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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영상주소
    http://vimeo.com/419434524
    성경본문
    느헤미야 13:23~31
    설교자
    곽창대 목사
    설교일
    2020-05-17

(13:23-31)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

2020-05-17 주일설교 / 곽창대

 

전문

느헤미야서의 핵심주제는 개혁입니다. 개혁은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개혁과 내적인 개혁입니다.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지려면 외적인 개혁과 내적인 개혁이 조화롭게 병행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서에서 말하는 외적인 개혁이란 성벽의 재건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 채로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은 사람 살 곳이 못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느헤미야가 멀리 타국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때는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왕 제20(주전 445)이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궁전 가운데 하나였던 수산 궁에서 관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주전 586년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갈 때 그 포로들 가운데 느헤미야의 직계 선조들도 있었습니다. 주전 539년에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점령하고 근동지역을 재패했습니다. 연대를 따지면 느헤미야는 물론 느헤미야의 부모도 페르시아가 근동을 재패했던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느헤미야가 성인이 되었고 페르시아 왕궁에서 일하는 관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느헤미야는 자신이 유대인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랬기에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어 그곳이 들짐승의 거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슬픔을 딛고 일어나 조국의 회복을 위해 몇 날을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얼마 후에 하나님의 섭리로 이스라엘의 총독이 되어 고국으로 귀환합니다. 귀환하여 가장 먼저 한 것이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어려움이 많았지만 동족들과 함께 마음과 힘을 합하여 52일 만에 성벽 전체를 복구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성벽 재건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개혁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백성이 되도록 내적인 개혁을 시도한 것입니다.

 

성벽 재건 공사를 마친 때가 유대력으로 625일이었습니다. 일주일 후 71(신년 첫날)에 백성들이 수문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율법이 낭독되었습니다. 그 율법을 듣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회개를 중지시켰습니다. “오늘은 울지 말자! 오늘은 즐거운 축제의 날로 지키자! 대신에 금식하며 회개하는 날을 별도로 갖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모인 날이 724일이었습니다. 성벽 재건 공사를 마친 날로부터 꼭 한 달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9:1-2을 보세요. 그 이하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와 결단에 관한 요약입니다.

 

10장에는 회개와 결단에 앞장선 지도자들의 명단과 그들이 서약한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0:28-39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바르게 살겠다는 서약의 구체적인 내용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과 통혼하지 않겠습니다.

인식일 거룩하게 지키겠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을 버려두지 않겠습니다.

 

얼마 후 성벽 낙성식을 거행했는데 그때도 백성들이 다시 한 곳에 모였고 그들이 서약한 대로 실행에 옮겼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12:44-13:3입니다. 이로써 외적인 개혁과 내적인 개혁이 동시에 성취됨으로써 나라는 크게 안정을 찾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제20년부터 32년까지 12년간 이스라엘의 총독으로 일하다가 다시 수산 궁으로 복귀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떠난 후에 이스라엘 사회는 다시 개혁 이전의 시대로 퇴보하고 말았습니다. 십일조와 안식일 규례가 준수되지 않았고 성전 예배가 제대로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과의 통혼도 다시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느헤미야가 다시 총독으로 부임합니다(13:6-7). 총독으로 다시 부임한 느헤미야는 동족들의 탈선과 영적 퇴보를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서 두 번째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것이 느헤미야 13(4-31)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받아야 할 첫 번째 교훈은 느헤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지속적인 개혁 없이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 버리는 못된 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16-17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외쳤습니다.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

 

외적인 개혁은 한 번 개혁하면 그것이 장기간 지속됩니다. 하지만 내적인 개혁은 한 번의 개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쉼 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내면과 일상의 생활이 다시 구습으로 되돌아가고 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내면과 일상생활의 개혁 가운데 가장 힘들고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가정생활의 개혁입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정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이 된다면 우리의 인생은 상당히 성공한 것으로 판단해도 좋을 것입니다. 직장이나 사업에 성공했다고 해도 가정이 불행하면 그 성공, 그렇게 부럽지 않습니다. 직장이나 사업이 신통치 않아도 가정이 행복하면 남부러울 게 없습니다. 밖에서는 시달려도 행복이 가득한 집으로 귀가하면 피곤이 다 풀리고 다시 새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물론 밖에서도 집에서도 형통하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가정의 행복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이 행복한 가정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에서 행복한 가정의 필수적인 조건, 한 가지만 말씀하겠습니다. 그 한 가지 조건이란 가족의 원활한 의사소통입니다.

 

상식이지만 의사소통(커뮤니케이션)의 일차적인 도구는 말(언어)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합니다. 바벨탑이 무너진 이유는 의사소통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공사가 중단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결국 도시가 폐허가 되었습니다.

 

본문 13:23절을 보세요. 이스라엘 사회에 통혼이 다시 성행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합니다. 느헤미야의 1차 개혁 때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통혼 금지 규례에 서약했습니다(10:28-30). 그런데 그 서약을 파기하고 이방인과 통혼했습니다(13:23). 그렇게 서약을 파기한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큰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맹세를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맹세했다면 해로울지라도 지켜야 한다고 명시합니다. 더구나 이방인들과 통혼하지 않겠다는 맹세는 하나님의 율법에 따른 맹세였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준수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시 이방인과 통혼하는 이전의 구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유대인들이 왜 이방여자와 결혼했을까요? 우선 자식들이 떼를 썼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녀 이기는 부모가 많지 않습니다. 정력이 펄펄 끓는 청년들이 이방 여자에게 끌리는 것, 특히 이방 여자들의 외적인 매력에 빠지는 것, 부모가 막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이방 여자나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우기면 그 결혼을 막기는 대단히 힘듭니다. 부모는 별 마음에 안 드는데 자녀들이 좋다고 우기니까 마지못해 결혼을 승낙 하는 경우가 많은데 느헤미야 시대에도 그랬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경제적인 이유가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 사회의 우선적인 관심은 오늘날처럼 경제적으로 윤택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돌아보니까 이방인들이 부유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지금까지 고수했던 율법 중심의 삶보다는 이방인들의 자유분방하면서도 물질적으로 풍부한 삶이 부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청년들이 이방인과 결혼함으로써 경제적 자립을 꾀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유대 청년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는데 그 자녀들이 이방인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13:24절을 보세요. “그들의 자녀 가운데 절반쯤은 아스돗 방언을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자연히 엄마가 쓰는 말에 익숙해집니다. 대신에 유대인 아버지가 사용하는 히브리말은 점점 외국어처럼 낯설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자녀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고 부자간의 깊은 정도 나누지 못하게 됩니다. 자녀들에게 육신적으로는 아버지이지만 정신적으로 인격적으로 아버지 노릇을 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그래도 아버지의 품에 달려가 안기지만 머리가 커가면서 속 깊은 말을 아버지에게 할 수 없기에 아버지와 자꾸 거리가 멀어지고 대화가 단절됩니다. 그러면서 자녀들에게 정체성의 혼란이 일어납니다. 이 정체성의 혼란이 가중되면 아예 아버지를 피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특히 결혼할 배우자를 정할 때, 아버지는 아무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나서서 그 결정에 개입하려고 하면 갈등의 골만 깊어집니다. 이 같은 현상을 본문 24절에서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재미교포들 사이에서 이와 비슷한 얘기가 많습니다. 그들이 미국으로 이민 가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제 먹고 사는 데는 별 아쉬운 것이 없는데 자식농사에는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자식 농사의 실패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말보다는 영어가 훨씬 더 쉬운 아들과 딸, 며느리와 사위, 손자와 손녀들이 부모와 자꾸 거리가 생깁니다. 그러니 가족의 유대가 점점 약화되고 남남이나 다를 바 없게 됩니다. 이처럼 자식 농사에 실패한 이민 1세대 부모들이 노년에 이르러서는 사는 게 별 행복하지 못하다고 한탄합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도 성도가 국제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결혼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성공적인 국제결혼의 예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유대 남자인 살몬과 결혼했고 모압 여인 룻도 유대 남자인 보아스와 결혼했습니다. 이 두 여인들은 유대인으로 귀화하여 훌륭한 믿음의 가문을 이루었다. 이 두 여인들 모두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국제결혼에 있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의사소통입니다. 의사소통만 된다면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습니다. 사랑지상주의자들은 사랑만 하면 국경도 피부색깔도 언어의 차이도 다 괜찮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특히 사랑을 성숙시켜 나가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언어라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입니다. 그러므로 국제결혼을 한다면 피나는 노력을 해서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국제결혼은 재고해야 합니다.

 

개그콘서트의 프로 중에 대화가 필요해!”라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식탁에서 벌어지는 아빠 엄마 아들(김대희, 신봉선, 장동민) 간의 대화를 주제로 한 프로입니다. 이 코너에서 시청자들에게 고발하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가정이 불행하다면 그 이유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부족이나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부적절한 대화기술에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그 집안이 불행한지 행복한지를 알려면 간단합니다. 식탁을 보면 됩니다. 어쩌면 김대희 신봉선 정동민 가족들이 우리보다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식사라도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아빠 엄마 자녀들이 한 식탁에 앉아서 식사하는 때가 일주일에 몇 번이나 됩니까?

 

더 큰 문제는 함께 식사를 해도 대화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코로나 비상사태로 인해 가정의 식탁 풍경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감사할 일입니다. 이전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침에는 일어나는 대로 제각기 식사를 대충하고 직장으로, 학교로 달려 나갑니다. 저녁에도 귀가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함께 앉아서 식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모처럼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지만 별 대화는 없습니다. 대화가 있어도 하나마나한 상투적인 대화에 불과합니다. 식사를 마치면 이내 아이들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기가 바쁩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선적으로 대화를 많이 해야 합니다. 대화할 시간이 부족하면 의도적으로라도 시간을 내어야 하고 그 짧은 시간에 질 높은 대화를 해야 합니다.

 

질 높은 대화란 무엇입니까? 근간에 일어났던 일들(감사한 일과 힘든 일)을 솔직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장 해야 할 중요한 일을 알리고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질 높은 대화란 신앙적인 대화, 영적인 대화입니다. 그렇다고 따분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여서는 안 됩니다. 대화 상대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대화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느헤미야가 이방 여인과 통혼한 유대인 몇 명을 크게 책망하고 저주하고 때렸습니다. 25절을 보세요. 재판을 통해 응당한 벌을 내렸다는 뜻이지만 그래도 지나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가 왜 그렇게 엄하게 책벌했을까요? 그 이유를 26-27절에서 술로몬 왕을 반면교사로 들어 설명합니다.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분열되고 결국 망하게 된 것은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을 왕후로 맞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방 여인들이 왕후로 들어오면서 그들이 믿던 우상종교들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그 결과, 유대사회가 여호와 중심의 신앙에 타 종교도 수용하는 혼합주의 신앙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신앙의 변질입니다. 타민족과의 통혼으로 인해 신앙이 변질된다면 가정과 사회가 몰락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기에 느헤미야는 극한 분노까지 발하면서 통혼의 풍습을 척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라가 쇠락하는 것, 기업이 파산하는 것, 정당이 분열되는 것,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 가정이 깨어지는 것, 부부가 이혼하는 것, 부모와 자녀가 갈등하는 것, 이 모든 것의 저변에는 하나 같이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관계의 회복은 원활한 의사소통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의 가장 좋은 도구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대로 의사소통의 가장 좋은 도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가족들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읽고 나눌 때, 그리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하여 예배할 때, 거기서 행복의 꽃이 핍니다. 거기서 거룩한 신앙이 자녀들에게 전수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유산은 신앙의 유산입니다. 다른 것은 못해도 신앙만은 전수해야 합니다. 신앙의 전수야말로 부모가 자녀에게 대물려 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유산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자녀들이 히브리말을 모르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신앙을 전수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들이 성전예배나 회당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느헤미야가 후손들과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여 엄격하게 통혼을 금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갔을 때 이국땅에서도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가정과 회당에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교육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귀환한 다음에도 신앙교육의 장은 가정과 회당이었습니다.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율법 책을 날마다 정한 시간에 읽어주고 회당에서는 랍비(율법선생)가 율법을 반복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가정에서의 신앙교육과 교회에서의 신앙교육입니다. 가정과 교회가 연대하여 우리의 자녀들에게 신앙을 충실하게 전수할 때 그래야 다음 세대가 희망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들은 두 가지를 결심해야 합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겠다는 결심과 자녀들을 교회학교에 출석하도록 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이 두 가지의 결심과 실천은 자녀들의 장래와 가정의 행복을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최고의 우선순위입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먼저 이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28절을 보세요. 이방인과의 통혼 척결에 미온적이었던 대제사장의 가문을 가차 없이 치리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지도자의 가정이 먼저 모범을 보여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장로와 집사의 자격 요건 가운데 가정과 자녀들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딤전 3:2-5)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딤전 3: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이런 점에서 우리 한국교회는 과거에 좋은 전통이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불신 결혼을 하지 않도록 중직자들부터 본을 보이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자녀가 불신 결혼하면 당회가 부모를 불러 경책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준수해야 할 좋은 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녀의 결혼을 앞두고 부모가 가장 염려하는 것은 불신 결혼일 것입니다. 자녀가 신앙이 없거나 결혼할 배우자가 신앙이 없는데도 결혼해야 한다면 결혼식을 하기 전에 제게 찾아오셔서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이유는 결혼식이 인생의 아주 중요한 전환기이기 때문입니다. 대책 가운데 하나는 예비 신랑 예비 신부로 하여금 저와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시간은 한 시간정도면 됩니다. 그 시간에 대화하면서 왜 결혼하려고 작정했는지, 결혼생활에 기독교 신앙이 왜 중요한지, 결혼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할 수 있는지를 잘 설득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그때까지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았던 예비 신랑 예비 신부들이 거의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기대하며 새롭게 마음을 다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녀들의 결혼을 앞두고 염려만 하지 마시고 가정의 중대사를 상의하기 위해 제게 오시기 바랍니다. 이 일을 하라고 제가 여러분의 담임목사로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의 담임목사이므로 우리교회의 청년들이나 여러분의 자녀들의 결혼식에 제가 주례한다면 감사하고 크게 기뻐할 일이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른 분이 주례해도 괜찮습니다.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비 신랑 예비 신부가 제게 와서 인사하는 것은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그들에게 1시간정도의 시간을 내서 저와 대화하라고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신랑 신부는 물론 여러분에게도 크게 유익할 것입니다.

 

제가 주례할 경우에는 신랑 신부가 모두 예수 믿는 것이 확인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제가 전하는 기독교의 복음을 수락하고 믿음을 고백해야 주례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교회의 주일예배 때 학습을 받으면 가장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듯이 제가 주례할 경우에는 기독교예식으로 진행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고후 6:14-16)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과 전혀 교제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교제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견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히 결혼할 때 양보해서는 안 될 선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동일한 신앙입니다. 이유는 신앙이 같지 않고는 진정으로 한 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신 배우자가 나중에 신앙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그 세월이 무척 고통스럽게 때문에 그 길을 권장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다음 주일에 말씀드리겠지만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것과 더불어 오늘의 핵심주제인 가정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 우리의 최우선의 과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확인한 대로 느헤미야의 2차 개혁의 마지막 과제가 가정 세우기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큽니다. 가정이 바로 서야 교회도 사회도 희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정을 바르게 세우는 것, 무척 어렵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29-31절입니다.

 

느헤미야처럼 기도합시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적어도 2가지를 준수하도록 기도합시다!

일주일에 한 번 가정예배 드리기

교회학교에 자녀를 충실하게 참여시키기(다음주일부터 교회학교를 재개합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을 새롭게 하려면 우리의 가정이 먼저 바로 서야 합니다. 가족들부터 신앙 안에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전수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 찬송가 559

 

 

요약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후 수년이 흘러,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이 시기에 느헤미야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 페르시아 왕궁에서 일하는 관리가 되었고, 얼마 후 이스라엘의 총독이 되어 고국 이스라엘로 귀환했습니다. 귀환하여 가장 먼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함으로 외적인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외적인 개혁으로 만족하지 않고 내적인 개혁도 시도했습니다. 지도자들과 함께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서약,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겠다는 서약,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서약, 여호와의 성전을 버려두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고, 서약한 대로 실행에 옮겼습니다(12:44~13:3). 이렇게 외적인 개혁과 내적인 개혁이 동시에 성취됨으로써 나라는 크게 안정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떠난 후 이스라엘은 다시 개혁 이전의 시대로 퇴보하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느헤미야가 다시 총독으로 부임했고, 두 번째 개혁을 시도했습니다(13:4~13).

우리에게도 지속적인 개혁 없이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 버리는 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내적인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내면과 일상이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내적인 개혁은 무엇일까요? 가정생활의 개혁입니다. 주님께서는 행복한 가정을 기뻐하십니다.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가족 간에 의사소통이 원활해야 합니다.

율법은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합니다.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있을 당시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말자고 서약까지 했던 이스라엘이었습니다(10:28~31). 그런데 이스라엘 사회에 이방인과의 결혼이 다시 성행하게 되었습니다(23). 이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큰 죄였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이방여인과 결혼하겠다고 떼쓰는 자녀들을 이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청년들은 이방인들의 자유분방하면서도 물질적으로 풍부한 삶이 부러워서, 이방인과의 결혼을 통하여 경제적 자립을 꾀했던 것 같습니다. 유대 청년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는데, 문제는 그 자녀들이 히브리말을 쓰지 못하는 이방인과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24). 이렇게 되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아버지는 아무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나서서 그 결정에 개입하려고 하면 갈등의 골만 깊어집니다.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짧은 시간이라도 내어 대화해야 합니다. 대화 상대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대화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이방여인과 결혼한 유대인 몇 명을 크게 책망하고 저주하고 때렸습니다(25). 그는 그 이유를 솔로몬이 이방여인들을 맞아들임으로 그들이 믿던 우상종교들도 함께 들여와서 이스라엘의 신앙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26~2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이 변질되지 않길 원하십니다. 신앙의 변질은 가정과 사회가 몰락하는 결정적인 원인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변질 저변에는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사소통의 가장 좋은 도구는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가족들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읽고 나눌 때, 그리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하여 예배할 때, 거기서 행복의 꽃이 피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유산은 신앙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있을 때 이국땅에서도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가정과 회당에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교육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가정과 교회가 연대하여 우리의 자녀들에게 신앙을 충실하게 전수해야 다음 세대에 희망이 있습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고, 자녀들을 교회학교에 출석하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먼저 이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장로와 집사의 자격 요건 가운데 가정과 자녀들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딤전 3:2~5, 12).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결혼을 준비할 때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견지해야 합니다(고후 6:14~16). 신앙이 같지 않고는 진정으로 한 몸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불신 배우자가 나중에 신앙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그 세월이 고통스럽게 때문에 그 길을 권장할 수 없습니다.

 

가정을 바르게 세우는 것은 우리의 최우선의 과제입니다. 세상을 새롭게 하려면 우리의 가정이 먼저 바로 서야 합니다. 가족들부터 신앙 안에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전수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목장에서의 나눔

1. 우리는 왜 자신을 지속적으로 개혁해야 하나요?

2. 가족 간 의사소통의 가장 좋은 도구는 무엇인가요?

3. 어떻게 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복한 가정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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