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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376600736
    성경본문
    출애굽기 25장 23~40절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19-12-01

<출애굽기 강해 22>

(25:23-40) 생명의 떡, 세상의 빛

2019-12-01 주일설교 / 곽창대 목사

 

요약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지나는 백성들에게 안식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안전하게 인도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거할 처소인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게 백성들과 교제하길 원하셨습니다. 구약의 성막은 모형이며 그림자인데 성막의 실체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1:14). 그러므로 구약의 성막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성막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진설병 상과 등잔대는 예수님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진설병을 두는 상(23~30)

진설병은 하나님 앞에 놓여있는 떡이라는 뜻입니다. 열두 개의 진설병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연상하게 합니다. 제사장들은 매 안식일마다 상에서 물려낸 진설병을 먹었는데, 그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은 생명의 떡을 주시는 예수님을 통해 성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날 밤에 열두 제자들에게 성찬식을 제정해주셨습니다. 성찬을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서 예수님과 친밀하게 교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과 교제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생명과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앞에 앉아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으며 예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과 능력을 부어주셔서 영적으로 건강하게 살게 하십니다.

생명의 떡은 신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기도 합니다(5:24~25, 6:68~69).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에 관한 책이며 신약성경은 오신 예수님에 관한 책입니다(5:39). 그러므로 예수님과 교제하려면 생명의 양식인 성경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더 깊이 더 풍성히 알게 되어서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더 분명히 믿고 존경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 성도가 영생을 맛보는 성도요 그런 교회가 생동하는 교회입니다.

 

2. 등잔대(31~40)

등잔대는 살구나무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살구나무의 원어 뜻은 일깨우는 자입니다. 그래서 살구나무는 부활의 생명을 상징합니다(17:8). 때문에 살구나무 형상의 등잔대는 부활과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등잔대를 만들 때 순금 덩어리를 망치로 쳐서 만들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등잔대는 고난당하시고 죽으셨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등잔대에 밝혀두었던 일곱 개의 등불은 성령님을 상징합니다(1:4~6, 4:5; 11:1~2).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과 교제하는 자에게 성령의 충만한 빛을 비추십니다(1:4, 9, 8:12).

 

우리는 본성상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종종 영적으로 무지하고 나태하며 무기력합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자라고 말씀합니다(4:18). 그리고 죄와 친근하게 지냅니다(4:19, 5:4~5, 11~12). 이기적이어서 주변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오직 자기에게만 집중합니다(요일 2:11). 이런 사람의 심령은 점점 더 어두워집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자주 사로잡힙니다. 그러므로 인생들에게 생명의 성령의 빛이 비쳐야 합니다. 그래야 신령한 지각이 열립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빛으로 신령한 지각이 열리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가장 먼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밝히 보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말씀을 바르게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 우리의 어두운 심령에 빛을 비추셔서 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시면, 우리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보이고 하나님 나라의 일에 뛰어들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이웃을 더 사랑하려는 열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빛의 열매,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로써 자기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합니다(5:8~9; 5:22~23).

여러분은 무엇으로 여러분의 생을 채우려고 하십니까? 옛사람의 습성을 따라 산다면 여러분의 내면에 어둠이 짙게 드리워서 여러분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이웃도 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미련 없이 옛사람의 옷을 벗어던지고 새사람이 입어야 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 빛의 갑옷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살고 어두운 세상도 밝힙니다(13:11~14).

 

12월 첫째 주부터 성탄절까지는 대강절입니다. 대강절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동시에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떡을 먹고, 예수님께서 비추시는 성령의 빛을 받음으로 오늘도 예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에 우리는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빛의 자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과 참 빛이신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 친밀하게 교제함으로써 기쁨과 감사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전문

성막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고 그 성막에 자신이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천막 안에 거주하신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마치 왕이 누추한 평민의 집에 들어가서 거기서 영원히 지내겠다고 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작은 천막에 거처를 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광야를 지나야 하는 백성들에게 안식을 주시려고 그리고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시려고 그들 가운데 거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소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광야를 걸으셨습니다. 이것이 출애굽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두드러진 모습입니다.

 

구약의 성막은 모형이며 그림자인데 성막의 실체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과 함께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거처를 정하시고 33년을 사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목격하고는 그 예수님께 압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막을 생각할 때 우리는 성막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막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성막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뜰과 성소와 지성소입니다. 그림 3을 보세요. 뜰에서 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을 열면 정면에 또 휘장이 보입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 짓는 휘장인데 그 휘장 앞 중앙에 향단이 있습니다. 그 향단에는 향이 항상 피어올라 성소에 향기가 가득합니다. 그 향단을 바라보고 왼쪽 9시 방향에 일곱 개의 등잔이 있는 등대가 있습니다, 그 등잔에 등불을 저녁부터 아침까지 켜둡니다. 낮에는 천막 아래와 틈 사이로 들어오는 광야의 강렬한 햇빛이 성소를 어느 정도 밝혀줄 것이기에 등불을 끕니다. 등대 맞은편에는 진설병 상이 놓여있습니다. 그 상에는 12개의 떡(진설병)이 배설되어 있습니다(그림 4 참조). 대제사장이나 선임된 제사장이 매일 정한 시간에 성소에 들어가 향단과 등대와 진설병 상을 정리하고 청소했습니다.

 

여러분이 구약의 출애굽 때에 제사장이 되어 성소에 들어섰다고 한 번 상상해보세요.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거룩한 곳이기에 등골이 오싹해질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소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소박하지만 정갈하게 꾸며놓은 아늑한 거실과 같습니다. 거기에는 은은한 조명이 비치고 싱그런 향내음이 그윽하고 신선한 빵 한 접시가 식탁에 놓여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신혼부부가 두 손을 마주잡고 정겨운 대화, 사랑의 눈짓, 따뜻한 미소를 주고받습니다. 그 정도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성소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지성소가 안방이라면 성소는 거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소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대표하는 제사장과 만나 친밀하게 교제하는 장소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교제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것도 친밀하게 교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제는 마치 사랑하는 연인들의 교제처럼, 서로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부부의 교제처럼 깊고 친밀한 교제입니다. 이 친밀한 교제를 즐기고 갈망하라고 하나님께서 구약의 백성들에게 성소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성막 가운데 하나님께서 가장 거룩한 곳으로 구별하신 지성소의 두 기물인 증거궤와 속죄소에 관해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성소에 있는 세 기물 가운데 진설병 상과 등잔대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진설병을 두는 상 (23-30)

 

먼저 진설병을 두는 상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림 4를 보세요. 오늘 본문 23-25절은 진설병 상의 재료와 크기와 모양을 설명합니다. 26-28절은 상을 이동할 때 사용할 두 개의 채와 부착해야 할 고리에 관한 설명입니다. 29절은 진설병 상에 관련된 부속기구들을 순금으로 만들라고 합니다. 30절은 진설병 상의 용도를 말씀하는데 이름 그대로 진설병을 두는 상입니다.

 

진설병의 원어의 뜻은 얼굴의 떡입니다. 하나님 면전에 있는 떡, 하나님 앞에 놓여있는 떡이라는 뜻입니다. 레위기 245-9절을 보면 고운 가루로 12개의 떡(진설병)을 만듭니다. 이때 누룩(효모)은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12개의 떡을 매 안식일마다 두 줄로 상 위에 배설합니다. 다음 안식일에 새 것으로 갈면서 한 주가 지난 떡은 제사장들이 거룩한 곳(성소)에서 먹습니다.

 

12개의 진설병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12개의 진설병은 하나님께서 친히 일용할 양식으로 자기 백성들을 먹이시는 것을 상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백성들을 대표하는 제사장들이 매 안식일마다 새 진설병을 상 위에 배설하고 상에서 물려낸 진설병을 먹으면서 자기들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자들에게 한 주간의 삶을 잘 살도록 필요한 은혜를 넉넉히 베푸십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일용할 양식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의 사역이 생명의 떡을 주시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성취되었음을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는데 그 다음 날에도 무리들이 기적의 떡을 바라며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그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 더 이상 기적의 떡을 공급하지 않으시고 대신에 설교만 하셨는데 그 설교의 주제가 생명의 떡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을 일명 생명의 떡강화 혹은 생명의 떡설교라고 부릅니다.

 

(6:47-51)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생명의 떡설교를 들은 유대인들 사이에 큰 혼란이 생겼습니다.

 

(6:52)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혼란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더 도전적인 말씀으로 설교를 마무리하셨습니다.

 

(6:53-58)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셔야 영생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 당시로는 어느 누구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군중들은 이상한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예수님을 더 이상 따라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12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날 밤에 성찬식을 제정해주셨습니다. 유월절 식탁에 앉은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니 받아먹어라고 하셨고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니 받아마셔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최초의 성찬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찬식을 교회가 계속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예수님의 교회가 먹어야 할 신령한 양식을 뜻합니다. 그 양식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찬을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서 예수님과 친밀하게 교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면 예수님으로부터 생명과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그 예수님의 생명과 능력이 오늘 우리가 먹어야 할 신령한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성소 안에 두었던 상과 진설병은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찬과 관련이 있습니다. 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고 12개의 진설병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어야 할 신령한 양식으로서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생명과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앉아야 할 신령한 식탁은 예수님 앞입니다. 예수님 앞에 앉아 예수님과 교제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과 능력을 부어주셔서 영적으로 건강하게 살게 하십니다. 사람을 살리는 참된 양식은 세상이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다시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생명의 떡설교를 들은 군중들이 떠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6:68-69)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요한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5:24-2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그러므로 생명의 떡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뜻하기도 합니다. 좀 더 넓게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성경에 근거한 말씀이요 구약성경의 성취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제대로 읽고 공부하면 구약성경 안에 예수님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에 관한 책이며 신약성경은 오신 예수님에 관한 책입니다. 즉 신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교제하려면 생명의 양식인 성경을 가까이하여 부지런히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더 깊이 더 풍성히 알게 됩니다. 그럴수록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더 분명히 믿고 존경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 성도가 영생을 맛보는 성도요 그런 교회가 생동하는 교회입니다.

 

2. 등잔대 (31-40)

 

이제 성소 안에 있는 등잔대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상징하는 것 중에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들면, 다윗의 별과 등잔대입니다. 다윗의 별은 이스라엘 국기에 그려져 있습니다. 등잔대는 그림 4에서 보듯이 7개의 가지 끝에 등잔이 있습니다. 7개의 등잔은 기름으로 불을 밝힙니다.

 

본문 31-37절은 등잔대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등잔대의 전체 모습은 살구나무 형상입니다. 살구나무 원 둥치가 있고 그 원 둥치 좌우로 가지가 셋씩 뻗어 나와 7개의 가지가 모두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고 서있는 모습니다. 7개의 가지 끝에는 살구꽃 모양의 등잔이 있습니다. 그래서 등잔대의 전체 모양은 살구나무에 살구꽃이 피어있는 모습입니다.

 

살구나무는 영어로 아몬드(almond)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감복숭아라고 부릅니다. 아몬드 씨는 기름의 원료로 쓰이며 그냥 먹을 수도 있습니다. 아몬드 열매로 초콜릿을 만들기도 합니다.

 

살구나무는 벚나무처럼 겨울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연분홍빛이 약간 감도는 흰색 꽃을 화사하게 피웁니다. 살구나무의 원어의 뜻은 일깨우는 자(the awakening one)"입니다. 겨울이 다 지나가지도 않았는데 하얀 꽃으로 만발하여 나지막이 서있는 살구나무를 보면서 사람들은 생명이 움트는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살구나무는 부활의 생명을 상징합니다.

 

민수가 17:8을 보면 대제사장 아론의 지팡이에서 운이 돋고 순이 나고 자라서 살구나무 꽃이 피고 열매까지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는데 이것 역시 살구나무, 살구꽃, 살구열매가 부활과 생명의 상징임을 보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소에서 빛을 발하는 살구나무 형상의 등잔대는 부활과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정당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보면 살구나무 형상의 등잔대를 만들 때 순금으로 쳐서 만들게 했습니다. 순금을 녹여 살구나무 형상의 틀에 부어 등잔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순금 덩어리를 망치로 두들겨서 만들게 했습니다. 여러 성경학자들이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사흘째 새벽에 부활하셔서 어둠을 깨치시고 무덤에서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등잔대는 고난당하시고 죽으셨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등잔대에 저녁부터 아침까지 밝혀두었던 7개의 등불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빛을 비추시고 빛의 열매로 풍성하게 하시는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비추시는 빛의 열매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성령님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신 성령님은 생명의 빛입니다.

 

(1:4-6)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성경에 7이란 숫자는 대부분 완전수로 쓰입니다. 일곱 등불이나 하나님의 일곱 영은 충만한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이사야 11장에는 일곱 영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11:1-2)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1절은 장차 메시아가 탄생하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 메시아가 예수님이십니다. 2절은 그 예수님 위에 7가지의 이름을 가진 영이 강림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것을 살구나무 형상의 등잔대로 표현하면, 가운데 둥치 끝에 있는 등불을 여호와의 영으로, 안쪽의 두 가지 끝에 있는 등불을 지혜와 총명의 영으로, 중간의 두 가지 끝에 있는 등불을 모략과 재능의 영으로, 바깥의 두 가지 끝에 있는 등불을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충만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예수님을 참 빛이라고 했습니다(1:4, 9).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과 우리의 어두운 심령에 생명의 빛을 비추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추시는 그 빛이 바로 부활의 열매인 성령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과 교제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충만한 빛을 비추십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께서 비추시는 성령의 빛으로 비추임을 받아야 합니까? 우리가 어두운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빛보다는 어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의 내면을 조사해봅시다. 우리의 심령이 성령의 빛으로 환하게 밝아있습니까? 아니면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있습니까?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어둠 속에서 잠자고 있는 성도와 교회를 향해 깨어 일어나라! 내 아들 예수가 비추는 성령의 빛으로 충만하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어둠이 무엇을 뜻하는지 네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1) 어둠은 영적인 무지, 나태, 무기력을 뜻합니다.

 

(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2)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은 죄와 친근히 지내는 것을 뜻합니다.

 

(5:11-12)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대낮에는 감히 하지 못하고 어둠을 타서 행하는 것이 죄악인데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둠의 열매는 헛됩니다.

 

(4: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5:4-5)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3) 어둠은 이기주의를 뜻합니다.

 

(요일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어두우면 주위를 볼 수 없습니다.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에게만 집중합니다.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문제에만 매달립니다. 이런 사람의 심령은 점점 더 어두워집니다.

 

4) 영적인 어둠은 반드시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그것이 죽음의 공포입니다.

 

그러므로 인생들에게 생명의 빛, 성령의 빛이 비쳐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통해 우리의 심령에 빛을 비추실 때 우리에게서 어둠이 물러가고 신령한 지각이 열립니다.

 

성령의 빛으로 신령한 지각이 열리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다시 성소로 돌아가겠습니다. 백성들을 대표하는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등잔대를 정리할 때 그 방에 있는 진설병 상과 향단도 함께 정리합니다. 성소를 밝히고 있는 등불로 인해 제사장은 진설병 상과 향단을 잘 정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등잔대가 하는 역할은 성소를 밝혀서 성소에 있는 향단과 진설병 상을 밝히 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성소 안에 켜있는 등불로 인해 향이 피어오르는 향단이 밝히 보이는데 향단에 대해서는 다음 번 강해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소 안에 켜있는 등불로 인해 상 위에 배설된 진설병이 밝히 보이는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성령의 빛이 비치면 가장 먼저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밝히 보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성령의 빛이 비치면 성경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성령의 조명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조명 없이는 성경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말씀대로 살 수 없습니다. 요약하면,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교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성도와 교회로 하여금 주님과 교제하게 하시는 영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어두운 심령에 빛을 비추셔서 성경말씀을 받아들이게 하실 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네 가지로 간추릴 수 있습니다.

 

1)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죄가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죄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2)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고 하나님 나라의 일에 뛰어듭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과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려는 열망이 생깁니다.

4) 빛의 열매,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5:8-9)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처럼 빛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으면 자기도 행복하고 이웃도 행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13:11-14)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여러분은 무엇으로 여러분의 생을 채우려고 하십니까? 돈으로 명예로 세상의 권력으로 쾌락으로 여러분의 생을 채운다면 결코 어둠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빛을 차단하는 커튼과 같습니다. 금방 읽은 말씀에 따르면 어둠과 정욕의 옷을 입고 사는 것인데, 어둠과 정욕의 옷이란 죄에 기울어지는 옛사람의 습성을 뜻합니다. 그 옛사람의 옷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엣사람의 습성을 따라 산다면 여러분의 내면에 어둠이 짙게 드리워서 여러분도 망하고 여러분의 가족이나 이웃도 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미련 없이 옛사람의 옷을 벗어던지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 빛의 갑옷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살고 어두운 세상도 밝힙니다. 그런 성도가 빛의 자녀입니다.

 

교회력으로 오늘부터 성탄절까지 대강절입니다. 대강절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경배하는 절기이자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고 경배하고 사랑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시며 세상의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성도와 교회가 누려야 할 최고의 특권은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교제하되 친밀하게 교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죽음이 가득한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리고 소개하는 자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때 우리는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빛의 자녀로 살 수 있습니다. 대강절을 시작하는 금주 한 주간, 영원한 생명과 참 빛이신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 친밀하게 교제함으로써 기쁨과 감사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 찬송가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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