의 열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 설교일 : 2023-01-08
  •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에베소서 5장 15~18절
    • 설교일 : 2023-01-01
  •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 설교자 : 곽창대 목사
    • 성경본문 : 누가복음 1장 26~56절
    • 설교일 : 2022-12-25

(35200) 대전시 서구 만년남로 3번길 107(만년동) 한밭교회 | 대표전화 042-488-8701~6 | FAX 070-7836-6520

© k2s0o1d4e0s2i1g5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